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참회진언(懺悔眞言)

삼교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을 바친다는 것

공자(孔子)의 도와 다를 바 없다.

 

유불도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민족은 거룩한 삶 실천

화랑의 풍류는 현묘한 ‘도’

 

옴 살바 다모디사다야 사바하(三遍)

참회진언의 참회는 앞에서 말하였으므로 더 언급할 필요는 없거니와, 진언에 대해서는 첫 대목의 정삼업진언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겠다. 좀 더 철저하게 알아두어야 한다.

진언(眞言)은 이를 번역하면 우리말로 주(呪), 혹은 주문(呪文). 범어는 만다라 또는 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즉설주왈(卽說呪曰) 따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언은 모든 진리를 다 가지고 있는 말이라 하여 총지(摠持)라고 풀이한다. 또 우주의 신비성을 대하고 감동하여 속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소리다. 풍송(諷誦)이라고 한다. 아금풍송(我今諷誦)이 그것이다. 구분경(九分經)에서는 이를 우다나(優陀那)라고 하였으며 혹은 누구 묻는 이도 없는데 스스로 흥겨워 대자연을 설파했다고 하여 이를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진언은 일종의 즉흥시(卽興詩)라고 보아 틀리지 않는다.

불교는 음성에 대해서 매우 중요시한다. 음성은 서양의 종교도 중시하는 바로 구약성서(舊約聖書) 창세기에서도 그 허두에 이르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어’하였는데 말씀이란 곧 음성이다. 음성에 따라서 그것이 이르는 대로 빛이 있으라, 땅이 있으라, 나무가 있으라……하니 그대로 만물이 하나 하나 다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로고스라고 하는데 중국의 도(道)라는 말과 같다. 중국에서도 공자왈(孔子曰), 맹자왈(孟子曰), 하는 왈(曰)자는 가라사대인즉 말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성이 특히 중요시되었다.

고대사(古代史)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친근감을 주는 대목은 화랑(花郞)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훌륭한 제도가 우리의 조상들에 의해 옳게 보유되지 못하였지만, 고운 최치원 선생(孤雲 崔致遠 先生)께서 화랑의 생활을 설명한 글이 있어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도의 이름을 풍류(風流)라고 한다’고 하였다. 풍류는 부루라고 읽는 것이 옳다. 부루도 인즉 유ㆍ불ㆍ선 삼교(三敎)를 두루 포함하고 있었으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다 포섭하여 교화하였다.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였다.

삼교는 무엇인가? 집에서는 어버이님께 효성(孝誠)을 다하고 나아가 국가에 대하여서는 충성(忠誠)을 바친다는 것은 노(魯) 나라 사구(司寇), 즉 공자(孔子)의 도와 다를 바 없고, 착한 일을 모두 하면서도 그런 표를 내지 않는 것, 내가 이런 선행(善行)을 했니라 하는 표를 내지 않는 것, 요새 PㆍR시대라고 하여 자기 선전을 잘 해야 세상이 알아 주는 것이라 하지만 실천하고도 그런 것 같지 않은 태도를 갖는 것은 주로 주주사지종야(周柱史之宗也), 그러니까 노자(老子)의 정신을 체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으며 착한 일만을 실천하므로 이를 즐긴다 하는 그것은 서천서역국(西天西域國)의 실달타태자(悉 達多太子)의 교리와 같았다.

유불도(儒佛道)의 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원시 생활을 개량한 것 같이 알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외국의 사상이나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들 자신이 이미 그런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 거룩한 생활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공감을 얻어 한층 더 받아들이기가 용이하였다.

화랑은 상마도의(相磨道義)하였다. 서로 만나 학술을 토의ㆍ연마ㆍ강론하였다고 하니 학술을 강의하는데는 물론 언론이 있고 음성이 있었을 터이다. 음성에 대하여 더욱이 상열가악 (相悅歌樂) 이라고 하였는데 노래와 음악으로 예술을 즐기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원유산수무원부지(遠遊山水無遠不至)라고 하여 어느 지방이고 두루 다니어 인정과 지리 등, 모든 물정을 살피어 잘 알아서, 지방의 소리 즉 실정에 맞추어 정치를 하였다. 이렇듯 보아올 때 우리는 고대사상(古代思想)에 있어서 음성이 얼마나 중요시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는 베다(吠陀) 시대부터 음성을 퍽 중요시하였다. 바라문 교도(婆羅門 敎徒)가 베다의 성전(聖典)을 소리 내어 읊었는데 그러면 브라흐만이 내린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이 짚인다는 것이다. 소리 내어 읊는 동안에 브라흐만이 강림하여 우리 인생을 보살펴준다는 그런 신성(神聖)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도철학에서는 성명(聲明)이라는, 소리를 밝힌다는 부문이 있다. 성명은 어학문법음악의 기록인 문학 등으로 이루어진 학문이다. 그러니까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이 된다. 여기서는 ‘언어도 음악이다’라고 생각되고 있다. 산스크리트를 읽으면 빛나는 말, 화어(華語)며 아담한 말 아어(雅語)라는 뜻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성스러운 경전을 조금도 더럽히지 않고 신성하게 쓰기 위하여 문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운율학적으로도 잘 만들어진 글이라는 것이다. 성전의 글은 그대로 읽어도 운율이 나오게 되어 있다.

‘삼보(三寶)에게 돌아갑니다’하는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 하는 말을 법어 소리로 하면

 

붓담 상강 갓자아미 달만 상강 갓자아미

상강 사르남 갓자아미.

이렇게 된다. 법음은 이렇듯 운율학적으로 썩 유창하게 들린다.

이것으로도 인도에서는 원래부터 음성을 중요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음의 경전을 읽다가 한문이나 우리 글로 된 것을 보면 운율이 없고 딱딱해서 비단을 뒤집어 놓은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번역할 때 음성을 소홀히 하여 문체(文體)가 아주 산문적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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