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참제업장(懺除業障)

이변 여의고 중도 얻은 뒤

자재로운 해탈에 들어간다

해탈이란 자유로운 행동이다.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죄·업장 뒤따르지 않으면

자유라 부른다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佛(一拜)

彌陀身色如金山 相好光明照十方

唯有念佛蒙光攝 富知本願最爲强

四句三聚戒圓滿 六意五修爲成辨

遠離二邊滅諸罪 等?一味遊方外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업장(業障)을, 자기가 한 짓을 참제(懺除)한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며 육시행원 예참문의 예참(禮懺)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짓에 얽매이고 장애(障碍)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가 많다. 업장을 참회하고 제거(除去)해 버리는 사람은 대장부(大丈夫)요, 용단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의 몸은 금빛이다(彌陀身色如金山)’ 하였는데 과연 아미타불은 왜 금빛으로 칠해져 있는 것일까? 아미타불 사십팔원(四十八願) 중에 동진금색원(同眞金色願)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들이 다 같이 참된 진금빛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얼굴이 부처님의 상호(相好)처럼 눈·코·귀·입 매무새가 모두 찬란한 금빛이라고 한다면 나쁜 짓이란 도저히 할래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진금(眞金)빛 얼굴은 시방세계에 광명을 놓는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상호, 이러한 광명의 자리의 끝내 앉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 그것은 오로지 염불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염불하는 사람, 즉 감사하고 보은하는 사람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감사할 줄 알고 보은하는 사람은, 그는 이미 평등하고 불변한 진금빛의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다.

이 진금색 이야기는 원효대사의 <보살지범종요(菩薩持範宗要)>에 있는 것을 인용하였다. 그리하여 ‘오로지 염불하는 이만, 아미타불의 비원(悲願)을 아는 이만 진금색 자리에 앉는다’(唯有念佛蒙光攝富知本願最爲强).

또 ‘사구(四句)와 삼취(三聚)가 무르익어 육의(六意)와 오수(五修)의 분별이 서고’(四句三聚戒圓滿 六意五修爲成辨.

사구는, 칠불통계(七佛通戒)의 사구라고 일컬어 옛날 칠불 때부터 오늘날까지 부처님 사이에 전해 내려 오는 사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다.

諸惡莫作 악한 일이란 아예 하지 말고

衆善奉行 착한 일을 모두 행하며

自淨其意 스스로 그 정신을 맑힌다.

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악한 일이란 어떤 것이라도 하지 말고 선행은 모두 다 해라, 그러니까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말씀이다. 삼취(三聚)는 유가(瑜伽)와 십지경(十地經)에 있는 말인데 삼정계(三淨戒)를 이름이다. 이는 섭율의계(攝律儀戒), 계율은 모두 맞추어 지켜야 한다. 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선행을 다 해야 한다. 섭중생계(攝衆生戒),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 세가지는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의 요약된 구경의 목적인데, 그러니까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계(戒)실라(Silla)는 인간으로서 바랄 수 있는 원만한 최상의 윤리다.

앞의 계율이 소극적인 금지 규정인데 비하여 육바라밀은 능동적인 행동의 규범이다.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육바라밀을 삼지오수(三祗五脩)한다고 말한다. 삼지(三祗)는 삼아승지(三阿僧祗), 아승지가 세번 거듭된 것, 시간적으로 무량·무수겁(無量·無數劫)을 세 번 지내야 된다. 오수(五脩)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의 다섯 가지 수행의 계단이다.

‘두 극단을 멀리 여의어 죄업을 모두 없앤다’(遠離二邊滅諸罪).

우리는 참회하여 업장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더 나아가 이변(二邊)을 멀리 떠나 버려야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원효대사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모든 계율을 지키는 목적도 이 이변이라는 두 극단을 여의어 중도(中道)를 얻는데에 있다고 한다. 이변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얻은 다음에는 자재(自在)로운 해탈(解脫)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해탈이란 자유로운 행동이다. 속박과 번뇌에 벗어나 죄·업장(業障)이 뒤따르지 않는, 성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나는 비구(比丘)의 이백 오십계를 닦는다, 저 사람은 그것을 못하니 비구가 아니다, 불제자(佛弟子)가 아니다, 이런 말하고 있을 때 그는 계율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나는 고기를 안 먹는다, 사회사업을 한다, 그런 선행한 것을 자기가 선전하거나, 이것으로서 남에게 도전한다거나 하는 것은 필경 그 사람은 자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자유자재하고 중도의 실상을 터득한 사람만이 죄악을 벗어난다.

원효대사는 말씀하시기를 계율은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라고 하셨다. 계율이 법률의 경우처럼 애초의 목적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계율의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유와 자재와 해탈을 얻게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이러한 목적을 이탈하여 계율에만 얽매여 있거나 또는 형식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면 이런 것은 수행자로서 그릇된 생각이므로 버려야 한다.

결국 문제는 등찬일미유방외(等?一味遊方外) 즉, 일미를 먹고 자재(自在)로와진다는데 있다. 유방외(遊方外)는 자유와 해방과 자재로운 지경을 획득한다는 것, 우리가 속박을 받으라고 부처님이 계율을 마련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이변처중(二邊處中) 하고 각행(覺行)이 궁만한 다음에 우리들로 하여금 역시 부처다운 자유와 자재를 얻게 하려던 것이다. 무애자재라고 하면 이것은 벌써 모든 업장(業障)이 참제(懺除)된 때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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