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속지 마시고 항상 주인공에 맡겨놓으세요

▲ 그림 최주현

수억겁 전부터
같이 진화하면서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해서 자기를 형성시켜 온
그 절친한 벗,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 절친한 벗은 누구냐?
자기 주인공입니다.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공은
죽으나 사나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딜 믿으실 겁니까.
나 자신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그렇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것과 더불어
이렇게 끌려다니고
끌고 다니면서
둘이 아니게
같이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몸뚱이 속에 업식이 뭉쳐 있습니다. 업식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니까 고덩어리죠. 우리 중생은 고덩어리를 짊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수없이 악업 선업의 업을 지어서 인연이 돼 가지곤 잔뜩 짊어지고, 카세트 하나를 짊어지고 말입니다. 거기 죄 담겼거든요. 짊어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부모가 짝짓는 데로 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뭘 받느냐? 자기가 지고 나온 업식을 그냥 짊어지고 그리로 들어가되, 아버지한테서는 뼈를 빌리고 어머니한테서는 살을 빌려서 집을 짓고 나옵니다. 집만 받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각자 업식은, 그 고덩어리는 자기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오는 겁니다. 임신이 되면 수십억 마리가 다 없어지고 자기 영혼 자체 하나가 부모가 주는 모습, 집을 받는 거죠. 집을 받으면 거기에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그 업식들이 다 골고루 퍼져서 그 몸뚱이에 그냥 전부 같이 하고 말아 버리죠. 그러면 그게 점점점점 자라 가면서 커지고 그러니까 ‘자기가 지은 거 자기가 받는다.’ 이런 게 나오죠.

그러니까 부모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가고, 자식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가죠. 모두가 대신 가 줄 수 없고 여러분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같이 갈 양으로 애를 써도 돈이 안 가 줍니다. “네가 나를 좋아서 따라다녔지 내가 너를 좋아서 따라다닌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난 못 가겠어.” 이러고 안 가요. 몸뚱이도 안 갑니다. 몸뚱이도 따라가 주질 않아요. 그렇게 이 몸뚱이를 아끼고 쓰다듬고 온통 만지고, 추우면 더운 거 입혀 주고 더우면 시원한 거 입히고, 질척질척하면 깨끗하게 씻어 주고 이랬는데도 안 따라가는 겁니다. 죽을 때 가서는 안 따라가요.

또 자식들도 보십시오. “얘야, 내가 가는데 외롭고 그러니 너희들 좀 따라가 주지 않으련?” 그러면 “아버지든 어머니든 누구를 막론해 놓고 나는 같이 가 드릴 수 없어요. 그저 산소까지나 화장터까지만 가 드릴게요.” 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가 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죽어도 부모가 가 줄 수 없고요.
그러나 수억겁 전부터 같이 진화하면서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해서 자기를 형성시켜 온 그 절친한 벗,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 절친한 벗은 누구냐? 자기 주인공입니다.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그 주인공은 죽으나 사나 함께 있습니다. 지금도 죽으나 사나 끌고 다니고 죽으나 사나 끌려다닙니다. 허허허…. 그러니 여러분은 어딜 믿으실 거예요? 여러분은 어딜 믿으실 겁니까? 나 자신을 버리고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그렇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것과 더불어 이렇게 끌려다니고 끌고 다니면서 둘이 아니게 같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애석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면서 어떠한 짐승이나 벌레를 죽이지 않습니까? 나는 그전에 그런 거를 보고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누가 그 피를 먹기 위해서 돼지 목을 땄습니다. 그거를 가다가 봤습니다. 그런데 이 돼지는 흑흑 흐느껴 가면서 울었습니다. 흑흑 흐느껴 가며 우는 건 정말이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는 것도 ‘흑흑흑 흑흑흑’ 이러고 울었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됐다가도 마음을 잘못 쓰고 업장이 두꺼우면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트이지 않아요. 죽어서 그 영령이 돌아다니다가 짝짓는 아무 데나 그냥 들어가는 겁니다. 도대체 어딘지도 모르고요.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걸렸다 하면 그 모습을 쓰고 나오는 겁니다. 돼지 어머니 아버지의 살과 뼈를 빌려서 나오는 겁니다, 또. 이것 참 애석합니다.

