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 명랑 스님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랑 스님은 호국불교의 선구자로 꼽힌다. 2014연등회 연등축제 당시 이런 스님의 사상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명랑법사와 사천왕사 연등.
당나라 4년 유학 후 귀국
밀교 진언으로 당군 물리쳐
사천왕사 ‘풀입 설화’ 남아

금광사 건립에서 도력 보여
밀교종파 신인종 개창·보급
광학·대연 등 고려까지 법맥

명랑 스님은 신라 문무왕대에 활약한 밀교승려이다. 우리나라에 밀교가 들어와 자리잡는 데 명랑 스님의 공헌이 컸다. 아울러 그는 밀교 특유의 문두루비법을 써서 국난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도 하였다. 신인종을 창시하여 독자적인 밀교 계보를 만들었는데,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명랑 스님의 제자들이 그 전통을 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금광사(金光寺) 본기’라고 출처를 대며 명랑 스님의 출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명랑 스님은 신라 출신으로 자는 국육(國育)이며,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이고, 자장 율사의 외조카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푸른빛 나는 구슬을 입에 삼키는 꿈을 꾸고서 태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선덕여왕 원년인 632년에 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4년 후 돌아왔는데 이때는 용왕과의 인연을 담은 설화가 전해진다.

명랑 스님이 신라로 귀국할 때인 635년의 일이다. 명랑 스님은 귀국길에 서해용왕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갔다.

“대사께서 지금 당나라에서 불법을 받아 신라로 가시느라 황망하시겠지만 부디 저희를 위해 비법을 전수해 주십시오.”

“용왕의 뜻이 그러하니 내 세존의 말씀을 드려드리리다.”

이에 비법을 전하니 용왕이 황금 천량을 시주하였다고 한다. 명랑 스님은 보시 받은 물품을 가지고 도력으로써 몰래 땅 밑으로 와서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어 자기 집을 희사해서 절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는데 광채가 빼어나게 빛났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금광사는 경주시 탑정동의 식혜곡 북쪽 기슭이라는 주장과, 나정과 남간사 터 사이라는 주장이 있다.

사천왕사지에 남은 당간지주와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 모습. 도솔천 아래 자리하겠다는 선덕여왕의 말이 남아있듯 사천왕사가 자리한 남산은 신라사람들에게 도솔천으로 여겨졌다.
명랑 스님이 새로 금강사를 세우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신라의 고승들은 모두들 모였지만 오직 혜공 스님 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스님들이 혜공 스님을 나무랐다.

대중들을 달랜 명랑 스님이 향을 피우더니 정성껏 기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혜공 스님이 도착했다. 이 때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혜공 스님의 옷은 젖지 않았으며 신발에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모두가 명랑 스님이 도력으로써 그렇게 한 것라고 여겼다.

명랑 스님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때는 나당전쟁 때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에 설치한 웅진도둑부를 신라가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668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그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게 하고 장차 신라를 쳐 멸망시키려고 했다.

명랑스님의 사천왕사지 건립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를 비롯한 곳곳에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4년에 개최한 사천왕사지특별전에서 선보인 〈삼국사기〉 ‘직관지’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했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명랑 법사를 청해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이제 와서 우리를 해하려 하니 무슨 이유이냐?”고 질타했다. 인문은 아니라고 말 하였으나, 결국 감옥에 갇혔다.
당 고종은 곧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 때 의상 대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 대사가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폐하, 지금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설방을 선두로 하여 군사 50만을 보냈다 하옵니다.”

선덕왕은 매우 놀라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때 각간 김천존이 왕에게 대책을 올렸다.
“폐하, 근자에 명랑 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그렇다면 어서 법사를 청하여 국난에 대비토록 하시오.”

이에 명랑 스님이 조정의 부름을 받고 급히 입궐하게 되었다.

“소승, 비록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오나, 감히 저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낭산의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 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가할까 합니다. 이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자 하나이다.”

명랑 스님은 낭산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코앞에 닥치자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모자랐다. 명랑 스님은 이에 관리 채백(彩帛)으로 하여금 절을 임시로 만들게 했다. 바로 낭산(狼山)의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였다. 스님은 채백으로 풀로써 오방신상을 만들어 가람 형상을 구축했다.

그 때 마침 당나라 군사들이 수군으로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명랑 스님은 임시로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12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문두루비법(불교의 교파 중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외우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함)을 사용하였다. 유가종은 밀교의 하나이며 문두루도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이다.

그러자 당과 신라 군사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센 바람과 커다란 파도가 크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고 한다. 3년 뒤인 671년에도, 당나라에서 다시 조헌(趙憲)이 장수가 되어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이 비법을 베풀었다. 효과는 전과 마찬가지였다.

문무왕 19년인 679년 명랑 스님은 5년 만에 절을 다시 완성하고 사천왕사라고 불렀다. 이 사천왕사는 아직까지도 단석이 남아있다. 이 절 바로 위에 선덕여왕의 묘가 있다. 자신이 도솔천아래 묻힐 것이라 예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묘이다.

스님은 이어 밀교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을 개창했는데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朗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이어졌다.

스님의 법맥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고려 태조 당시 해적이 침범하자 안혜와 낭융 스님의 후예인 광학·대연 스님이 진언으로 해적을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인도의 고승 용수 보살에 이르기 까지를 9조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가 이들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종파의 근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명랑이 개창하여 안함, 혜통, 융천사 등의 대표적인 승려가 속한 신인종은 광학과 대연 대인 고려시대까지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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