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발로 디디고 있는 것은

모두가 부처라 할 수 있다.

세계도 국가도 부처

시방세계 안의 모두가 부처

일체 여래 앞에 모든 것 부처

 

 10. 행원례 (行願禮)

① 예경제불(禮敬諸佛)

南無至心歸命禮西方阿彌陀佛

所有十方世界中 三世一切人獅子

我以淸淨身語意 一切遍禮盡無餘

普賢行願威神力 普賢一切如來前

一身復現刹塵身 一一遍禮刹塵佛

願共諸衆生往生安樂國

 여기서 예경제불(禮敬諸佛)의 예경은 앞에서 말한 바인데 제불이라는데 대하여는 그러니까 모든 부처라고 한다면 광범위한 것이지만 이에는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이 알기 쉬울 것이다.

원효대사는 제불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과만족 덕불(果滿足德佛)이다. 과가 만족스러운 덕을 이룬 부처다. 과는 모든 수행의 결과라는 뜻. 「만족스러운 덕」이란 다시 말하여 덕이 만족스러운 것을 이른다. 이는 수행하는 우리가 그 수행의 결과로 모든 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성스러운 지경에 들어가 깨쳤다, 도통하였다, 부처가 되었다(成佛)고 한 때의 바로 그 지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는 여래장불(如來藏佛)이다. 여래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구세주(救世主)라고 알아두는 것이 좋다. 범어로는 다탕아다(Datangada)라고 하여 응공(應供)의 뜻이 있는데, 이를테면 모든 사람에게서 공양, 즉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커다란 자격을 가졌다, 모든 사람에게서 응당 존경을 받을만한 어른이라는 것.

또 정변지(正?智)라고 하여 지혜가 어느 곳에나 두루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명행족(明行足)이라고 하여 밝은 행동이 구족하다는 것을 일컫는다. 사람의 행동이 밝지를 못하면「컴컴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은 선서, 잘 하고 돌아가셨다는 말. 사람으로서 할 짓을 다 한다. 모든 일을 잘 하고 간다. 할 짓을 못하고 가면 뒤가 시원찮게 된다. 존경을 안한다. 우리가 민족의 태양으로 받드는 이순신 장군은 그의 행동에 한 군데도 명행족 아닌 구석이 없었으며 성심 성의를 다하여 국난을 건지고 돌아가셨다. 할 짓을 다 하고 돌아가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짓을 못하고 간 사람은, 왕이라도 연산군(燕山君) 같은 이나, 자기 아니면 대통령할 사람이 없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4ㆍ19의 학생 데모로「당신은 물러가시오」하는 통에 하야한 이나, 잘 하고 돌아갔다고 말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가 사는 동안 잘하고 돌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다음은 세간해(世間解)다. 세상일을 모두다 이해하고, 잘 알고, 정곡을 꿰뚫어 보고, 인정의 기미를 잘 헤아리고, 인간의 진실을 잘 포착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무상사(無上師)이시다. 위에 덮을 수 없는 위대한 스승이다.

그리하여 또 천상과 인간의 스승, 천인사(天人師)라고 한다. 이와같은 어른은 불타(佛陀)다. 깨친 어른이다. 또한 이러한 이는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므로 세존(世尊)이라고 한다.

여래(如來)라는 말 속에는 위의 여러 가지 요소가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여래장불(如來藏佛)이란 우리가 여래(如來)를 간직하고 있다(갊아 있다)는 뜻이다. 우리 자체내에 여래가 들어 있다는 말인데,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본능적으로 원래 타고났다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원래 본각(本覺)의 터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누구나 알뜰히 지성을 다하여 행동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노력을 요하고, 노력의 결과 성스러운 지경에 도달하기 까지는 역시 일개 범부(凡夫)이며 아직은 미망에 사로잡혀 허둥대고 있다. 그러나 어쨌던 그런대로 부처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부처다.

그리고 제불의 셋째는 상형불(象形佛)이다. 앞에서 말한 여래장불이나 과만족불(果滿足佛)은 대개들 얘기하고 있지만 이 형상불은 원효대사의 독특한 견해이며 이것만으로 보아도 그는 대단한 형안을 가진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형불은 생명체를 가진 것이 아니고, 유정(有情)이 아니고, 의식(意識)이란 것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이냐하면, 우리가 법당에 모셔 놓은 불상은 쇠로, 구리로, 돌로, 흙으로, 나무로 다듬어 상형을 조각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부처님이다 하고 예불을 드린다. 다시 말하여 흙이나, 돌이나, 쇠나, 은이나, 또는 종이에 그린 그림까지도 상형을 만들어 이를 부처로 모시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실상인즉 흙이나 돌 만이 부처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로 디디고 있는 돌이며 흙이며, 우리 둘레에 있는 온갖 물질을 모두 다 부처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원효대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우리가 몸에 지닌 옷이나, 신발이나, 모자에서부터 펜이나, 종이나, 책상, 잉크, 벽, 뜰, 공기, 수목, 산, 물 할 것 없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물질이 다 부처 아닌 것은 없다.

우리가 세계라고 하는 것, 또 좁히어서 국가라고 하는 것, 국토라고 하는 것이 역시 다 부처다. 국가는 우리의 부처님이다. 국토가 부처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의 나무를 꺾거나 하여 국토를 황폐케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만다라인 도량을, 부처님이 계시는 터전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지상천국이라는 말이 있지만 원효대사의 이 상형불의 취지를 새겨보면 그 말이 이만치 간곡한 표현을 얻지는 못하였음을 깨닫는다. 우리 국토의 돌 하나하나 흙 한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부처라는 이 알뜰한 사상은 일찍이 아무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또 범위의 그 광대 무변함은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저 태양이다, 달이다 하는 성운계(星雲系)의 모든 별들, 대기(大氣)며 에덴이며 부유하는 그림이며 우주의 모든 현상계(現象界)가 다 부처이므로 우리는 경건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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