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명호 부르면

자비와 사랑 받는다

감사한 마음을 내면

결초보은의 생각 품게 돼

전인류는 대자비에 포섭되고

어떠한 사람이건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다

 

8-1 십념(十念)

대사회의 모든 중생을 위하고, 전인류를 위할 뿐만 아니라, 꼼지락거리는 목숨 붙은 모든 생물에 대하여서도 사랑과 자애를 베풀어야 된다. 이와같은 사랑을 베푼 은덕(恩德)있는 이에게 우리가 귀의 해야 되고 그를 경순(敬順)해야 되고 우리의 목숨을 온통 바쳐 그를 받들어야 된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여섯자를 뇌이는데는 칭념(稱念)과 칭명(稱名)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칭념은 아미타불을 일컬어 생각한다는 것, 칭명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컫는 것으로 조금 다른다. 그러나 일컬어 생각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실지로 소리를 내어야 되는데, 소리를 안 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뜻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된다. 삼밀가지(三密加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과 입과 의식작용이 음성으로 통일되는 것인즉 나무아미타불 역시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명호를 부르고 소리를 내야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아미타불도 아이가 엄마를 불러 소리를 질러야 비로소 어머니가 아이를 보듬고 젖을 주며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과 같다. 죄악이 많은 우리로서는 늘상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명호를 불러야만 자비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각 기관마다 구호를 내걸고 뇌이고 있어 이것이 즉 캐치프레이즈가 무슨 일을 추진하는데 매우 요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무아미타불도 이와 마찬가지다. 보은(報恩)한다. 왜냐하면 감사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정녕코 결초 보은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품고 늘상 입버릇처럼 뇌이는 사람과 그런 것 아랑곳없다는 투로 망각한 사람과는 벌써 하는 식이 판연히 다른 것이다.

인간은 허약한 것이다. 빠스깔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는데 어떤 면으로는 갈대 보다도 더 연약한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이다. 퍽이나 허망된 것. 그것이 생명일는지도 알 수 없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하고 우리는 아침 인사를 한다. 하룻밤 사이에 혹시 무슨 생명에 변동은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의 발로가 이런 인사말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서는 생명에 대한 허망의 뜻이 짙게 풍긴다. 인간의 생명이란 실상 허망한 것이지마는 그러나 한번 지성이 움직이는 날에는 기어코 천지가 다 감동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 삼을 것은 생명 자체에 있지 않고, 지성을 다하여 믿음직한 일을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 성실의 미덕을 닦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이 된다.

생명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한 분이 전 인류와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크게 걱정을 하고 이들을 건지겠다는 커다란 목적으로 대비원(大悲願)을 세우셨다. 그는 아미타불이 인행(因行)한 때의 수행자(修行者)였던 법장(法藏)이라는 분이다. 만일 중생이 내 이름 즉 아미타불을 불러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끝내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어떤 죄를 지었던 간에 그것을 막론하고 마지막 임종시에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준다면 나는 정녕 그를 내가 사는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리라, 만일 내 이름을 열 번 불러 내 나라로 오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결단코 성불을 안 할 것이다. 이러한 대원력, 대비원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미타불의 대비원력(大悲願力)에 힘입어 무연(無緣)의 대비(大悲), 인연이 있건 없건 간에 전인류는 이 대자비에 포섭되고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건 모두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 번 뇌인다고 십념(十念)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무슨 뜻으로 열 번으로 지정한 것이냐하는 의문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십은 무량지의(無量之義)를 나타내어, 열을 열제곱한다치면 무한대의 수를 가리키는 것이 되므로서, 이를 즉 무량(無量)을 뜻하는 데서 그런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부르고 난 다음 우리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무척 위대하다는 게송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9. 본원게(本願偈)

其佛本願力 聞名欲往生

皆悉到彼國 自致不退轉

아미타불의 원력이 얼마나 위대하냐 하면 그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나 다 극낙 세계로 갈 수 있다. 극낙 세계란 다시 말하거니와 아미타불이 대 왕생(大往生)한 곳이며, 대 사회성을 깨친, 그리고 그 대 사회 의식을 실천하여 건설하는 세계를 이른다. 또 그러한 사람, 즉 아미타불을 뇌고 극낙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스스로 쓰러져 구른다. 해도 퇴전(退轉)하지 않는다. 그릇된 짓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중단하면 퇴만심(怠慢心)이 생겨서 끝을 못맺고 마는 것이 일쑤다. 흔히 우리나라 사회에서 일컫는 불톡신심이라는 것이 그런 경우인데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언뜻 무슨 생각이 나서 일을 벌려 놓고는 뒷감당을 못하여 망설이다가 일을 망쳐버린다. 이것이 다 퇴만심의 소치다. 발심이 사흘도 못가서 식어지고 뒤로 물러나 게을러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를라치면 그 공덕으로 하여 오직 한결같은 정진이 있을 뿐이지 결코 물러나는 일이라곤 없다. 이를 불퇴전(不退轉) ‘아비발치’라고 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는 일 없이 근면·노력·정진이 있을 따름이다. 이를 확인한 뒤에는 우리는 커다란 기원을 간직하고 오직 한 길로 실행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실행하는 일이란 다름 아니라 이 행원례(行願禮)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실행은 커다란 비원(悲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매 겸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로써 일상 생활에 임한 때 이를 예(禮)라고 표현하게 된다. 즉 예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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