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 달과 같이 밝게 사십시오

▲ 그림 최주현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하면 남의 마음도
따뜻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데 어찌 남의 마음이
따뜻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내 마음이 악하게 되면
그건 무간지옥이라
그랬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반면에
정심으로써 지혜롭게
따뜻한 마음으로
둘이 아닌도리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대한다면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스스로 상대도 밝아져서
나와 더불어
밝게 불을 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아래에 앉았는데 제가 법상 위에 올라앉은 것은, 내가 높고 여러분이 낮아서 이렇게 앉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의 모습을 쳐다보는 반면에 나도 여러분을 다 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지 내가 높아서 이 법상에 올라앉은 게 아닙니다. 인간과 더불어 같이, 부처와 중생은 모두가 평등한 겁니다. 높고 낮음이 없어서 평등한데도 불구하고 모르시는 분들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어휴, 법상에 높이 앉았네!’ 할 수도 있겠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다 듣게 하기 위해서 제가 내려앉아도 될 건데 이렇게 죄송하게 올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내려앉음과 올라앉음이 둘이 아니게 평등하며 일체가 다 터졌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계(戒)ㆍ정(定)ㆍ혜(慧)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계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의 전체를 말합니다. 오계(五戒)니 십계(十戒)니 이백오십계니 이백팔십계니 하는 문제들도 전부 이 계율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질서를 지키고 또는 시간도 지키고, 그걸 문란치 않게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한두 가지 계율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면서 지켜야 하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아서, 누(累)가 될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누가 되지 않을 일은 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나와 남이 전부 동시에 이익한 문제가 있다면 거짓말을 하는 게 거짓말이 아니 될 수가 있으니 그것도 또한 계율에 속합니다. 빼고 낄 줄을 모른다면은 그거는 목석과도 같은 거니까. 그래서 계는 정에 들어 있다, 정심(定心)에 들어 있다 이겁니다. 계는 정심에 들어 있고 혜도 정심에 들어 있어서 바로 계ㆍ혜ㆍ정입니다.

