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원례

 ②-1 칭찬여래

유정·무정 모두 부처이니

티끌 하나의 부처도

각양의 덕이 충만

 일체의 겁이 다하도록

부처님 공덕 깊고 무량

이를 칭양 찬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 보다도 먼저 이 칭양하고 찬탄한다는 덕성부터 길러야 되겠다. 이것은 퍽이나 중요한 일이다. 칭찬여래가는 어일진중진수불 각처보살중회중(於一塵中塵數佛 各處菩薩衆會中)하는 첫귀로 시작한다. ‘하나의 티끌 가운데에 또 티끌 수만큼의 덕 있는 부처님이 계시다.’ 참으로 묘한 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시적 과장이나 메타포어가 아니라 벌써 믿음으로 화한 뚜렷한 사실이라 보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원자핵(原子核)을 얘기하고 있는데, 원자핵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립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번 발동하는 날이면 전세계에 우주 공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준다. 티끌 가운데는 이러한 원자핵이 수십만개가 들어 있을 터인즉 티끌 하나의 우주적인 신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인가. 참으로 우리는 티끌 하나의 위력에 눈 뜨고 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경탄과 각성을 가져야 할 줄 안다.

또 티끌 속에 계신 부처님은 ‘각처에 보살이랑 제자랑 권속들을 거느리었다.’ 부처님의 경우에는 보살이며 제자 등을 거느리시었겠지만 원자핵에는 또 그것대로 전자, 양자 중성자 하는 따위, 그 밖에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권속을 데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무진법계진역연 심신제불개충만(無盡法界塵亦然 深信諸佛皆充滿)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정이나 무정이나 다 부처고 그것이 다 부처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우리는 이를 칭양 찬탄해야 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칭양 찬탄하기 위해서는 그 부처의 덕을 낱낱이 살펴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티끌 하나의 부처도 이와같이 각양의 덕이 모두 충만하였다.’ 이렇게 깊은 믿음으로 칭찬하여 그것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칭찬하는데는 그 부처들의 각양 각색의 낱낱에 대하여 소리를 내어 칭양하고 찬탄하는 표시를 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아무리 고맙게 느끼더라도 말로 드러내 표시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칭양 찬탄에도 소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또 음성을 내어 칭찬할 바에는 그것이 아주 듣기 좋은 말을 써서 해야 된다. 다정스런 말, 미묘한 언사, 아어(雅語), 정답고 고운 말, 애어(愛語), 과연 실감이 있고 알맞은 말을 애써 찾아 내어서 해야 된다.

각이일체음성해 보출무진묘언사(各以一切音聲海 普出無盡妙言辭) ‘각양의 부처에 대하여 낱낱이 소리를 내어 미묘한 말로써 칭찬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소리를 내되 시간적으로는 ‘일체의 겁이 다하도록’ 언제, 어느 때, 언제까지라도 영원토록 ‘그 미묘한 말씨를 가지고, 부처님의 공덕이 깊고 무량한 바다를 칭양 찬탄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그러나 칭찬하는 소리라고는 거의 들을 수 없이 되었다. 여기 아무개 장한 사람이 있다. 흥 그거 무엇이 장해, 아무개는 무슨 큰 일을 했다. 그것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을 가지고, 이런 투다. 사회의 단위는 가정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을 한번 가만히 살펴 보자. 부부간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아낙네가 뇌까린다. 나는 팔짜가 기박해서, 이놈의 집에 와서, 요놈의 자식이, 한다. 자기 아이를 나무랄 때 요놈의 자식 하는 것은 남편을 욕하는 소리가 된다. 자기 남편을 칭양하기는 커녕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식은 부모를 있는둥 만둥한 존재로 봐 버려, 서로 존중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요즘 신문의 사회면을 어지럽히는 패륜·박정, 음산한 기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인간 사회가 아니라 생지옥이라는 관념을 갖게 한다. 또 우리는 한 민족이면서 남북으로 분렬되었다. 북한의 괴뢰집단은 남한에 있는 우리를 괴뢰도당이라고 욕설을 퍼부어 업신여기고 우리는 그들을 적대시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들이야 같은 민족의 한 핏줄이 아닌가. 욕하고 헐뜯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다. 민족은 민족끼리 서로 분열하여 업신여기려 들고 형제는 형제끼리 서로 헐뜯고, 가정은 전 권속이 서로 백안시하여 아예 존경할 생각을 안 갖는다면 그 집안이란 어떤 것이냐? 그것은 콩가루 집안이다.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우리 이 민족에게 상호 반목과 분열만이 있을 뿐 자비와 사랑과 화합대중(和合大衆)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여기서 유태민족의 역사를 돌이켜 본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당시의 그들에게는 민족적인 분열과 엄청난 패륜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들 족속의 덕 있는 사람과 선지자(先知者)들을 업신 여기고 구박하고, 잡아 죽이었다. 그런 결과 유태민족은 늘상 남의 나라 지배만 받고 끝내 자주독립을 하지 못하였다. 이들을 건지려고 많은 선지자들이 나서 민족정신을 불어 넣었지만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구원을 주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하였지만, 유태민족은 그것이 최후의 기회였음에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를 아주 형편없이 잡아 죽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다가 자기 민족의 적인 로마군에게 넘겨 그 로마군의 형틀인 십자가에 매어 달게 하였다.

원공제중생왕생안락국(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원컨대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이와 같은 칭찬여래의 행동을 함으로서 안태(安泰)하고 즐거운 지경에 도달하여 참말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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