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

2000년 11월 준공·설계 김개천 교수
새불자 유치 위해 현대건축 시도
140개 창호 열고 닫으면
안팎 경계 사라져 공과 색 공존해
‘공(空)’사상 문자 아닌 건축으로 표현
혜광 스님, ‘전통가람’살린 불사 서원


2000년 11월에 세워진 전북 담양의 정토사 무량수전은 목조 대신 시멘트로 지은 현대적 건물로, 외관벽이 140개의 창호로 되어 있다. 140개의 창호를 열고 닫을 때 법당의 형태가전혀 다른 형태를 함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공’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후략〉” 고인이 된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는 자신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목조건축의 명품으로 남은 부석사무량수전(국보 18호)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위와 같이 적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지어진 지 700년이 흐른 지금, 전남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에는 명품으로 기억될 또 하나의 무량수전이 있다. 정토사 무량수전이다.

단청과 기와를 버리다
대지면적 450평, 연건평 173평,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정토사 무량수전. 주지 혜광 스님은 건축가 김개천 교수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스님과 김 교수는 현대적 건물로 법당을 짓기로 했다. 드문 일이었다. 혜광 스님은 새로운 불자를 들이고 싶었다. 젊은 불자들과 불교를 모르는 새로운 불자들을 정토사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그것이 진정한 포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을 건축불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좀 더 현대인들에게 맞는, 시대에 맞는 법당을 짓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한 만큼 현대인의 문화적 감성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시각적인 요소들이 행동의 중요한 동기가 되는 시대인 만큼 법당 건축도 ‘디자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님은 오랜 동안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형식들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우선 대표적인 전통 형식인 단청과 기와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오기로 했다. 단청과 기와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청과 기와만이 절대적인 형식이라는 생각을 놓은 것이다. 단청과 기와가 없는 법당을 짓기로 했다. ‘시도’였다. 단청과 기와가 필요 없다보니 건물이 굳이 목조일 필요가 없었다. 시멘트로 짓기로 했다.

140개 창호 외벽으로 둘러싸인 법당 내부
140개의 창호가 들려주는 법문
2000년 11월에 세워진 정토사 무량수전에서는 배흘림기둥을 볼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 처럼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도 볼 수 없으며, 때문에 그 곡선과 기둥의 조화는 더욱이 볼 수 없다.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최순우가 말했던 문창살에 드러난 비례의 상쾌함도 없다.
하지만 정토사 무량수전에는 140개의 창호가 배흘림기둥을 대신하고 있다. 법당의 전체, 벽면이 창호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 대신 최소화된 직선의 베젤이 건물의 외관을 마감하고 있다. 그 140개의 창호와 최소한의 베젤이 배흘림기둥과 추녀의 곡선을 대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단순히 디자인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데 있다.
법당의 한 쪽에는 산이 서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너른 연못이 펼쳐져 있다. 법당의 창호를 모두 열어젖히면 법당이 사라지고 산과 연못이 들어온다. 법당 전체가 창호로 지어졌으니 그 창호를 모두 열어젖히면 법당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실존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불교적으로 말을 바꾸면 공과 색을 넘나드는 것이다.
김 교수는 “외부 공간이 내부 공간으로 들어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지고 함께 조응하는 것이다. 그 순간 법당 안의 대중은 산과 물, 자연, 우주의 중심에 앉아 있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정토사의 무량수전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건축으로 설하고 있다. 주지 혜광 스님은 공사상을 대표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반야심경의 내용을 법당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을 의뢰 받은 김 교수는 140개의 창호를 통해 스님의 의도를 실현했다. 140개의 창호를 열면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지고, ‘절대’만이 존재한다. 색이 공임을 문자가 아닌 건축으로 말하고 있다. 공이란 색을 여의고 존재할 수 없다. 다시 140개의 창호를 닫으면 법당은 법당으로 돌아온다. 공은 색인 것이다.
2층에는 창호를 바라보게 되어 있는 선방을 만들었다. 이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선방에서 가부좌를 튼다면 그야말로 문자를 벗어던진 설법을 들을 수 있다.
“공사상을 법당의 창호를 열고 닫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안과 밖이 따로 없음을 현대인들에게 쉽게 일깨워 주고 싶었어요. 전통을 버렸을 땐, 버린 의미와 새로움의 가치가 있어야 하니까요.” 정토사 무량수전은 2001년 한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건축상(김개천)을 수상했다.

‘현대’ 표방했지만 ‘전통’도 살아있어
“현대건축을 표방했지만 종교적으로 불교 고유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정토사 무량수전을 밖에서 보고 있으면 ‘법당’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봐왔던, ‘전통’적인 법당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전통을 버린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이어야 할 전통을 잇고 있다. 전통대로 불단의 뒤 공간을 살려 경행을 가능하게 했으며, 창호의 문살은 전통의 격자문양을 하고 있다. 불단엔 아미타여래를 모셨으며, 천장엔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단청을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형적인 모습들이 아니라 법당에 들면 ‘법당’이라고 하는 본연의 생각과 마음이 자연스레 찾아든다는 것일 것이다.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곳이라는 생각, 그 생각이 든다면 어떤 외형을 가졌든 그것은 ‘전통’과 ‘비전통’을 떠난 것이고 절대적인 ‘법당’일 것이다. 정토사 무량수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당’인 것이다.

불교적 생각의 실천
“우리 전통의 가람배치는 너무나 멋지죠. 일주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개의 문을 거치고 금당에 이를 때까지, 동선 자체가 수행인 것이죠. 우리의 독창적인 가람배치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전체적인 불사를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건축이라는 무언의 언어를 통해 대중이 감흥 받고 말없는 말 속에서 스스로 얻고자 하는 답을 각자가 찾아갈 수 있는 도량을 만들고 싶어요.”
주지 혜광 스님은 절에 드는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가람의 불사를 원력으로 세우고 있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제한된 공간적 한계로 인해 예전에 있어 왔던 산중의 너른 가람을 꿈꾸기 어렵다. 혜광 스님은 제한된 공간적 한계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면적인 사고에 얽매인다면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입체적인 생각으로 접근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적은 공간을 넒은 공간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혜광 스님은 “저기 멀리 보이는 산을 불러들이고, 지나가는 개울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거죠. 추상적이고 막연한 임기응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정토사 무량수전에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제한된 공간을 제약으로 생각해야 할 일은 없을 겁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불교적인 생각의 확인이며 실천이라고 하겠다.
제2의 최순우가 정토사를 찾는다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지어지고 700년이 지난 어느 날, 후손 최순우는 부석사에 갔다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위와 같이 적었다. 무량수전의 명품으로 남은 부석사 무량수전이 지어진 지 700년, 그리고 또 하나의 명품 무량수전을 본다. 다시 세월이 흘러 제2의 ‘최순우’가 완성된 정토사를 찾아간다면 그는 ‘배흘림기둥’ 대신 무량수전 문창살에 기대서서 정토사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량수전을 찬탄할 것이다. 

법당에는 아미타여래상을 모셨다.
불단 뒤의 관음보살상 탱화를 모신 공간으로 경행할 수 있다.
2층 선방으로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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