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길을 가다- 종로 계동 43번지와 <유심>

1918년 9월 종로서 <유심> 창간
불교지면서 문예공모 등 특이 편집
만해 문학 잉태·3.1운동 전위지
민족의식 고취 기고… 3호로 폐간

▲ 현재의 종로 계동 43번지. 만해 스님이 <유심>을 발간했던 유심사(唯心社)는 이제 게스트하우스 ‘만해당’으로 바뀌었다. 주인이 바뀌면서 폐가로 전락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인근 주민 이유리 씨가 장기 임대해 게스트 하우스로 변화시켰다.
한국의 개화기 잡지는 개화 운동의 전위로서 근대적 사상 확립과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불교 역시 잡지 등 출판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소식을 전하고 근대적 포교의 도구로 활용했다.

하지만 일제가 한국을 침탈한 이후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한국인의 눈과 입을 원천봉쇄하는 암흑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 기간의 불교 잡지와 언론으로는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조선 불교계> 등 몇몇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17년 오세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만해 스님은 1918년 종로 계동 43번지에 유심사(唯心社)를 세운다. 이미 <정선강의 채근담>, <불교대전> 등을 발간하면서 출판?언론 사업에 눈을 뜬 만해 스님은 이제 불교 교양 잡지에 도전한다. 그리고 창간한 잡지가 <유심(唯心)>이다.

국판 60여 페이지의 <유심>은 불교 교양지를 표방했다. <유심> 창간호는 1918년 9월에 발간하고, 제2호는 그해 10월, 제3호는 12월에 잇달아 발행된다. 하지만 <유심>은 일본 총독부의 탄압과 3.1운동 준비로 제3호로 중단된다.

그렇다면 만해 스님은 왜 잡지 <유심>을 발간했을까. 이는 창간사에 해당하는 ‘처음에 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배를 띠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 바람이 굳셈이랴. 서리 아래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 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나니라.<중략>가자 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

▲ 유심 창간호 내지. 창간사인 ‘처음에 씀’이 수록됐다.
배를 띄워서 매화를 찾겠다는 창간사에서 우리는 만해 스님이 <유심>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매화’는 스님이 그리는 꿈이고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심>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만해 스님이 썼지만 박한영, 백용성, 권상로, 이능화, 김남전,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도 주요 필자로 참여했다.

실제 박한영은 ‘타고르의 시관’을 만해 스님은 타고르의 ‘생의 실현’을 번역하기도 했다.  3.1운동의 가장 선봉에 섰던 최린은 <유심> 창간호에 ‘시아수양관(是我修養觀)’이라는 제하의 글을 썼으며, 육당 최남선은 ‘동정(同情)바늘 필요(必要)잇는 자 되지 말라’ 등 청년의 수양과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만해 스님 역시 △조선 청년 수양 △고통과 쾌락 △청년의 수양 문제 △가정 교육이 교육의근원이다 △과학의 연원 △자아를 해탈하라 △항공기 발달 소사 등의 글을 쓰기도 했다. 모두 시대정신이 적절히 나타난 글들이다.    

또한 만해 스님은 <유심>을 단순히 불교 교양지 아닌 종합 잡지로 만들 생각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심>에는 특이하게 ‘문예공모’ 코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심> 제3호에는 ‘당선 문예란’을 통해 그동안 응모한 결과를 발표하고 시상했다. <유심>은 매호에 걸쳐 보통문, 단편소설, 신체시, 한시 등 4개 분야의 문예 작품을 현상 모집해왔다.

만해 스님은 당시 학생 소설 ‘고학생’을 쓴 종로 견지동 118번지의 방정환, 평양 창전리의 김순석을 수상자로 선발했다. 방정환에게는 1원 50전의 상금이, 김순석에게는 50전의 상금이 돌아갔다. 선외 가작 당선자로는 김형원, 박중빈, 철아, 소파생, 이형준, 이영재, 어효선, 김창진, 이중각 등이 선정됐다.

