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길을 가다- ⑨ 만해와 서대문 형무소 上

독립선언 발표 직후 왜경에 체포
서대문형무소 수감… 2년여 獄苦
‘변호사·사식·보석 금지’ 옥중 투쟁
“할 일 했다” 日 재판장서도 당당

옥중서 한시 13수, 시조 1수 써내
애국·일제 저항·성찰 등 내용 담아
수감 생활, 지속 항일투쟁 원동력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라도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왜경에 체포된 뒤 경찰과 검사, 만해 스님 사이에서 이뤄진 심문의 마지막 내용이다. “할일을 했다”는 당당한 기개가 넘치고 있다.

일제로부터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옥중에서도 당당히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 서대문형무소 본청사 전경. 지금은 교육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1907년 설계돼 이듬해 완공된 서대문형무소는 수많은 항일 인사들이 고초를 겪거나 생을 마감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민주화 인사들을 수감했던 곳이다.
이제 항일 상징된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여러모로 가슴 아픈 민족사의 굴곡을 가지고 있다.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1998년 사적(史蹟)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이제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아픈 민족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만해 스님은 3년여의 이곳 수감생활을 하면서 몇 차례 고문을 받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수감된 민족대표들의 생활상은 대략 이럴 것으로 추정된다. 아침 6시 기상해 오후 9시 취침했고, 식사는 콩과 보리로 뭉친 주먹밥 한 덩이와 소금국이 전부였다.

시설도 열약했다. 시멘트 바닥에서 더운 여름과 차디찬 겨울을 보냈다. 이 같은 열약한 시설과 악형으로 몇몇 대표는 생을 등지기도 했다. 실제 박준승은 고문으로 옥사했으며, 손병희는 옥중에서 생긴 병환으로 출감 후 숨졌다.

고초를 겪을수록 당당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수감된 민족대표들을 독려하고 투쟁의 의지를 바로 세웠던 것은 바로 만해 스님이다. 스님의 3년 간 옥고는 故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평가대로 옥중 생활이라기보다는 투쟁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고, 옥중 활동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실제 만해 스님은 민족 대표들에게 옥중 투쟁의 3가지 원칙을 제안·주장했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는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는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다.

옥중 투쟁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 이유는 내가 내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기 때문에 변론을 할 이유가 없고, 호의호식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여서 사식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만해 스님은 주장했다. 또한 일제 법률에 따라 보석 신청을 하는 것도 맞지 않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일인 검사의 심문과 이어진 재판에서도 만해 스님은 조선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법정에 설 때면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다”, “우리들의 행동은 너희들의 치안 유지법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죄가 성립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독립의 정당성을 갈파하곤 했다.

일제가 민족대표 일부를 내란죄로 몰아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때에도 만해 스님은 당당했다. 소식을 접한 일부 인사는 감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 만해 한용운 스님의 수감 카드. 스님은 3년 동안의 수감 기간동안 옥중 투쟁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당당하게 일제와 맞섰다.
그러자 만해 스님은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고 호통을 쳤다.

이 같은 일화는 천도교 측 민족대표 이종일의 〈묵암 비망록〉에도 소개된 이야기로 이종일은 당시 스님의 호통을 “통쾌무비한 일”이라며 “역시 한용운은 과격하고 선사다운 풍모가 잘 나타나는 젊은이”라고 회고했다.

여타의 민족 대표들과는 전혀 다른 당당함과 기개를 보여줬다는 것인 상좌 이춘성 스님의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절에서 무엇을 만들어서 가지고 면회가면 ‘이것은 뭐하러 가져왔느냐. 내가 아홉 귀신 먹다 남은 것을 먹을 줄 알았느냐’고 내던지기 일쑤였다. 감옥의 간수들도 ‘저 중이 제일 간 큰 놈이지. 저 놈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어’라고 저희들끼리 중얼거렸다.”

옥중 시조, ‘철장 문학’의 진수
만해 스님의 높은 기개는 스님의 지은 한시와 시조에서도 나타난다. 스님은 수감 기간동안 13편의 한시와 시조 1수를 지었다. 소위 ‘철장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옥중에서 수많은 시대의 명작들이 만들어진다. 사마천은 옥에 갇혀 궁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라는 역사를 남겼고,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서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창작했다. 단채 신채호 선생은 만주 뤼순 감옥에서 〈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다 옥사했다.

평소 깨달을 추구한 수행자이면서 유교와 서양철학·문학에도 이문이 밝았던 스님이 옥중 생활동안 창작활동을 이어갔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만해 스님은 한시와 시조를 통해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노래했다.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곧잘 한다는데
山鸚鵡能言語
그 새보다 훨씬 못한 이 몸이 부끄럽다.
愧我不及彼鳥多
웅변은 은이요 침묵이 금이라면
雄辯銀與沈默金
그 금으로 자유의 꽃 모두 사리라
此金買盡自由花

‘옥중에서 읊다(獄中吟)’이라는 제하의 한시는 옆방 동료와 이야기하다 간수에게 들켜 2분간 손이 묶이게 된 이후 읊은 즉흥시다.

이 한시에 대해 김광식 동국대 특임 교수는 “여기서 스님은 말 잘하는 앵무새, 웅변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회유 간섭을 거부하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다”면서 “이는 저항의식을 보여준 것으로 저항의식은 독립을 갈망하는 의지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이 같은 담대한 정신과 행적에서 만해 스님의 옥중 독립운동은 살아날 수 있었다”면서 “서대문형무소의 항일 투쟁은 출옥 이후 지속적인 항일 운동의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했다.

김상현 교수는 “자유를 갈망했던 만해 스님이 이 시에서는 자유의 꽃을 사기 위해서는 침묵이라는 금을 모두 다 팔아버리겠다고 항변했다. 그의 옥중 시에는 자유와 독립의 두 개념이 일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만해 한용운 스님의 옥중 한시 ‘獄中吟’. 독립의 열망이 느껴진다. 생전에 만해 스님을 흠모한 석주 스님의 글씨.
국문학자인 김종균은 자신의 논문 〈한용운의 한시와 시조〉에서 옥중 시의 핵심은 ‘자유 의지’에 있다고 봤다.

그는 논문에서 “만해 스님의 옥중 시(시조)에서 가장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할 음성은 자유다. 이 자유의 문제는 만해 스님의 ‘님’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면서 “님의 존재는 다위가 되어주고 한없는 그리움은 신앙을 낳게 된다”고 해석했다.

이어 “종교인으로서 정진과 학자로서의 논리,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정서가 모두 하나로 응결돼 옥중 시에 나타난다”면서 “만해 스님의 옥중 시는 독립이란 개념이 철두철미하게 은유돼 표현된 시”라고 설명했다.

1921년 가을, 출소한 만해 스님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 같이 답했다. “옥중의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었고, 지옥 속에 극락을 구하였다”고. 고통의 칼날을 기꺼이 수용하고 지옥을 향해 걸어갔다. 철장마저 수행처로 알던 만해 스님의 담대함과 당당한 기개도 우리 후학들이 본 받을 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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