그리고 돼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도 그렇습니다. 나는 일부러 도살장에도 찾아다니면서 많이 봤습니다. 길을 가다가 본 것도 많고요. 보면 벌써 미리 알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봤지만 개가 아주 영리하게 그 집 식구를 살리는 것도 봤습니다. 그리고 또 돼지도 그렇게 식구를 살리는 걸 봤거든요. 쥐도 그렇게 하는 걸 봤고요.
말하고 돼지하고 소를 기르는 어떤 촌가가 있었습니다. 말은 마차를 끌고서 항상 짐을 지러 다녔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마차에 싣던 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소는 농사를 짓는 데 쓰고 그랬는데, 얼마나 영리한지 몰라요. 이쪽 동네하고 저쪽 동네하고 앙심을 품고 대립이 돼 가지고 있는데 자식들이 그만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른끼리 또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곤 원수지간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저 너머 동네의 쪼그만 애들이 이쪽 동네에다가 불을 질렀습니다. 애들이 뭐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기르던 말, 소, 돼지가 그 밤에 ‘꿀꿀 꿀꿀’ ‘음메 음메’ 소리치면서 그냥 막 뛰어나와 가지고서 집 불붙은 데를 맴돌면서 막 뛰었거든요. 그러니 사람들이 죄 깨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한 동네를 구하더랍니다. 그래서 ‘사람 못된 거는 짐승만도 못하다.’ 이런 소리가 있죠. 나는 그런 것을 역력히 봤습니다.
그리고 또 아까도 얘기했지만 개미란 놈이 떼를 지어 가면서 전부 통신을 해요. 수많은 개미들이 죽을 위험이 있으니까 개미란 놈이 전부 통신을 하는 겁니다. 뭐를 하나씩 떨어뜨리고 가요. 자기 간 데로 그걸 따라서 오라는 거지요. 가지고 가는 것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저 요만큼씩 한 것을 중간 중간에 흐트리고 가는데 개미들이 그거를 쫓아가더라는 얘깁니다. 그저 새까맣고 쪼그마한 건데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나이가 어릴 때 봐서…. 지금 같으면 자세히 좀 볼 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보려고 하면 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네들 길을 인도하는 그런 표시겠죠.

그러니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요거를 한번 곁들여서 말씀드리고서 끝을 내겠습니다. 옛날 어느 동네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하게 지냈는데 한 친구는 절로 들어가서 승려 노릇을 하게 됐고 한 사람은 그 동네 마을에서 그냥 부모를 모시고 살게 됐습니다. 근데 승려 노릇 하던 사람이 홀어머니를 남기고 갔는데 큰스님 밑에서 3, 4년 공부를 하다가 그 어머니가 안됐어서 도로 와 가지고서는 친구하고 같이 보따리 장사를 했습니다.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어느 길을 가다가 보니까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설법을 하시는데 아, 그렇게 마음에 와 닿거든요. 그러니까 절에 가서 있었던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 ‘아이고, 이 세상을 다 봐도 저분만한 분이 없다. 저분은 참, 세계의 왕이로다. 저런 설법을 내가 언제 또 들을 수 있으며 저런 법을 언제나 배워서 내가 저렇게 하나? 그래도 고생하신 어머니, 나를 이렇게 길러 주신 어머니, 아무리 육신의 어머니라도 그 은공을 잊을 수 없으니 우리 어머니만 공양을 잘 받들어 모시고 난 뒤에는 내 몸에다가 어머니의 마음을 같이 모시고 그 법을 배우러 가리라.’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아이, 저거 사기꾼 같아. 저렇게 돈 벌어서 제 봉창에 다 넣겠지.’ 요렇게 생각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눈이나 깜짝하시겠습니까? 이 도리를 완전히 배운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제 몸뚱이도 없는 겁니다. 이런 걸 어찌 여러분이 다 아시리까마는 이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다 알게 돼 있습니다, 언젠가.

예전에는 칠일장을 보았는데 도매로다가 한 보따리 사 가지고 소매로 팔 양으로 들고 가다가, 스님을 했던 사람이 주막에 가서 보따리를 내려놓고 기다리는데도 다른 친구가 영 오질 않아요. 술을 잔뜩 먹고는 길에 쓰러진 겁니다. 옛날에는 수레가 많이 다녔죠. 백 대 이백 대의 수레가 새벽에 지나가는데 그냥 거기에 치여서 죽어 버린 겁니다. 그 친구를 기다리다 안 와서 새벽녘에 나가 보니까 그렇게 치여서 죽었거든요. 그래서 그 친구를 짊어져다가 잘 묻어 놓고 집에 돌아가려니 글쎄, 자기 어머니나 그 집 어머니나 똑같이 한 동네에서 사는데 어떡합니까? 그 어머니도 아들이 죽었다고 그러면 복통을 할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밤중에 몰래 가 가지고는, 어머니가 돈이 없어서 굶고 잘못될까 봐 “난 몰래 갑니다. 한 3년 있다 오겠습니다.” 이러고선 그냥 밑천을 다 주고 물건 산 것만 짊어지고서는 강을 건너갔습니다.

