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참회진언

 ‘신구의’ 삼업의 신비성
합일 되는 것이 ‘삼밀가지’
정신·육체·음성 완전히 통일
몸뚱이가 부처를 이룬 지경
불멸 후 1천년대 비밀불교는
진언·만다라 등에 진리요약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법문은 진리를 일러 준다지만 실상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고 장황되어 자칫하면 후학들이 지엽말단에 얽매어 참 소리를 놓쳐 버리는 것이 일쑤다. 법문을 통해 누가 일러 주어서 아는 것 보다는 가만히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서 법문 이전의 진리를 터득하는 그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아는 길이 아닌가.

벌써 이렇게 저렇게 해라 하는 소리 한번 일러서 안 듣고, 두번 일러서 그만이고 세번 씩이나 일러야 하게 되면 큰 소리가 나게 마련이고 재미 적은 것이다. 큰 소리 나기 전에 첫마디에 선뜻 알아차리고 얼른 시키는 대로 해버린 그렇게 된 형상이 바로 아래 아‘ㆍ’자인데 실상은 이것조차도 나기 이전에 그때 법문을 알아듣는 그것이 가장 완전히 아는 것이란 말이다.

불교에서는 진리의 몸뚱이,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 불이 진리의 진리, 다시 말하여 진리 자체를 이야기하는 그 지경을 ‘ㆍ’자로써 설명한다. ‘ㆍ’자도 나기 이전에 비로자나 불을 알았다면 그야말로 가장 잘 안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큰 소리치고 무엇이 어떠니 해도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없다. 불교의 공안(公案) 가운데, 부모 낳기 이전의 아(我)라는 것이 무엇이냐, 부모에게서 이 몸뚱이를 받기 이전에 그때 ‘나’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를 알면 가장 잘 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경전(經典)을 일체 음성의 기본인 ‘ㆍ’자도 나기 이전 그때 것을 알았다면 크게 잘 안 것이다. 이를 일컬어 ‘ㆍ’자의 본불생관(本不生觀)이라고 한다.

이것은 밀교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로써 법신(法身) 비로자나의 성불(成佛)하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 또 하나 재미 있는 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이야기다. 몸으로 한 노릇, 입으로 한 말, 뜻으로 한 정신 작용, 이런 것이 우리들 범상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각기 분리되어 제멋대로다. 통일되어 있지를 않다.

그러나 이 몸과 말하는 음성과 우리의 정신, 이 세 가지의 신비가 한데 합일되었을 때 이를 일컬어 삼밀가지(三密加持)라고 한다. 몸에는 신밀(身密)이, 입에는 구밀(口密)이, 뜻에는 의밀(意密)이 있다. 밀(密)이란 비밀이라는 뜻이다. 몸의 몸짓의 신비성, 소리의 신비성, 정신 작용이 자아내는 온갖 신비성, 신기로운 이 지경이 한데 합일되는 것을 삼밀이 가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음성으로써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삼밀이 가지한다. 그리하여 삼밀이 가지하는 이것이 곧 이 육신으로서 성불(成佛)하는 지경이다. 삼밀가지(三密加持) 하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이다. 곧 이 몸뚱이가 부처를 이룬다.

모든 경전 가운데 그 경전의 안목이라고 할까, 이의 가장 근간이라 하는 것이 이 불멸 후 천년 대에 이르러 비밀불교(秘密佛敎)라고 하여 이때부터는 경전의 주요 안목이 총지(摠持)에 있었다. 다라니(陀羅尼)가 경의 총안목처럼 되었다. 흡사 그물의 한 코를 잡아당기면 천코 만코가 주르르 딸려 오듯한다고 하여 이를 총지라고 하였다. 이 총지는 실상인즉 알고 보면 요즘 현대 사회에도 흔히 적용되고 있다. 반드시 불교의 영향이랄 수는 없을는지 모르나 재미 있는 대목이다.

현대의 정치 사회에서는 캐치프레이즈라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한 부문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선거ㆍ투쟁ㆍ그 밖에 무슨 큰 일을 하려고 들때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캐치프레이즈를 내어 걸게 된다. 구 자유당 집권 당시, 대통령 선거전에 있어 야당에서는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구호를 외쳐댔다. 그러자 자유당 측에서는 이에 반대되는 구호를 만들어내어 즉각적으로 응수했다. 정객들은 말 만들어내는 건 하여튼 잘 하는 모양인데 ‘갈아봐야 별 수 없다’이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불교의 입장에서 보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주문(呪文)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보면 현대인들은 주문 비슷한 소리에 귀가 쭈삣하여 얼른 알아듣기도 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 진언(眞言)을 일컫고 주문을 외우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므로서 커다란 신비에 접한다느니 보다도 이것이 짧은 몇 마디 말 가운데 진리의 중대한 내용을 요약하여 간직하였고 그러므로 이를 외우면 그 진리를 성취할 수 있고 또 중생에게 성취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언을 다라니라고 하지만 비슷한 말로 만다라(曼陀羅)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원륜(圓輪)이 구족(具足)하다는 것을 이름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이 다솔사(多率寺)라는 절엔 법당이 있고 화목(花木)이 어우러져 뜰을 이루었고 법당 안에는 그림이 있고 처마에 조각을 하여 단청(丹靑)을 입혔고 하여 절 전체가 짜임새 있게 되어 있는 것을 만다라라고 한다는 소리다.

경주의 석굴암은 매우 귀중한 만다라다. 짜임새 있는 거룩한 수련도량(修練道場)이라는 뜻이다. 이래서 무엇으로 번역할 말이 없으므로 원어대로 만다라라고 하는 것이다. 원만한 수레 바퀴가 구족하고 원륜구족(圓輪具足)이라느니 또는 원만한 제단(祭壇)이니 번역해 보아야 신통치 않다. 금강산(金剛山)은 풍경이 절승(絶勝)이고 아주 짜임새 있는 일대 자연 만다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옴살바 ?다모디사다야 사바하’라는 주문의 뜻은 보통 가르치지 않는 것이며 이에 대한 전수(傳受)는 일정한 밀교의 의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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