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이 된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

김교각 스님의 수행으로 인해 돌에 족적이 남아있다는 구화산 고배경대.
중국에는 4대 불교성지가 있다. 바로 아미산, 오대산, 보타산, 그리고 구화산이다. 그중 구화산은 지장성지로 이름이 높은데 바로 지장왕보살로 불리는 김교각 스님으로 인해서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 성덕왕(698년)의 아들로 당나라 고종 영회 4년 24세에 출가, 흰 개(삽살개) 한 마리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입당구법(入唐求法)은 그 당시 신라 스님들 대다수가 서원했던 것으로 김교각 스님도 그중 하나였다.

중국에 건너와 각 지방을 돌며 불법을 구하다 스님은 먼저 오대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스님이 오대산에 오르자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지 오대산은 갑자기 기우뚱 하면서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이에 오대산이 자기가 머무를 곳이 아님을 안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은 다시 사방을 운유하던 중 안휘성 구화산에 이르렀다.

2007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정각원에 봉안된 김교각 스님 입상
김교각 스님은 구름덮힌 아흔 아홉 봉우리의 구화산 절경에 감복해 산 속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수도에 들어갔다. 흐르는 맑은 물과 백토(白土: 먹을 수 있는 흙)로 연명하며 30여년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후 덕 높은 고승이 구화산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원근 마을에서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때, 구화산 기슭에 살고 있던 산주(山主)인 민양화의 외아들 도명이란 청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따라 매일 김교각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환회심을 일으킨 도명은 어느 날 부친에게 김교각 스님을 친견할 것을 권하였다.

아들과 함께 김교각 스님을 친견하고 스님의 법문에 깊은 감복을 받은 민양화는 공양을 올리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스님을 초대했다. 공양이 끝나자 민양화는 김교각 스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

남양주 백천사에서는 김교각 스님의 유물 200여 점이 보관돼있다.
하라며 시주할 뜻을 내비쳤다. 김교각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기에는 초막으로서 부족하던 터라 땅을 시주할 것을 요구했다.

김교각 스님은 몸에 걸쳤던 가사를 벗어들고 이 가사로 덮을 만한 땅만 주면 절을 짓고 불법을 더 널리 펴겠다고 했다. 이에 ‘가사로 덮을 만한 땅이 크면 어느만큼 크랴’고 생각한 민양화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김교각 스님이 가사를 하늘로 뿌리자 가사는 마치도 날개가 돋히기라도 한 듯이 훨훨 구화산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차츰 커지면서 나중에는 구화산을 몽땅 덮어버렸다. 이에 놀라 입만 벌리고 있던 민양화는 김교각스님의 높은 덕행에 감탄하고나서 자기가 말한대로 한다고 하면서 구화산을 몽땅 김교각스님에게 시주했다.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는다’(度盡衆生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는 김교각 스님의 지장대원 염원에 감화를 받은 민양화는 이어 사재를 털어 사찰을 짓고 자신과 아들 도명은 제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보필하기로 원력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이러한 김교각 스님의 덕행은 당 황제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당 황제는 사찰을 더 크게 중수하고 손수 화성사(化城寺)라는 사명을 내렸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한편 스님들을 제접하며 불법을 펼치던 김교각 스님도 어느 덧 99세가 되었다. 스님은 794년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을 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열반에 들 때가 온 것을 안 김교각 스님은 어느 날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앉아 염불을 하며 조용히 좌탈입망(座脫入忘)을 했다.

<당 고승전>을 보면 김교각 스님이 입적을 하자 산이 울리고 돌이 굴러 떨어졌으며 대지에 신광이 번쩍이고 뭇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화성사의 종은 아무리 처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며 당고승전은 김교각 스님의 입적을 찬탄하고 있다. 김교각 스님이 입적 후 3년 뒤에 제자들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니 김교각 스님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근골을 건드리자 쇠사슬 소리가 났다.

불경에 나오는 지장보살에 관한 내용과 같은 현상이므로 그 때서야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 화현으로 여긴 화성사 스님들은 스님의 몸에 금분을 입혀 등신불로 육신보전탑에 모시고 깊이 숭앙하게 되었으며 명ㆍ청대에는 구화산에 사찰이 360여 곳, 승려가 5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님의 등신불은 현재 주화산(九&#21326;山, 구화산) 육신보탑(月身寶塔)에 모셔져 있으며 화성사는 구화산 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으며 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김교각 스님의 행적은 813년 동시대 지주시 청양현 사람인 비관경(費冠卿)이 스님의 입적 후 19년 뒤에 쓴 주화산 화성사기와 이용(李庸)이 편찬한 주화산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 어느 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은 없으나 비관경의 기록에 있는 출생 연대 및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32대 효소왕 4년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난 김중경(重慶), 부친은 후에 제33대 성덕왕이 된 신문왕의 둘째아들 흥광대군 효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선(詩仙) 이태백도 ‘바다같은 공덕, 대를 이어 영원하리라 "고 교각스님의 덕행을 찬미했을 정도니 교각스님이 중국 불교사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김교각 스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곁에서 지킨 삽살개를 구화산 수호신으로 삼고 있으며 민양화와 아들 도명을 김교각 스님 등신불의 협시보살로 모셔놓고 그들의 위법구망(爲法軀忘)의 신행심을 기리고 있다.

현재 구화산은 중국의 4대 성지(아미산 보현도량, 오대산 문수도량, 보타산 관음도량) 중의 하나인 지장도량으로 국내외 많은 참배객들이 몰리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김교각 스님을 김지장(金地藏)으로 존칭하며 해마다 김교각 스님이 입적한(음 7월 30일) 기일을 택해 한 달간 추모제를 열고 있다. 현재 구화산에는 94곳의 사찰과 1만 여기의 불상이 있다. 그리고 700여 스님들이 수행하며 지장성지로서 김교각 스님의 지장보살 대비원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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