강을 건너서 멀리멀리 목적지도 없이 가다 보니까 어느 곳에 사람이 인산인해로 모여 있었습니다. 인군이 죽었는데, 금옷을 걸치고 금테를 두른 말이 새 인군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슬슬슬슬 걸어 나오는데 다른 사람은 영 등에 태우질 않아요. 그러다가 보따리를 지고 구경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더니 주위의 사람들을 그냥 헤치고선 꽁무니를 돌리면서 타라고 몸짓을 하니까, 따라오던 신하가 그 사람을 번쩍 들어서 그 말에다 올려 앉혔습니다. 보따리를 지운 채 말입니다. 그래서 끌려 들어갔죠. 그래, 인군이 됐단 말입니다.

인군이 되니까 ‘아하! 이 나라에도 부처님 법을 펴라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부처님께서 해 주셨으니 이젠 부처님을 모셔다가 불법을 펴야지. 부처님이 나를 이렇게 인군으로서 관리하라고 이름만 주셨지 불법을 펴라고 이랬구나!’ 하면서 껄껄껄 말을 타고 웃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자기라는 건 다 빼 버린 겁니다. 얼마나 그 지혜가 참 출중합니까, 네? 인군이라고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마는 그거를 다 버린 채 말 위에서 ‘야! 참, 부처님께서 날더러 불법을 펴라고 이렇게 인군의 이름을 주셨구나! 이 이름으로 불법을 펴야지. 어쩔 수가 없지.’ 하고서 인군이 됐습니다. 그러고선 그 훗달부터 부처님을 모셔다가 사람들이 설법을 듣게 하고, 자기 어머니와 죽은 친구의 어머니까지 모셔다가 잘 모셨답니다.

