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길을 가다’- ⑧ 만해 스님과 선학원

1910년대 임제종 운동 씨앗으로
1921년 안국동에 선학원 창립
“제대로 된 韓불교 만들자” 주장
만해, 선우공제회 이사 역임 기여
선학원 설립조사 7인 영정 봉안

▲ 현재 서울 종로 안국동 40번지에 자리잡은 선학원 중앙선원의 전경.
서울 종로 안국동 40번지 선학원 중앙선원. 선학원 중앙선원 건물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습만 달라졌을 뿐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법인법을 놓고 조계종과 마찰 중에 있지만, 근현대 선지식들 대부분이 선학원 이사장을 지냈을 정도로 선학원은 한국불교사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다.

선학원은 1921년 5월 15일 서울 간동포교당(諫洞布敎堂) 보살계 계단에서 설립의 서막을 열었고, 그해 8월 10일 기공을 거쳐 4개월 뒤인 11월 30일 준공됐다.

선학원이 건립되기까지 만해 스님의 역할은 컸다. 만해 스님과 선학원의 관계는 선학원의 직접적인 창설배경이기도 한 임제종 운동부터 짚어봐야 한다.

1910년 10월 6일 굴욕적인 한일불교협약인 ‘조동종 맹약’이 조선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 승려 사이에서 체결되고, 다음 달인 11월 6일 이 맹약에 반대하며 임제종 운동이 전개됐다. 맹약의 핵심은 당시 한국 불교계의 대표기관인 원종(圓宗)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의 고문을 위촉하고,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조동종무원이 필요하여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할 때는 조동종무원이 지정하는 사찰을 숙소로 정하여 포교 및 교육에 종사케 할 것”이라는 굴욕적인 조항도 있었다.

만해 스님은 훗날 임제종 운동에 대해 “조선불교의 부흥을 도모할 때 원종(圓宗)의 맹약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단을 별도로 세워야 원종을 자멸케 함이 첩경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한국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사찰령 반포를 앞두고 있었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2년 서울 대사동의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 간판은 철거됐고, 만해 스님은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제종 운동을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은 선학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남전(1868~1936)·도봉(1873~1949)·석두(1882~1954)스님이 설립자금을 모았고, 임제종운동에 참여했던 만해·용성·만공스님 등은 설립이념을 민족불교의 확립과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뒀다.

만해 스님은 선학원 설립 이듬해 쇠락한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에도 관여했다.

선종의 부활과 자립 활로를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1922년에 문을 열었다. 본부를 안국동 선학원에 두고 서무부, 재무부, 수도부의 3부를 중앙에 두고, 백양사, 마하연, 정혜사 등 각 사찰에 지부를 두어 유대를 긴밀하도록 했다. 당시 만해 스님은 수도부(修道部) 이사소임을 맡기도 했다.

참고로 1924년 무렵 선우공제회의 통상회원이 203명과 특별회원 162명을 합하여 전체 365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었던 것을 보면 초기의 공제회는 그 창립취지와 운영의 투명성으로 인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불과 1~2년 만에 회원 수가 급증하고, 재정기반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가 교단 내부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불교 안위와 결부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초기 선학원의 모습
이 같이 만해 스님은 선학원 태동부터 건립 이념까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는 현재 선학원 2층 법당을 가면 알 수 있다. 이곳에는 7명의 설립조사와 1명의 중흥조가 모셔져 있다. 바로 만해 용운(萬海龍雲, 1879~1944), 만공 월면(滿空月面1871~1946), 성월 일전(惺月一全, 1866~1943), 도봉 본연(道峯本然, 1873~1949), 남전 한규(南泉翰奎, 1868~1936), 석두 보택(石頭寶澤, 1882~1954),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초부 적음(草父寂音, 1900~1961)이다.

이 같은 선지식들이 한데 모여 선학원을 만든 배경에는 민족불교의 기치를 바로 세우는 것 이외에도 한국불교의 선(禪)을 바로 잡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불교의 선 수행의 상황은 만해 스님의 논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적나라하게 찾을 수 있다.

