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岩) 선사의 편지 〈8〉

“어떤 것이 ‘제일구’ 입니까?”
설봉은 양구
장생은 창천창천
한암 스님은 양구한 후 창천창천
도인의 가풍 묻는다면
“우두산색이 푸른 허공 찌른다”
편지원본 없고 〈경허법어〉에 수록

만공(滿空)선사께 답하는 편지
장마가 막 걷히어 창문을 반쯤 열어젖히니,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 소리와 함께 반가운 서신이 날아왔습니다.
어떤 스님이 설봉(雪峰, 설봉의존. 822~ 908)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 궁극의 진리)입니까?” 하니, 설봉이 양구(良久, 침묵)하시니, 어긋났도다(錯). 또 어떤 스님이 장생(長生, 長生?然)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하니 장생이 “창천창천(蒼天蒼天, 아이고 아이고).”이라 하시니, 어긋났도다(錯).
이것을 두고 열제거사(悅齋居士)가 평하기를 “설봉스님의 양구(良久)는 제이구(第二句)이고, 장생의 창천창천(蒼天蒼天)은 제삼구(第三句)에 떨어졌다.”라고 하였는데, 문득 어떤 스님이 나에게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양구(良久) 후에 “창천창천(蒼天蒼天).”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옆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나와서 말하기를 “스님(한암)께서는 어긋난 것을 가지고 더욱 어긋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將錯就錯).”라고 말한다면, 나는 곧바로 “그대는 어디서 이런 소식을 알았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옛 조사의 언구(言句)가 천하에 가득하다.”라고 말하면, 나는 곧바로 “옛 조사 스님들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답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의 일은 그만 두고 도인(道人, 한암)의 가풍은 어떠한지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장자로 탁자를 한 차례 치고 나서 “수많은 문들이 일시에 열리니 우두산의 푸른 빛이 허공에 꽂혔다(萬戶千門一作開, 牛頭山色揷天碧)라고 할 것입니다. “쯧쯧(?)!”

이 편지는 한암선사가 맹산 우두암에 있을 때 만공스님에게 보낸 답서이다.
만공선사가 선승들에게 ‘무엇이 제일구(第一句)인지 한마디 일러 보라’는 서신을 보냈다. 한암선사는 자문자답 형식으로 당말 송대 선승들의 송(頌)과 착어(着語)를 인용한 다음 자신의 착어와 송을 붙이고 있다.
제일구(第一句)란 곧 제일의(第一義)와 같은 말이고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와도 같은 말이다. 즉 선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한마디를 제일구(第一句)라고 하는데, 이에 반하여 제이구(第二句)나 제삼구는 2등, 3등과 같은 말이다. 즉 핵심을 찌르는 답이 못 된다는 뜻이다.
제일구에 대하여 설봉(雪峰) 스님은 양구(良久, 침묵)를 했고, 장생(長生) 스님은 “창천창천(蒼天蒼天, 아이고 아이고)”이라고 했는데, 언어도단(言語道斷)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 보라고 하니 설봉은 ‘양구(良久, 침묵)’를 했고, 장생스님은 ‘아이고 아이고(蒼天蒼天)’라고 통곡한 것이다.
선어에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열면 곧바로 어긋남),’ ‘언전불급(言詮不及; 말이 닿지 못함)’이라는 말이 있다. 언어문자로 표현한다면 선의 핵심(제일구)은 그 언어의 개념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사면 가운데 한쪽 면만 표현하는데 그친다. 즉 제이, 제삼에 불과하게 된다[落在二三頭].
여기에 대하여 한암선사는 모두 ‘착(錯; 어긋났다)’이라고 했는데, 즉 제일구의 소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인데, 이렇게 비평하는 것은 착어(着語)를 하기 위한 전형적인 방법이다
한암선사는 누가 나에게 ‘옛 선승들이 한 말은 그만 나열하고 한암스님 당신의 가풍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주장자로 탁자를 한 차례 치고 나서 ‘만호(萬戶) 천문(千門)이 일시에 열리니 우두산색이 푸른 허공을 찌른다(萬戶千門一作開, 牛頭山色揷天碧)’라고 답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돈각(頓覺)의 경지, 본래면목을 깨달은 당당한 모습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제일구에 대한 한암선사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간은 초암자(草庵子)라고 하는 이가 필사한 [경허법어] 끝에 ‘第一句答’이라는 큰 제목 하(下)에 ‘맹산 우두암 방한암 답(孟山 牛頭庵 方漢岩 答)’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한암선사가 맹산 우두암에 있을 때에 보낸 것이므로 1911년(36세)~1917년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