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동안 매달 가정법회 운영
“금강산에도 여여원 있었네”
금강산 여여원방문 후 불사 원력
20년 이어온 ‘여여회’‘여여원’으로
원력 세우니 신기하게 도움 잇달아


금강산에서 여여원을 만나다
지금 생각해보면 20여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집에서 법회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 나에게 “잘했다!.” 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오랜 세월 집을 공개하고 법회를 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사명감을 가지고 편하게 한다고는 했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개인생활이 오픈되니 항상 조심스런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도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답답한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오는 사람들도 한 개인의 집에서 오랫동안 법회를 여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그들도 성장한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생각하고, 어디를 무인도로 정할까 하고 눈여겨보고 있는데, 마침 북한에서 금강산을 개방해 남쪽에서 관광단이 그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 금강산에 다섯 번이나 다녀왔고, 여여회를 여여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집안의 법당이 집밖으로 나온 것이다.
금강산에 두 번쯤 다녀왔을 때 즈음, 불교신문을 보다가 송광사 스님들께서 효봉스님이 오도송을 읊은 법기암에 가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강산에 마음이 온통 가 있던 터라 바로 신청을 하고 따라갔다.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송광사에서 나온 책자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여여회를 20여 년 끌어오던 나는 이름만 보아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금강산에 여여원이 있었네.”
사연인즉슨 이러하다.
금강산 온정리에는 여여원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해방되기 전 효봉 노스님께서 그곳에 몇 년 주석하시다가 마하연으로 가셨다고 한다.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은 여여원에서 수십 리 떨어져 있다. 효봉스님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스님으로, 1925년(38세)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스님을 은사로 출가해서 1929년(42살) 겨울,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 선방에서 안거하며 장좌불와의 용맹정진을 했다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안팎이 넉넉해보이는 비구니 스님을 만났는데 그분에게 물었다.
“석두스님이 누구세요?”
“석정스님의 아버지 스님이세요.”
“석정스님은 누구세요?”
“부산에 계시면서 불화를 그리시는 분이시죠. 불교회화의 장인인 불화장이세요.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이시지요.”
석정스님을 만나 뵈면 여여원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아 금강산에 다녀오고 바로 비구니스님과 함께 석정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은 부산의 한 주택가에 위치한 선주산방에서 그림을 그리시고 계셨다.
“옷이 참 곱네요. 서울 바느질이라 그런가요?”
삼배를 올리고 나자 스님께서 광목에 녹차물을 들인 내 블라우스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었다. 손님 일행을 맞는 스님의 태도가 참으로 따스하고 진실했다. 비구니 스님께서 우리가 찾아간 목적을 말씀하셨다.
“스님, 여기 이 보살님하고 금강산에 갔더니 온정리에 여여원이라는 절이 있었더군요. 그 내력을 좀 듣고 싶어왔습니다. 이 보살님이 서울에서 가정 법회를 열고 여여회라는 신행단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름이 같아서 내력이 궁금하다고 하는 군요.”
스님께선 잘 알고 계시다는 듯 여여원의 내력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두스님께서 금강산 비로봉에서 오도송을 읊고 내려오셨는데, 북간도 용정에서 온 처사 김현을 만났다고 해요. 금강산에 석두라는 도인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었지요. 그는 독립군 전사자 미망인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작은 재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석두스님의 설법을 듣고 아예 금강산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정리 온정천 다리 건너 숲속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이층 양옥 여여원을 지어 수행처로 삼았다고 합니다. 석두 스님이 그곳에 계실 땐 절에 갈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이나 상궁 등 많은 사람들이 법문을 들으러 다녔는데, 돈을 전혀 받지 않고 무조건 베풀기만 했다고 하는 군요. 자식이 없고 형편이 넉넉한 김현 처사의 이모님이 많은 시주를 했다고 해요. 석두스님이 그곳을 떠난 뒤로는 효봉스님이 그곳에서 수행하시기도 했죠.“
석정스님께선 상세하게 옛일을 들려주셨다. 맑고 담백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석두스님께선 김현 처사를 가리켜,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이 김현이지”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여여원의 내력에 대한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으며 여여회를 이끌어오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고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금강산에 그렇게도 이끌렸던 이유, 보덕암에 가서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이유, 온정리에 가자 그렇게도 환희심이 올라왔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스님 제가 서울에서 여여회라는 공부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여여원이라고 해도 될까요?”
“남한에도 있으면 좋죠.”
돌아오는 길에 석정스님께서 즐겨 입으시던 옷 한 벌을 가지고 와 감을 끊어 입으실 옷 세벌을 보내드렸다. 스님을 뵙게 된 인연을 감사하게 여긴 나의 작은 감사의 표시였다. 돌아가시고 나서 들으니 세 벌 모두 즐겨 입으셨다고 한다.
스님을 다시 찾아뵈었을 때다.
“스님 이제 제가 나이도 있고 해서 회향(回向)을 제대로 한번 하고 싶습니다. 회향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좋은 일이지요. 회소향대(回小向大)가 회향입니다. 작은 것을 돌려 큰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이지요. 보통 회향을 끝나는 것으로 아는데 진정한 회향은 시작에 있습니다. 여태껏 해온 작은 것을 돌려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스님을 뵙고 와서 밖에 절을 한번 세워야겠다는 원력이 생겼다. 집에서 법회를 하는 것에 한계를 느낄 즈음이었다. 여여원을 운영한 김현처사의 이모님처럼 넉넉한 부자는 아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번째 금강산 보덕암에서 조촐한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순례 회향식을 치르면서 많이 울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누가 보던 말던 목놓아 울었으니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지 싶다.
그러한 인연으로 서울 광진구에 여여원이 세워졌다. 공부방이 집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린이 대공원 앞 건물 3층에 조그마하지만 정갈하고 소박한 법당을 운영하게 되었다. 신묘하게도 금강산에 다녀오고 나서 법당을 꾸릴만한 비용이 내 앞에 왔다. 돈을 축적해 두는 삶과는 거리가 먼 내게 그것은 부처님께서 회향을 한 번 잘 해보라고 주신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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