그 정심(定心)으로 인해서, 한자리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들고 나는 이 도리를 여러분은 잘 아셔야, 그 정심에서 밝아져야만이 해탈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해탈이라는 것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이름마저도 벗어나야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이 마음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달과 같이 밝음, 어둠을 비춰주는 달과 같이 밝음이라고 했습니다. 해가 거기에 속해 들어가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일체 만중생을 따뜻하게 키워주고 비춰주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 어떻게 속해 있느냐? 우리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씨로 따뜻한 지혜로써,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생각 생각이 부드러운 지혜로써 서로 융합해 나간다면은 그것이 바로 해와 같은 겁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하면 남의 마음도 따뜻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데 어찌 남의 마음이 따뜻할 때를 바라겠습니까? 내 마음이 악하게 되면 그건 무간지옥이라 그랬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반면에 선하고 착하고 밝고 깨끗하게, 정심으로써 지혜롭게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일체 중생을 대하고, 가정을 대하고 모든 상대를 대할 때, 따뜻한 마음으로 둘이 아닌 도리로 대한다면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스스로 상대도 밝아져서 나와 더불어 밝게 불을 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이러니 저러니, “나는 주인공을 찾는데도 이렇게 안됩니다.” “주인공을 찾았더니 잘되다가 또 안됩니다.” 이러거든요. 여러분이 한 발짝 떼어놓는 거만 알았지 한 발짝 또 놓고 드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은 놓고 한 발짝 들었으면 한 발짝 놓고, 이게 정상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안되는 것도 알아야, 드는 것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니라 놓는 것도 알아야, 들고 놓고 들고 놓고 하는 작용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를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찾으니까 어느 만큼 되더니 안되더라고 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알아야지 전진하기만 하면 빠져 죽죠? 때에 따라서는 전진하기만 하면 구덩이에 빠질 텐데 그때는 물러서야 빠져 것도 법, 들지 않는 것도 법. 그래서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라 한 것입니다. 왜 안되는 것도 법이라고 했느냐? 구덩이에 빠지겠으니까 빠질 일은 물러서야 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물러서서 다시 굴려서 놓으면은 빠지지 않을 데로 갈 수가 있으니까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 했습니다. 이거를 지혜롭게 잘 굴릴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몸만 아파서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아픔을 가지고 가는데 바로 그 아픔이라는 재료가 지금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공부길에 들어선 걸 뜻합니다. 그냥 맨손으로 들어설 수가 없으니까 그 재료를 가지고 들어선 겁니다. 그 재료가 아니면은 이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살지.’ 하는 마음이면 이 길을 들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요 말 한마디를 하고 넘어가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 모든 것은 공(空)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얘길 하지만 프로펠러 돌아가는 데, 그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습니까? 네? 먼지 앉을 새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병이 났다 하고, 여러 가지 아픔이 생겼다 합니다. 내가 이런 걸 당했다, 내가 가졌다, 내가 병났다, 모두가 ‘내가’ 입니다, 내가! 내가 공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고 했죠. 여러분이 그걸 짐작하시죠? 고정됨이 없이 보고 듣고 행하고 말하고 만나고 먹고,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우리가 한시 반시도 그냥 고정되게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모든 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딨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 가져오는 그 재료를 보면 모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가 아니라 전체 포함해서 돌아가는 길에 그런 것이 마음에 따라서 부딪치게 되고, 그 업식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나한테 자꾸 연관이 되는 거니까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걸 말입니다, 내 몸속에 들어서 자꾸 그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것을 말입니다, 업식이라고 하고 업보라고 하고 유전이라고 하고 영계성이라고 하고 이런 거를 다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모습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한테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생긴 거다. 업보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병고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나한테 이렇게 감사하게도 준 것이다. 이끌어주는 재료가 주어진 거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재료를 가지고 나는 관찰하고 거기다가 놓고, 내 마음의 주인한테다 맡겨놓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냥 틀고 앉아서 ‘이게 뭣고?’ 라든가, 의정을 강제로 내가지고 한다든가 이런다면은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하나하나 지켜보고 체험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일체 만법의 근원이며 그 근본을 해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그냥 ‘나는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이렇습니다.’ 하지 말고, 찾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본래 있는 거니까. 본래 없는 것을 찾는 것이라야 이게 문제가 되지만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를 발견하는 겁니다. 즉, 암흑 속에서 밝음이 불끈 솟아서 불이 일어나면 모두가 밝게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러고 저러고 이러고 저러고, 이 병원에를 가봐야 옳을까 여길 가봐야 옳을까 저길 가봐야 옳을까 이러지 마시고, 내 중심에서 ‘이거는 병원을 좀 갔다와야 되겠다.’ 한다면 그대로 가는 것도 법이고, ‘병원엘 안 가도 이 한마음 속에 이 모든 생명들이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주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들면 그대로 거기다 놓고 실험을 하고 지켜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 것을.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지, 내 속에 들어 있는 의식의 그 마음들과. 여러분이 따지고 보면 하나가 아니죠? 이 속에 들어 있는 수십억의 그 모습들이 다 여러분의 모습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주는 바람에 여러분이 걸어다니고 말도 하고 나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나를 보러 오더라도 나에게 말을 해서 해결을 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내 이 마음에다, 모두 한마음에다 넣고 ‘저 마음도 더불어 같이 한마음인데 어찌 스님의 마음인들 이 속에 아니 계시랴. 일체 만법이, 또는 만인의 마음이 또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다, 내가 아파서 응해달라고 하는데 어찌 응하지 않으랴.’ 그렇게 믿고 마음으로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다면 모두가 응신(應身)이 돼서 약사(藥師)가 돼가지고 여러분의 병을, 몸에 들어 있는 여러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고쳐 주시고, 어떠한 애로가 있다면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다면 칠성(七星)이 돼 주시고, 응신으로 찰나에 드셨다 나시고 드셨다 나시고, 그리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한다면, 그래서 좋은 데로 가게 해달라고 이렇게 정성을 지극하게 한다면 바로 지장이 돼서 여러분의 그 의식과 더불어 한데 합쳐서 그 지옥 문을 다 허물어뜨리고 나가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료한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바깥으로 그렇게 끄달리고 그런다면은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며 어떻게 모든 것에서, 그 암흑 속에서 벗어나서 이 태양을 다 보고 행하시렵니까?