육의 부모도 부모요 법의 부모도 부모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법의 부모도, 부처님 마음 주인공도, 영원한 나의 근본 주인공도 바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사생을 다 같이 하시고 아픔도 같이 하시지만 우리 부모들은 자식과 마음을 같이 하거든요. 적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고 애쓰는 그 마음, 자식을 위하는 그 마음이 자기 생명보다도 더 아끼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거 보세요. 작은 그릇의 물 한 그릇도 한 그릇이요 큰 그릇의 물 한 그릇도 한 그릇이라 이겁니다. 그러니 작은 그릇의 물 한 그릇은 평소에 살면서 부모들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요, 큰 바다의 물 한 그릇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라. 그러니 어찌 마음이 둘이겠는가? 그러니 육의 부모는 아무것도 아니고 법의 부모만 내 주인공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 주인공 안에 내 법의 부모와 내 육의 부모도 둘이 아니요 여기 스님네들도 둘이 아니요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둘이 아니요. 이러니 어느 하나도 둘 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에 속지 마시고 속에서 분노가 솟더라도 ‘아이! 내 주인공만이 화가 안 나게 할 수 있지.’ 하고 거기 맡겨 놓고, 안되는 일이 있으면 ‘아! 내 주인공밖에는 해결할 데가 없어.’ 그러고 또 거기 맡겨 놓으시고, 잘되는 거는 ‘내 주인공밖에는 감사할 데가 없어.’ 그렇게 또 맡겨 놓으시고…. 이렇게 사신다면 첫째, 벌써 그 마음이 편안하니 좌선이고, 일을 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고, 이러면서도 편안하면 참선이라, 또. 일상생활이 그냥 참선이라. 누워도 서도 앉아도 그냥 참선이야. 그러니 일상생활에 얼마나 편안합니까, 네? 그러니 어느 법당에 들어간들 부처님 그 모습과 내 모습이 둘이 아니요, 꽃 한 송이를 봐도 저 모습과 내 모습이 둘이 아니요,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마운 줄을 아셔야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여러분한테 몸을 바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람은 화해서 공기로 되어 여러분이 숨쉬고 살게 해서 생명력을 이어 주는 게 되니 고마운 겁니다. 태양도 여러분을 길러 주니 고맙고, 모든 만물을 다 길러 주지 않습니까? 물이 없어도 죽죠? 불이 없어도 죽죠? 바람이 없어도, 공기가 없어도 죽지요?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수화풍이 뭉쳐서 모든 생명이 생기고 그러는 건데, 그 여러 가지 이름을 다 부를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 한마디만 부르면 될 것을 왜 여러 군데로 쫓아다니면서 그냥 방황하고 그러다가 자기가 쓰러져야 합니까?
어느 스님이 이렇게 공부를 시켰답니다. 제자를 열두 명을 두었는데 제자를 영 가르칠 수가 없거든요. 제가끔들 학(學)으로만 하고 이론으로만 밝지 자기가 목마르면 물 한 컵을 제대로 떠먹질 못해요. 이 소리를 뜻으로 들으십시오. 정말 물을 못 떠먹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배고프면 자기가 얼른 밥을 먹어서 배부르게 하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내 배를 부르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들이 공부를 해서 참, 달마 대사나 역대 조사들이 이렇게 가르치셨답니다.
예전에는 스님네들이 전부 아침에는 죽을 쑤어서 일찍 잡쉈습니다. 모두 공양들을 하고 일어나려는 참이었는데 주지이신 은사 스님이 “주인공!” 하고 크게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전부 쳐다보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자기가 또 “예.”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놓고선 “아침 공양 했는가?” 그러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또 자기가 대답하기를 “식기 닦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항상 그랬습니다. 제자들이 가만히 들으니까 살짝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아이구! 은사 스님이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되기도 하고 또 ‘저 우리 은사 스님이 참 이상하기도 하다.’ 하고 의아하게 생각을 하다가 그것에 고만 의정이 났습니다. ‘은사 스님이 왜 저럴까, 아침마다.’ 미쳤다고 생각을 해도 미친 것도 아니고 ‘왜 저럴까?’ 하고 항상 어디 가서 앉았어도 그냥 그 생각만 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은사 스님이 “주인공!” 부르고 또 스스로 “예!” 하고 대답하는 소리에 고만 퍼뜩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그냥 깨쳤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전부 깨달아서 그 은사 스님하고 다 한자리를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난이 무슨 죄며 못난 게 무슨 죄며 말 못하는 게 무슨 죄며 부처님 법을 모르는 게 무슨 죄입니까? 죄가 있다면 모르는 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업을 짓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짓는 것이니,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오늘부터라도 항상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주인공밖에는 해결을 못한다. 주인공밖에는 내 아픔을 씻어 줄 수 없다. 주인공밖에는 내 아들을 잘 이끌어 줄 수 없다. 주인공만이 내 남편을 잘 이끌어 주고 나를 사랑받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모든 것을 그렇게 하세요. 또 내가 말씀드리는 거는 누구한테든지 남녀를 막론해 놓고, 자식이 그러든지 남편이 그러든지 아내가 그러든지 안으로는 맡겨 놓고 언제든지 좋게 따뜻하게 대해 주면 그냥그냥 모두 착한 아들이 되고, 또 화목하게 되고 집안에 우환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돈도 “아유! 저놈의 집은 자꾸 싸움만 하니까 난 들어가기 싫어.” 하고 거기 안 들어가게 하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다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부처님께서 사월초파일날 나오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탄생하시도록 하십시오. 이 법당을 짓는 데도 서쪽을 등을 지고 동쪽을 향해서 이렇게 하는데, 거기 무슨 뜻이 있느냐? 동쪽은 해가 뜨는 데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근데 우리 공부는 ‘동쪽이나 서쪽이나 둘이 아니니라.’ 이랬습니다. 왜? 다른 혹성에 가 보면 서쪽이 동쪽이니까요. 그러니까 좁게 생각을 하지 말고 넓게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니 동쪽이 서쪽이고 서쪽이 동쪽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방향을 두는 거는, 법당을 넓고 높게 두어야 우리에게 좋겠으니까 그냥 그렇게 하는 거고, 또 우리 동양에서는 동쪽을 향해서 해야 되겠으니까 그럽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여기대로 환경에 맞게 용도에 따라서 쓰는 거고, 저기 가면 저기에 맞게 따라야 하고 그런 것이니 유의 법, 무의 법, 이 도리를 혼란하게 하거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께 오순도순 이야기도 해 드리고 착한 행동으로 효도한다면 자식들도 차차차차 착해져서 효도할 줄도 알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또 모든 부처님 법을 알게 될 겁니다, 아마. 그러니 꼭 모든 깨달음을 자기로부터 깨달을 수 있게 하십시오. 오늘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