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 선사의 편지 〈11〉

‘효봉 스님의 이거 요청에 대한 답
이거처는 정확히 알 수 없어
추신 통해 대중에게 문후와
향봉·탄허 스님의 소식 전해

효봉 선사(曉峰禪師)에게 보낸 답서
편지를 받은 지 오래되어 해가 바뀌었는데도 아직 답신을 보내지 못했으니, 나의 허물이 실로 작지 않습니다. 법체가 항상 시절에 따라 만중(萬重)하시며 또 사내(寺內)도 두루 평안하시다니, 우러러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법우(法友 한암 스님 자신을 가리킴)는 작년 동지달 초순 무렵에, 새벽에 문밖을 나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허리와 팔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겨울 내내 누워 지냈습니다. 아직도 완쾌하지 못하여 기혈이 쇠약한 것이 팔구십 노인보다 더합니다. 상황이 그러한데 무슨 심정으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 나겠습니까. 나는 그저 스스로 졸렬한 분수를 지키면서 깊은 산속에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이 분수에 족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앞날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만약 석장(錫杖, 주장자. 선종사원에서는 입방, 移居의 의미로 쓰인다)을 옮긴다면 귀사(貴寺)에 갈 뜻이 있습니다. 비록 나에게 오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가서 동참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량(海諒)하시어 주시고, 이 일은 제쳐두고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이옵고 답서의 예를 갖추지 않습니다.

병술년(1946년) 2월 초3일
한암은 절하고 답서를 올립니다.

<추신>
대중스님들에게 나를 위하여 대신 문후(問候)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향봉(香峰)스님은 지난 가을 탄허(呑虛)와 함께 남방에 있었습니다. 근래 편지를 받았는데, 월명암(月明菴)에서 동안거를 났다고 합니다.


이 편지는 효봉(曉峰) 스님에게 보낸 답서이다. 보낸 해는 1946년 병술(丙戌) 음력 2월 초3일로 상원사에 계실 때이다. 그리고 효봉 스님은 통합 종단 때 종정을 역임한 고승으로, 평양 고보(高普)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판사를 지냈다고 한다.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으로 출가하여 석두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한암 선사의 답서로 미루어 본다면, 효봉 스님이 한암 선사께 ○○사(寺)로 옮겨서 법을 펴 주셨으면 하고 청을 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 한암 선사는 “작년 동지달 초순 무렵, 새벽에 문밖을 나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허리와 팔을 다쳐서 겨울 내내 누워 있었고, 아직도 완쾌하지 못하여 기혈이 쇠약한 것이 팔구십 노인보다 더한데 무슨 심정으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 나겠느냐”고 심경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나는 그저 스스로 졸렬한 분수를 지키면서 깊은 산속에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이 분수에 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으니, 만약 어디로 옮긴다면 귀사(貴寺)로 갈 뜻이 있으니, 이 일은 놔두고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라”고 당부하고 그런데 효봉 스님이 한암 선사께 어느 사찰로 이거(移居)해 달라고 청한 것인지는 효봉 스님의 편지가 없어서 알 수 없다. 한암 선사가 효봉 스님에게 답장을 보낸 것은 1946년 음력 2월 초이다. 이 무렵 효봉 스님은 1946년 동안거 때부터 1950년 여름까지 5년 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있었다. 그 이전에는 송광사 삼일암에 계셨다. 송광사 조실이나 방장으로 오셔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야총림 방장으로 있으면서 해인사로 이거(移居)해 달라고 청한 것인지는(그렇다면 해인사 방장으로 모시겠다는 것이고) 알 수는 없으나 두 곳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추신>에서 한암 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나를 위하여 대신 문후(問候)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또 향봉 스님(香峰. 효봉 스님의 師弟)은 지난 가을 탄허(呑虛, 수제자)와 함께 남방(경남지역)에 있었는데, 근래 편지를 받았는데, 월명암(月明菴)에서 동안거를 났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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