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보살의 인과이야기

〈승만경〉, ‘수순중생’ 잘 드러나
“상황에 맞게 육바라밀 실천”

수순중생
〈승만경〉에서는 정법을 받아들이는 일과 육바라밀을 설하고 있는데, 수순중생(隨順衆生)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수순중생이란 중생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능력과 상황에 맞게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승만경〉에서는 상대방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게 육바라밀을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육바라밀은 주지하다시피 도를 이루게 하는 여섯 가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한다. 불교에서 가르친 수순중생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내용을 적어본다.

세존이시여, 정법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법을 받아들이는 일이 정법 자체와 다르지 않고, 정법 자체가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정법 자체가 바로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 바라밀이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이 바로 바라밀입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정법을 받아 지니는 선남선녀는, 베푸는 일로 성숙시킬 이는 베풀어서 성숙시키고(중략), 몸을 버려서라도 저들의 마음을 따라주면서 성숙시켜 그들을 정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이이라고 합니다.
계를 지키는 일로 성숙시킬 이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뜻)을 수호하고 몸과 말과 뜻, 그리고 행동거지를 청정하게 저들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성숙시켜 그들을 정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계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참는 일로 성숙시킬 일은 상대방이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비방하고 흔들어 놓아도 화내지 않고 이익을 주려고 하며, 최상의 인욕을 발휘해서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저들의 마음에 따라 주면서 성숙시켜 그들을 정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노력으로 성숙시킬 이는 상대방에게 나태라는 저열한 마음을 내지 않고 기꺼이 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노력하며 일상생활(행주좌와) 어느 때든, 저들의 마음에 따라 주면서 성숙시켜 그들을 정법에 편안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진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선정으로 성숙시킬 자에게는 상대방에 대해 산란심 없이 정념(正念)을 성취하여, 진과거에 닦았던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저들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성숙시켜 그들을 정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선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성숙시킬 이는, 상대방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저들이 가르침의 의미를 물어볼 때 싫증내지 않고 모든 논의, 모든 학문, 심지어 각종 기술과 예능에 관한 학문까지 가르쳐주어서 궁극적인 의미를 알게 하고, 저들의 마음에 끝까지 따라주면서 성숙시켜 저 중생을 정법에 편히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정법을 받아지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고 바라밀이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정법을 받아 지니는 일이 바로 바라밀입니다.

수순중생은 곧 인연에 따르는 것이며,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 시비를 논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며, 티 없이 순수하게 사는 것이며,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며, 남을 돕는 것이며, 선하게 사는 것이다.
집에서 공부 모임을 가지다 보니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고 갔고 자연스럽게 상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하소연 하는 이에겐 시어머님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모시라고 권했고, 자식이 대학에 가지 못하게 생겼다고 울상을 짓는 사람에겐 “벌써부터 못 간다고 불공을 드리지 마라.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고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세탁소에 가면,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주며 “신발을 이렇게 놓으니까 좋지? 다음에는 이렇게 해봐” 하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조금 주고 나오면 다음에 가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대방이 어려울 때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존심을 다치지 않을 정도로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의 어려운 얘기를 다 풀어놓고는, “보살님은 그런 일 없으니까 잘 모르시죠?”라고 하면 “저기 어떤 여자가 그렇게 산다더라.” 하고는,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희로애락이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남편이 밉다는 이에게 “어제 저녁에 뭐 해줬어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냥 저냥 먹었지요.”
“왜 그냥저냥 해줘요? 음식을 잘 대접하는 것에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시장을 봐다가 푸짐하게 잘 차려드리세요.”
잘하는 게 이기는 것이고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가족에겐 소홀히 하면서 절에 다닌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정이 평화로워야 마음공부가 잘되는 것이다.
가정을 평화롭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사람의 환경을 먼저 이해해 주는 것이다. 나의 남편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산 사람이다. 아버지가 북으로 가셨기 때문에 그는 술만 마시면 통일노래를 부르는데, 그런 그에게 통일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한다거나 그 행위를 내가 불행하게 여긴다면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문제이며, 다 함께 불행한 것이다. 부모 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나와 남편을 평면 비교할 수 없잖은가. 부모가 계셔서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 환경을 이해해 주다보면 싸울 일이 없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여여회는 동사섭, 즉 보시,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실천하는 신행생활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격려하고 살려주었더니 주인의식이 심어졌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공부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연말이면 1만원 이내의 선물을 가지고 와서 교환했다. 서로 맞절을 하면서 한 해를 잘 지낸 것에 감사했고 다음 해를 기약했다. 그 날 만큼은 한복을 입고 오게 했는데, 일 년에 한 번 한복을 입는 그때 옷고름을 제대로 매는 법, 버선을 신는 법, 절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생활관 역할을 했다. 공부를 하고 가서 엄마 노릇을 잘하면 아이들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 엄마가 좋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자체가 포교가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남편들이 보시금도 보내주었고, 법회에 간다고 하면 “만사 오케이”가 되었으니 보람이 있었다. 밥과 반찬이 남은 게 있으면 어른이 계시는 집부터 싸주었고, 집에 들어온 선물은 “거사님에게 가져다 드리라”하고 보냈다.
여수동좌(與誰同座)라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큰아들과 동갑인 우리 옆집 보살의 딸은 내가 권해 예절공부를 하고 예절교사가 되어서 여여회 대표주자로 강의도 보내고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 가정이라는 도량에서 연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쓰고 살기로 했다. 내일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풀어서 쓰기로 했다. 누가 참기름을 팔러 오면 “어디 절에 갈 일 있는데 이리 주세요.”하고는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사서 필요한 데 보냈다. 다른 곳도 도와주어야 하지만 나에겐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이 부처다.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무슨 고도의 도력이나 완벽한 인격이 아니어도 바로 이 자리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보시다. 남에게 무언가를 주면 내 마음이 우선 기쁘다. 안심은 기쁜 데서 온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베푸는 데 조건이 있으면 덕이 되지 않는다. 물질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넘치기 전에 덜어내야 한다.
사람은 재능, 재물 등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도 모두 쓰고 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적재적소에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뭐가 있어 내 것인가?
좋다고 여기는 일은 취하고 나에게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은 버리는 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불교를 알고 나니 그것이 수순중생을 하고 살아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조건 없이 들어주며 살아왔다. 결코 부자가 아닌 사람이지만 재물을 재어두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고 살아왔다. 항상 생일이요, 결혼식 날이요, 죽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왔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법회가 왜 그리도 빨리 오는지, 그래도 정말로 신나게 일한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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