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원례 (行願禮)

② 칭찬여래(稱讚如來)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

於一塵中塵數佛 各處菩薩衆會中

無盡法界塵亦然 深信諸佛皆充滿

各以一切音聲海 普出無盡妙言辭

盡於未來一切劫 讚佛甚深功德海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앞에서 언급을 보류하였는데 서방아미타불이라는 데서 서방(西方)이란 어떤 의의가 있느냐 하는 것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방위로 말한다면 동서남북의 사방이 있고 상중하방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서방이라고 하느냐, 그 까닭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방위를 서방으로 정해 놓은 이것을 불교학 교리에서는 지방입상(指方立相)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다 돌이켜야 되는 것일까? 집중할 방위가 결정되지 않으면 동서남북, 상중하,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정신이나 행동통일을 할 것인지, 초입자(初入者)에게 뿐만 아니라 숙달된 사람에게도 당황한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서방이라는 방위를 못박아 놓았다.

그럼 왜 기어코 서방이라야 하는가? 서방은 고요한 곳이다. 만뢰(萬?)가 구적(俱寂)하여 우리의 마음을 고즈너기 가라앉혀 준다. 해는 동에서 떠서 서에서 진다. 동방은 능동적이고 모든 것이 새로 비롯하여 움직이는 아침을 상징한다면 서방은 이와는 반대로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모든 번뇌와 투쟁과 생활이 움직임을 거두어들여 조용한 휴식으로 들어가는 밤을 가리킨다. 황혼과 밤은 우리가 이마에 땀을 씻으며 조용히 가라앉는 마음으로 사색과 명상에 잠기는 때다.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은 ‘아세아의 마지막 밤 풍경’이라는 시를 썼는데 그것은 아주 훌륭한 시며 우리 동양의 모든 사상의 근원이 밤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노래하였다. 밤은 고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니르바나를 준다.

그리고 칭찬여래(稱讚如來)하는 여래에 대하여 다시 말한 것은「이와 같이 오셨다」는 것, 세존이니 불타니 하는 성스러운 어른으로서야 오고 가는 것이 없을 터인데 여래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법하다는 그것이다. 앞에서 선서라고 하였을 경우로 본다면 여거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며, 또 우리 중생을 위하여 이와 같이 머물러 계시다고 한다면 여주라고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쓰는 예는 없다. 우리를 편으로 볼 때 부처님께서 우리 죄 많고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건지려고 ‘이렇게 오셨구나’ 참말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하는 우리들의 신앙 본위에서 나온 사상이라고 본다. 여래라고 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한결 정답다.

그러면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려고 이와 같이 오신 여래를 우리는 어떻게 칭찬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먼저 칭양하고 찬탄하는 그 일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칭양과 찬탄을 하는데는 무엇보다도 대상자의 덕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또 그 덕에서 나오는 말을 잘 가려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한다.

이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사절 중의 전반은 ‘눈’으로 보는 진수불(塵數佛), 티끌속에 충만한 제불(諸佛)을 노래하였으며 후반은 ‘귀’로 듣는 음성해(音聲海)와 묘언사(妙言辭)를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가 중도를 얻어 유(有)와 무(無)의 두 극단에서 벗어나 운명론에 빠지지도 않고 절망에 허덕이지도 않아, 끝내 니르바나에 도달하였을 때는 즉 붓다를 깨쳤을 경우에는 또 눈과 귀가 열리어 잘 보고 모든 것을 환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눈이 바로 꿰뚫고 보고 귀문이 열리어 스스로 깨친 행동을 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 없어 각행이 궁만해진다. ‘눈이 뜨이어 귀문이 열리어’하는 싯귀(詩句)라도 읊을 만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상자의 덕을 알아보는 눈과 또 알아듣는 귀를 가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남을 헐뜯고 비평하기는 쉽다. 더욱이나 중상하고 모략한다면 그것은 대상자의 덕을 드러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덕을 보는 안목도 없고 귀도 막혔다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은 총명이 막혔다고 할 수 밖에 없으니 불행이 당도해 있는 것이며 아주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다.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 알아 보고 칭찬할 줄 아는 사회와 민족은 그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남의 덕을 알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의 특성을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부족한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들 무심결에 부족한 생각을 가진다.

스스로는 별 신통한 공부도 노력도 하지 않고 공연히 남을 업신여기는 수가 항상 있다.

이러다가도 강한 사람의 압력에는 쉽게 굴복하고 빌붙는다. 어쩌다 부강한 외국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그만 사대주의에 꽉 차서 제 정신 못차리고 격에 맞지도 않는 외국풍을 피우려고 드는 것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와 당쟁(黨爭)은 우리 국사(國史)의 치욕적인 결함이지만 이것이 고려말로부터 조선의 전 역사를 통해 두드러진 원인은 우리가 적을 만들어 내어 서로 싸울 줄만 알았지 상대방이(비록 적일지라도) 얼마나 장점이 있으며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내어 포섭한다는 덕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쟁이란 것은 아주 비열하게 중상과 모략으로만 일관하여 서로 잔학한 살육을 일삼았으며 빈번히 국가, 사직조차도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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