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경봉 스님에게 답하는 편지

상원사 전소 위로에 대한 답신
경봉스님과 20여년 24회 서신 교류

경봉(鏡峰)스님께
보내 주신 편지는 염려하는 마음과 함께 잘 받았습니다.
법체가 여전히 청정, 만복하시고 사찰의 모든 대중들[諸節]이 태평하시다니 기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이곳은 산승(한암선사)이 덕(德)이 박하고 게다가 사찰의 운세도 불길한 탓으로 음력 2월 초이튿날 석양 무렵에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 새로 지은 건물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양대(兩大)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채가 모두 화마(火魔)에 휩싸여 재[灰]가 되었습니다. 겨우 건진 것은 불상(佛像)과 경궤(經櫃, 경전을 담은 함)와 가마솥과 객실(客室) 그리고 종각(鐘閣)뿐입니다. 현 주지 화상(이 종욱 스님)의 원력과 산중의 공의(公議)로 대목을 부르고 벌목(伐木)을 해서 금년 내로 새롭게 다시 중창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원래 일은 크고 힘은 약하고 또 시대가 변하고 번잡해서 빨리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이 어찌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세계의 성주괴공(成住壞空, 이 세계는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고 없어짐)과 우리 몸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이와 같이 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신이 흐려서 이만 줄입니다. 예(禮)를 갖추지 못하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해(1947년) 3월 7일
사제(舍弟) 한암(漢岩)은 절하고 올림


이 편지는 통도사 극락선원에 주석하고 있는 경봉스님에게 답한 편지이다. 날짜는 정해년(丁亥年, 1947년) 음력 3월 7일에 보낸 것으로 오대산 상원사 조실로 계실 때이다.
한암선사와 경봉선사는 16세 차이로 한암선사가 무려 16년이나 연상이다. 그렇지만 서로 ‘사제(舍弟)’라고 칭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이다. 두 분의 인연은 한암선사가 약 6년간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계실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후 20여 년 동안 24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서와 선기(禪機)가 맞아서였을 것이다
[줄거리] (1947년) 음력 2월 2일 해질 무렵에 새로 지은 건물에서 불이 났다. 그리하여 법당과 동서 요사채가 모두 타 버리고 그 화마(火魔) 속에서 겨우 가까스로 구한 것은 불상과 경을 담은 상자[經櫃], 가마솥, 객실, 그리고 종각(鐘閣) 뿐이었다. 다행히 국보인 상원사 동종과 문수동자상은 화마를 피했던 것이다.
당시 한암선사는 상원사 조실로서 72세였는데, 아직 겨울도 채 다 가기 전에 일어난 상원사 전소 사건은 만년의 한암선사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선원 전체가 하루 저녁 사이에 재가 되었으니 삼라만상은 일체개공이라고 하지만 그 허망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이나 우리 몸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이와 같이 무상하기 그지없다”는 말에서 당시의 한암선사의 심정을 읽을 수가 있다. 상원사 선원은 본사인 월정사 주지 이종욱스님의 원력과 산중대중들의 합심으로 그해 가을에 중창되었다.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같은 건축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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