옛날이라고 할까요, 내일이라고 할까요, 오늘이라고 할까요. 어느 동자가 말입니다, 부처님과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 부처님께서 동자더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자야!” “예.” “내 발과 네 발이 차이가 어떠하냐?” 하고 물었습니다. 동자 말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고?” 하고 또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동자 대답하기를 “내가 부처님한테 가면은 부처님이 하나가 되시고 부처님이 내게로 오면은 내가 하나가 되니, 어찌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까?” 했더랍니다.
그러니 “그러면 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또 물었답니다.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라니 말입니다.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부처님께서 또 물었답니다. 이 소년은 “박넝쿨이 담 너머로 넘어가서 박이 열린 까닭입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이 또 “박은 그래 여여한가?” 했더랍니다. “박은 제 나무에서 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했더랍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 만공에 꽃이 두루 피고 향기가 두루 나고 만 가지 맛이 나는구나. 그대로 그냥 그냥 익었도다.” 했더랍니다.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연결해서 침착하게 그 과정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경전으로 알려고 하지도 말고 내 마음 가운데서 ‘아, 양 발이 같을 수가 있고, 너한테로 가면 네가 하나가 되고 얘한테로 오면 이게 하나로 되고 둘이 아닌 고로 그 하나는 담 너머로 박넝쿨이 넘어가서 박이 열린다.’ 그 박도 익었어야죠, 또. 하하하. 그래야 제 맛이 나겠죠?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래도 수없는 억겁을 통해 진화돼서 나오면서 그래도 선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인연이 없다면 모이질 않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런 손수건을 하나 들어도 인연입니다. 이 손수건을 내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수건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써주니깐 바로 이 손수건이라는 빛이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이 모든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인연들도 같이 만나고 같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철 나와서 만남인데 이 만남에 의해서 ‘구덩이에 빠지느냐, 구덩이로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니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인의롭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착하게 마음을 쓰고 선한 일을 많이 하시고 악하게 생각을 갖지 마시고 항상 부드럽게 내 마음, 이 한마음 속에 더불어 같이, 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직결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이 한마음 속에 모든 것을 놓으시고, 거기다 맡기시고 어떠한 억울함도 거기다 맡겨놓고,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거기다 맡겨놓고 ‘네놈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물러서지 말고,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하시고 거기다 맡겨놓으면, 자기라는 게 없어집니다. 부드럽게 말하시고 행동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렇게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면 아마 조건 없는 사랑이 내 앞에 올 것입니다. 이 도리, 미묘한 도리를 여러분은 직접 실험해보십시오. 실험을 해보지 않는다면 모릅니다. 질문하실 게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저, 울산의 아들입니다. 저는 조금 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아들이라고 이름 지어놨습니다. 이름뿐이고요. 이렇게 와보니까 정말 좋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제가 살아온 과정이 큰스님 법문하고 저의 인연하고 백분의 일 미리도 오차가 안 난다는 걸 자신하고 믿고 갑니다. 그래 왔습니다. 그 과정에 있어가지고 저 나름대로 체험을 많이 합니다. 아픈 것도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아팠는데, 고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더군요.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거울을 딱 들여다보니까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조금도 오차가 없어요, 거기에.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발견했느냐 하면, 우리 집의 식구가 아픕니다. 아픈데, 처음에 이렇게 하다가는 중도에 나을 줄 알았는데 안 나았습니다. 그래가지고는 ‘아픈 것도 너 알아서 해.’ 하고 내가 미련스럽다보니까 ‘너 알아서 해!’ 하다보니까는 한 보름 전에 딱 부딪치데요, 그게요. 왔습니다, 그게요. 아, 그런데 내가 지금 그쯤은 알아가지고 행동한다거나 말같은 이런 거 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그 습성 있잖습니까? 습성, 버릇. 그게 잘 안돼가지고, 큰스님께서 좀 교정을 시켜주십사 하고 또 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제 삼천 마일짜리 모터를 돌리는 모양인데요. 이제 삼만 볼트 전기를 안양 스님한테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허락하셨죠?

큰스님: 그 모든 건 정심(定心)에서 나오는 거니까 정심에다가 모든 걸 놓으면 망상이든 뭐든,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모든 건 그놈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놈한테다 맡겨놓으면은 그대로지, 어디 또 망상이 따로 있습니까? 습성이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니라, 습도 그놈이 저지른 거니까 그놈한테다 놓으십시오.

질문자1(남): 그런데 굉장히 묘한 게 많습니다. 제가 술을 많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아침에 속이 쓰리다 그러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먹고 괜찮다 하니까는 아침에도 괜찮고요. 뭐, 밥 한 그릇 다 먹고 회사 출근하고요. 신기합니다, 그게 또.

큰스님: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습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해결할 수 있고, 다스리는 것은 너무 많이 먹으면 좀 실례가 될지 모르니 조금, 한 그릇 두 그릇 덜 먹는다 하는 마음으로 가면은 다스려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하지 말라’가 아니고 ‘하라’가 아니고, 자기에 맞게 용도에 맞게, 자기한테 아주 알맞게 모든 것을 행하시면 그게 바로 정행입니다.

질문자1(남): 그러니까 저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이제까지 그런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습성이 좀 남았는데, 저 나름대로 빨리 하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하여튼 참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큰스님: 습성도 놓으십시오.

질문자1(남): 예. 예.

큰스님: 그럼 됩니다.

질문자1(남): 큰스님, 너무 감사합니다.

큰스님: 장하십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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