⑫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유옥’ 벗어나기 위한 소녀의 모험
신화와 동화적 감수성 만남 ‘눈길’
세파에 이기고 싶다면 자신을 알라

“처음 받은 꽃이 이별의 꽃이라니, 싫어.”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소녀가 울듯이 이야기한다. 앞자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괜찮아”를 연발한다. 이내 가족은 자신들이 새로 이사할 집을 찾지만 이미 길을 지나친 상황. 아버지는 호기롭게 도로 사이에 난 산길을 올랐지만, 그 끝에는 돌상과 빨간문이 있다.

잠시 은퇴를 선언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귀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과 치히로)’의 이야기는 치히로의 가족이 빨간 문을 지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센과 치히로’는 믿고 볼 수 있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아쉬지 않을 정도의 명작이다.

낯선 세계에서 부모는 아무도 없는 가게의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만 홀로 남게 된다. 치히로를 구해준 것은 미소년 하쿠. 하쿠는 길섶의 열매을 먹게 해 치히로에게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무대는 마녀 유바바가 운영하는 ‘유옥(油屋)’이라는 온천장으로 넘어간다. 이곳 또한 희한한 곳이다. 치히로(千尋)는 ‘일하지 않으면 유바바가 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이 ‘유옥’에서 유바바에게 ‘센(千)’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일을 하게 된다. 치히로이자 센은 ‘유옥’에서 부모님을 구하고,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센과 치히로’의 공간적 주 무대는 바로 ‘유옥’이라는 곳이다. ‘유옥’은 말 그대로 ‘기름 집’ 즉, 불타고 있는 집이다. 화택(火宅)은 〈법화경(法華經)〉에 쓰인 유명한 비유이다. 화택(火宅)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로 점철된 이 세상을 뜻한다. 이 세상을 태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불길은 지배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욕망’ 혹은 ‘집착’이다.

‘유옥’은 일본의 만신들이 지치고 힘든 몸을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유바바에게 일정 부분의 돈을 지불한다. 노동에 대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옥’은 이미 ‘신들이 쉬어가는 곳’이 아닌 단순한 ‘영업장’으로 비춰진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군상들도 대부분은 물욕과 식욕을 좇는 범부들이다. 도마뱀 고기나 사금을 보며 모여드는 종업원·항상 돈과 보물을 세고 있는 유바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화택의 이미지를 가진 ‘유옥’에 물의 이미지를 결합해 한번 더 비틀기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에서 불은 ‘파괴’를, 물은 ‘정화’의 이미지를 의미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의 7일간’이나 ‘모모노케 히메’의 생명의 상징인 사슴신이 쉬어가는 샘은 이런 역할의 이미지를 대변해준다.

유바바가 불의 이미지라면 치히로(센)는 물의 이미지다. 치히로는 목욕탕의 때를 벗기고 약수를 길어온다. 치히로는 항상 물과 함께 한다. 오물신을 강의 신으로 정화시킨 것도 치히로였다. 본래 강의 신이었던 하쿠와의 첫 기억도 치히로가 ‘코하쿠 강’에 빠진 것이다.(하쿠는 치히로가 자신을 기억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작품에서 터닝 포인트는 치히로가 기차를 타면서부터다. 갈 수만 있고 되돌아올 수 없는 기차. 늪의 경계를 돌아 ‘늪의 바닥’역을 지나 사라지는 기차의 이름은 ‘중도(中道)’이다. 그 기차를 타고 치히로는 ‘늪의 바닥’으로 향한다.

‘중도’의 기차길에는 끊임없이 수평선의 경계만이 비춰진다. ‘센과 치히로’의 모든 것은 경계에 걸쳐있다. 물과 불·차안과 피안·욕망과 정화·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목가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의 ‘중도’ 기차의 여정을 통해 완전히 하나가 돼 진망화합한다.

이렇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에서 생성시킨 이미지들은 이 같은 경계를 흔들면서 미묘한 자장을 형성시킨다. 이런 자장은 우리에게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사유케 해주는 단초로 작용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施設)된 것이며, 그것은 ‘중도’ 그 자체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일체의 존재는 ‘있고, 없고’의 양변의 존재를 떠나 있다는 말이다.

치히로와 센이라는 존재는 결국 ‘하나’였다. 모든 존재의 실재(實在)는 다만 연에 의한 잠깐의 이름에 불과하다. ‘센과 치히로’의 세계는 모두 치히로와의 관계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치히로가 만나고 경험하는 인연들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센과 치히로〉가 가지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하쿠와 함께 돌아온 치히로를 맞는 것은 유바바와 12마리의 돼지들이다.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여기서 부모를 찾아봐라”라고 소리친다. 찬찬히 둘러본 치히로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물론 정답이었다.

월호스님은 이 부분을 자신의 책 〈영화로 떠나는 불교여행〉에서 “무(無)야말로 자신의 본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이라며 “이것은 무심의 경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정작 센과 치히로는 행방불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돌문을 나와 현실로 돌아간다. 치히로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이 행방불명돼 있지 않는가’라고 스스로 자꾸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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