이들 모두 훗날 한국 사회와 문단에서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 성장한다. 이들의 성장 계기를 만해 스님이 발간한 <유심>이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해 스님도 <유심>을 자유시를 실험하는 장으로도 활용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심(心)’이다. ‘심(心)은 심이다’로 시작해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로 끝나는 이 시는 ‘님의 침묵’ 이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되며 만해 스님의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유심>은 3.1 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3.1 운동 핵심 인사인 최린,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현상윤 등을 필자와 동지로서 인연을 맺게 한 역할을 <유심>이 톡톡히 했다. 또한 당시 언론에 반드시 등장하던 총독부 관리의 글을 배제해 민족 주체성을 확고히 보여준 면을 봐도 <유심>의 근간에는 ‘민족 운동’이라는 화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만해 연구가인 전보삼 한국박물관협회장(남한산성 만해기념관장)은 자신의 논문에서 <유심>을 3.1운동의 전위지라고 평가했다.

전 회장은 “만해 스님이 <유심>을 민족사상지이자 3.1운동 전위지로 발전시키려 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유심>의 종간 배경이 3.1운동과 직결돼 있었다는 점을 직시할 때,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한 사상지로서의 위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해 스님은 <유심>의 언론활동을 통해 세계 정세의 흐름과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3.1 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재석 동국대 교수는 <한국근대문학지성사>에서 <유심>이 만해 스님의 문학을 잉태시킨  계기로 봤다.
고 교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중단되고 말았지만, <유심>은 만해 스님 문학의 출발점”이라며 “1910년대를 대표하는 불교 지성들과 민족 진영의 지성들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는 이념적 좌표를 수양주의에서 찾았던 잡지”라고 문학사적 의의를 평가했다.

발간처 종로 계동 43번지 유심사
일반 가옥 거치며 폐가 위기까지
현재 게스트하우스 ‘만해당’ 변모
길손들 만해 채취 느끼며 ‘감흥’ 


▲ 현재의 종로 계동 43번지. 만해 스님이 <유심>을 발간했던 유심사(唯心社)는 이제 게스트하우스 ‘만해당’으로 바뀌었다. 주인이 바뀌면서 폐가로 전락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인근 주민 이유리 씨가 장기 임대해 게스트 하우스로 변화시켰다.
통권 3호에 그친 <유심>이지만 문학사적, 독립운동사적 가치는 충분하다. 종로 계동 43번지 유심사도 역시 그렇다. 실제 유심사는 불교계 3.1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불교계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2명밖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불교 종립학교인 중앙학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제 2월 28일 밤 만해 스님은 거처 유심사로 학생들을 급히 불러모아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3·1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의 배포를 부탁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신상완·백성욱·김상헌·정경헌·김대용·오택언·김봉배·김법린 등은 중앙학림 안에서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회’라는 모임을 운영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렇게 불교와 독립운동 면에서 모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심사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제대로 된 표지판도 없었다. 실제 2012년까지 ‘유심사’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종로 계동 43번지가 아닌 58번지 우물터에 설치돼 있었다. 이후 일간지 보도와 비판이 이어지자 표지판은 본래 자리를 찾게 됐다.

현재 종로 계동 43번지 유심사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만해 스님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만해당’이라는 이름의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유심사는 한동안 일반 가옥으로 사용되다가 낡아 매물로 내놨던 것을 다른 일반인이 재테크를 목적으로 구입했다. 그 이후 방치되던 것을 인근 주민이었던 이유리 만해당 대표가 장기 임대해 게스트 하우스로 꾸민 것이다.

불자인 이 대표는 만해 스님의 거처였던 곳이 마냥 방치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2010년 유심사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거의 폐가 상태였습니다. 제가 종로구청에서 듣기로는 유심사가 매물로 나왔을 당시 조계종에 구매 의사를 타진했지만, 여러 이유로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만해 스님이 거처였던 곳을 그냥 방치할 수 없었죠. 이왕이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면서 만해 스님이 이곳에서도 무엇을 했는지 알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를 열게 됐습니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청년 교양 증진을 위한 잡지 <유심>을 발행했던 ‘유심사’는 이제 ‘만해당’으로 변해 세계 각국의 길손을 맞고 있다. 만해당 내부 기둥에는 만해 스님의 ‘오도송’이 편액으로 걸려있다. 각국의 길손들은 만해 스님이 눕고, 먹고, 사색했던 그 집에서 하루의 여정을 정리하며 스님의 향훈을 느낀다. 

세상은 변화한다. 만해 스님의 삶과 정신을 알리는 것이 아무도 찾지 않는 기념관에 ‘박제된 기억’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종로 계동 43번지 만해당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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