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a in Comic & Ani - ⑨ 지미 헤이워드의 ‘호튼’

‘티끌 안 세상’을 구하기 위한
코끼리의 고군분투 여정 그려
‘하나가 곧 일체’ 화엄사상 맞닿아

▲ 지미 헤이워드 감독의 ‘호튼(2008)’ 포스터
“그렇게 작은 것에는 사람이 살 수 없어.”
“아니야. 그들이 작은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우리가 너무 큰 것일 수 도 있어.”

이게 웬 철학적 질문인가. 코끼리와 캥거루가 티끌 속에 세상을 두고 격론을 벌인다. 코끼리는 티끌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하고, 캥거루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마치 철학 수업을 상기시키는 이 질문은 2008년 개봉한 미국 애니메이션 ‘호튼’(Horton Hears A Who, 지미 헤이워드 감독)의 한 장면이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는 4000여 극장에서 개봉해 4500만불의 수익을 올렸지만, 한국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아는 사람 자체가 적다.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을 주목해봐야 하는 이유는 작품의 세계관이 불교 사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명제로 시작하는 ‘호튼’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여린 마음을 가진 코끼리 호튼은 머리를 덮을 정도로 큰 귀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런 호튼은 어느 날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정글을 떠다니는 먼지보다 티끌 안에 사는 ‘누군가 마을(Whoville)’ 시장의 목소리였던 것. 서로를 볼 수 없지만, 대화로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한 호튼과 시장은 대화를 시작한다. 한 낮이 컴컴해지고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을 목격하고 한 시장은 ‘누군가 마을’이 위기에 처했음을 깨닫고, 호튼에게 마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마음 착한 호튼은 ‘누군가 마을’의 존재를 믿지 않는 정글 동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 설움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며 티끌을 ‘눌산’으로 옮기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물론 훼방꾼들도 등장한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호튼을 탄압하는 캥거루와 해결사로 등장하는 독수리가 이를 방해한다. 반면 시장 역시 닥친 위험을 믿지 않는 천하태평 주민들에게 “하늘 너머에 우리를 도와주는 코끼리가 있다”고 말하다가 왕따를 당한다.

훼방꾼들의 선동에 호튼이 티끌을 빼앗기게 될 순간, 자신들이 위험에 빠져 있음을 안 티끌 세상의 주민들의 목소리가 바깥 세상의 동물들에게 들리게 된다. 모든 진실 안 사람들은 모두 함께 티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

▲ ‘호튼’의 한 장면. 호튼이 코로 감싸고 있는 민들레 씨앗 안에는 ‘누군가 마을’이 있다. 티끌 속에서 세상과 밖의 세상의 소통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본래 애니메이션 ‘호튼’은 닥터 수스(테오도르 수스 가이젤)의 동화 〈호튼, 누군가의 소리를 듣다(1954)〉가 원작이다. 철저하게 동화의 스토리 라인과 담겨 있는 메시지를 잘 살리면서도 슬랩스틱 코미디의 요소들을 가미해 오락성까지 더했다. 여기에 넘칠 듯한 컬러와 3D CG기술로 재탄생한 유연한 캐릭터들의 풍부한 동작들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작품이 가지는 백미(白眉)는 ‘티끌 속의 세상’과 ‘티끌 밖의 세상’의 소통이다. 큰 귀를 가진 코끼리 호튼은 바람 결에 날아온 티끌 속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티끌 속 세상에는 이미 문명사회가 이뤄져 있었다.

단순한 설정만을 놓고 봐도 이는 불교의 화엄사상의 세계관이다. 당장〈화엄경(華嚴經)〉의 뜻을 압축해 풀어낸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는 ‘호튼’이 보여주는 세상을 잘 설명해준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則一切多則一 /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니라/ 한 티끌 그 가운데 온 우주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온 우주가 다 들었네)’

이 구절은 “일체가 가지는 실상에는 본질적으로 시간 및 공간의 한정적인 개념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작진은 〈화엄경〉을 읽고 공부했기 보다는 ‘프렉탈’, ‘카오스’ 이론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개념에서 이 같은 세계관을 차용했을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작품의 오프닝이다. 3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하는 오프닝은 이슬을 맞은 열매가 민들레 씨앗을 뿌리고 티끌을 날려 보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는 ‘나비의 날개 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현대물리학의 ‘나비효과’ 개념과 유사하다.

실제 현대물리학에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크기·시간·속도·에너지와 같은 구체적인 물리량들이 혼자 떼어서는 정의조차 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부분적인 성질이 전체적인 성질을 지배한다는 프렉탈 이론도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화엄사상과 맞닿는다.

우리는 수많은 ‘경계 짓기’를 통해 서로를 타자화 하면서 살아간다. 작품처럼 티끌 안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와 맞닿은 존재들은 인정하고 이해하고 소중해야 하는 것이다. ‘호튼’의 마지막은 모두가 함께 산에 오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모습은 따뜻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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