“지금에 이르러 참선을 한다는 자 10인을 놓고 볼진대 진정한 선인(禪人)은 불과 1인이며, 입과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이 2인, 나머지 7인은 모두 밥 먹기 위해 앉아있는 자이거나 아니면 멋도 모르고 졸고 있는 자가 대부분이다.”

보리심을 구할 강원도 마찬가지였다. 최기정의 묘사에 따르면 1920년 당시 전통 강원은 용맹정진의 치열한 구도의 열정은 사라져버리고 무기력한 학인들만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지금이라고 전문 강원(講院)이 없는 것은 아니요, 땔감을 지고 스승을 쫓는 학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강당이라는 그 곳에는 쓸쓸하고 적막하기가 찬바람 부는 빈들과 같이 아무 화기애애한 맛을 발견할 수 없이 그저 기계적인 것 같으며, 강학을 하는 학인들도 아무 용기 없이 그저 두 어깨가 처지고 마치 도살장에 들어온 소처럼 낙오의 한숨만으로 일종의 밥을 구걸하는 나그네요, 낭만적이고 이름만으로 허송세월하려는 것은 통계수자가 증명하는 바이다.

당시 불교계의 혼란한 상황에서 선학원의 창건상량문(創建上樑文)도 “세상의 이치와 인심(人心)이 점차 복잡하여 교리와 종지의 선전이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 각종 종교가 번성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불자들이 책임감을 절감하고 금강심(金剛心)의 서원을 함께 세운지 수 십 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고 했다.

선학원의 설립조사들이 사찰령에 예속되지 않은 기관을 설립하고자 한 것은 수좌들의 수행과 그 결집으로 선풍진작과 대중화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그 결실은 궁극적으로 민족불교의 회복과 한국불교의 정체성 구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선학원 설립의 취지와 이념아래 만공 스님은 소위 일본 중처럼 변질되지 않고 ‘우리만의 선방(禪房)’ 마련을 천명했고, 성월 스님은 1912년 서울 인사동의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헐어 약간의 목재와 기와를 보탰다. 여기에 남전·도봉·석두 스님이 막대한 정재(淨財)를 출연하였다. 당시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부인 구지월화(具智月華)를 비롯하여 왕실의 상궁나인들까지도 기꺼이 안주머니를 털었다.

선학원의 탄생 배경에 대해 오경후 선학원 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은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가 풀린 이후 거의 20여 년의 시기 동안 한국 불교계에 불어 닥친 질곡의 산물”이라며 “설립의 직접적인 취지는 “사찰령과는 관계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하는 선방(禪房)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선학원의 설립은 이 시기동안 진행됐던 일본의 한국불교 지배와 일본화, 한국불교의 친일화에 대항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며 “구체적으로는 민족불교의 정체성을 천명했던 임제종운동의 계승이었고, 한국불교 지배를 위한 사찰령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출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만해 스님은 유심사(唯心社)를 얻기까지 백담사와 선학원에서 번갈아 가며 주석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이 회동서관에서 간행되었을 때는 선학원의 6대 이사장 석주 정일 스님이 인쇄부터 책 만드는 일까지 도와드렸다고 전한다.

또한 1926년에 만해 스님은 6.10만세운동으로 선학원 근처에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기도 했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민족진영과 공산사회주의자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1927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반일민족유일당운동단체가 바로 신간회(新幹會)다. 만해 스님은 신간회 창립 당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고, 7월 10일에는 경성지회장에 임명됐다.

석주 스님은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사회정치단체였지만, 결사체(結社體)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면서 “만해 스님의 경성지회장 시절 선학원에서 회의를 많이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학원은 한국불교를 있게 한 주춧돌이었고, 이에 대한 토대를 만든 것은 만해 스님을 비롯한 근현대 선지식들이었다. 법인 관리 감독과 사찰 재산권을 놓고 갈등을 이어가는 후학들을 보면 선지식들은 뭐라 하실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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