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길을 가다’- ⑪ 심우장과 만해 그리고 열반

불교 대중화 위해 〈불교〉誌 인수
사회·독립운동하며 대중 계몽나서

만년 돼서야 성북동에 ‘심우장’ 마련
총독부가 싫어 북향 지은 일화 ‘유명’
창씨개명·학병징용 반대 운동 전개
조선 독립 못보고 1944년 열반 들어

▲ 서울 성북동 심우장 외경. 1933년 만해 스님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련한 자택이다. 이곳에서 만해 스님은 말년을 보내며 여러 사회·민족운동을 전개한다.
만해 스님의 삶은 그 범위가 매우 다채롭다. 수행자로서 삶을 살면서 항일 운동을 했다. 구도와 독립의 염원을 노래한 시인이었고 사회 계몽 운동을 전개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선각자로서 면모를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출판사업이다.

만해 스님은 1931년 6월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였던 〈불교〉를 인수해 〈유심〉에서 못 이룬 불교 대중화·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84호부터 시작했던 만해 스님의 〈불교〉는 108호까지 발간됐으며, 종교에 관련한 글뿐만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향방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들을 다뤘다.

필자들도 대부분 당대 지식인과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저자들을 살펴보면 박한영, 방한암, 송만공, 백용성, 송종헌, 권상로, 김영수, 김태흡, 백성욱, 정인보, 이광수, 고유섭, 김법린, 유엽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고은 시인이 쓴 만해 스님 평전에는 당시 〈불교〉에 만해 스님이 얼마나 열정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김영수 씨가 고은 시인의 만해 스님 평전에 털어놓은 당시 회고는 이렇다.

“나는 그 무렵 하와이의 불교 청년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었지. 만해 화상은 〈불교〉지 운영 때문에 그나마 볼품없는 얼굴이 반쪽이 돼 있었어. 그러나 우리 필자들은 원고료 따위는 상상도 하지 않았어. 그만큼 열성들이었으니까.”

또한 만해 스님은 광기의 시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경전 인출 등에도 신경을 썼다. 1931년 7월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된 한글 경판 원본인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과 〈유학〉, 〈천자문〉등을 발견·조사하고 찍어냈다.

그해 9월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를 설치해 나병 구제에 정력을 쏟았다. 하지만 스님 자신은 머리 누일 방 한칸이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여기에 요시찰 인물이었던 만해 스님에게는 항상 일제에 협조하는 조선인 경찰이 따라 다녔다.

실제 구하 스님이 만해 스님에게 통도사 산내 암자를 맡아 조용히 지내라고 해서 통도사에 잠시 내려가 있을 때에도 조선인 경찰이 찾아와 통도사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 당시 만해 스님은 ‘모기’라는 시로서 조선인 경찰에 일침을 가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해의 마지막 거처 ‘심우장’
만해 스님은 1933년, 55세에 이르러서야 성북동에 집 한칸을 얻게 됐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하나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인사가 마련해 준 것들이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었던 방응모의 주도로 집을 마련하려하자 벽산 스님이 자신의 토굴로 사용하려 했던 땅 54평을 내놓았고, 거기에 60평을 보태 집을 짓게 된다. 중등학교 수학 교사 최규동이 설계를 맡아 5간 한옥을 설계했으며, 집을 지을 때에는 박광, 김관호 등이 많은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심우장 건축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심우장은 한국 전통 가옥이 선택하는 남향이 아닌 북향을 하고 있다. 이유는 만해 스님이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수탈하고 있는 일제의 총독부를 마주할 수 없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북향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지은 것이 ‘심우장(尋牛莊)’이다. 만해 스님이 손수 지은 택호(宅號)는 불교의 깨달음의 과정을 도상화한 ‘심우도’에 기인한다. ‘심우도’에서 소는 마음에 비유된다. 마음자리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자의 삶을 기저에 두고 있는 만해 스님의 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스님은 심우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잡지 〈삼천리〉 1936년 6월호에 게재된 ‘심우장에서 참선하는 한용운 씨를 찾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만해 스님은 불당 같은 곳이 칩거하면 답답하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틈만 있으면 정좌하고 속념에서 물러나 참선하는 것이 매일의 중요한 일과”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어 “조용하고 틈이 있으면 언제든지 몇 십분이고 몇 시간이고 참선을 하게 된다”면서 “아침 일찍 세수한 다음 저녁밥이 지난 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같이 참선을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심우장의 내부. 스님이 살던 모습으로 잘 정리해 놓았다.
시대의 소도 같았던 심우장
심우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흑풍〉, 〈박명〉, 〈후회〉 등의 신문 연재 소설과 적지 않은 글이 여기에서 집팔됐다. 또한 당시 금서로 묶여 있던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다가 사전에 발각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일화 중 하나가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의 5일장을 심우장에서 지내게 된 일이다. 김동삼은 국권 강탈 후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인물로 1931년 일제에게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1937년 옥사했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의 갑작스런 죽음에 만해 스님은 며칠동안 통곡을 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세간은 달랐다. 연고자는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붙였는데도 조선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만해 스님은 서대문형무소로 찾아가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지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효당 최범술의 회고가 남아 있다.

“(일송의 영구)를 자기 자택 안방에 옮겨 모신 뒤 5일장을 치를 무렵에 이 소식을 들은 국내 유지들은 모두들 심우장에 운집했던 것이다. 그때 참석한 인사를 몇 사람 꼽을 것 같은면 정인보, 홍벽초, 김병로, 이인 씨 등 무려 수백 명 이었다 한다. 만해 선생은 일송 영구를 껴안고 방성통곡하였는데 평생 만해 선생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또는 호곡한다는, 만해 선생을 아는 사람은 처음이었을 것이며, 또한 단 한 번이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만해 스님은 일제 말기 혹독한 무단 정치 아래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을 전 조선인에게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 학도병 출병을 반대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경전 번역에도 힘써 〈유마경〉을 출간하기도 했다.

심우장에서의 생활에 대해 전보삼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장(한국박물관협회장)은 “만해 스님은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처럼 아파했다”면서 “청년들에게는 만지풍설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꿈꾼 조선독립
1933년 심우장에서 말년 생활을 시작한 만해 스님은 11년 뒤인 1944년 6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학도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제가 주는 배급을 거부해 영양실조까지 갔기에 그 마지막은 더욱 안타까웠다.

스님의 다비는 자신이 김동삼을 영결했던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조촐하게 거행됐다. 그마저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남은 유골들은 수습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조종현의 기록에 따르면 유해는 모두 소골(燒骨)이 됐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장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불가에서는 치아의 출현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스님의 깊은 법력에 감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을 뜻하는 무슨 길조(吉兆)가 오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깊이깊이 합장했다고 전해진다. 이 치아 역시 항아리에 담겨져 유골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만해 스님은 수행자이면서 민족운동가였고, 시대를 선도했던 사상가였으며, 깨달음의 열망과 자유 의지를 노래한 근대 시인이었다. 그가 보여준 치열한 삶의 궤적은 지금도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실제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고 상찬했으며 홍벽초 스님은 “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해 스님의 법신은 영원히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되고 주고 있다. 어두웠던 근대 민족사에서 인간의 근본 정신과 민족 자주의 의지를 심기 위해 노력한 스님의 사상을 다시 상기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만해 스님을 추모하기 위해 조종현이 쓴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중략〉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랑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것은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남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하략〉

▲ 망우리에 있는 만해 스님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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