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불광사 일요법회-본공 스님(불광사 주지)

<부처님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본공 스님은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긴다는 각오로 끝없이 다짐하는 수행정진이 그 주제였다고 했다. 수행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에 있었다. 고멸성제(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본공 스님이 3월 15일 불광사에서 한 법문을 들어본다.>

▲ 본공스님은1991년 범어사에서 출가해 1996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했다. 1998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99년 군종장교 육군대위에 임관됐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선수촌 불교관 지도법사를 지냈으며 2004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다. 문경 봉암사, 예산 정혜사, 양산 통도사, 괴산 공림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2006년 영국 런던 연화사 주지를 역임했다. 2007년부터 불광사 총무와 지도법사를 지내고 현재 불광사 주지다.

괴로움의 소멸은
집착 범위에서 벗어나
넓게 보고 얽매이지 않는 것

“게으름의 때를 벗기고
애써 닦음으로써
고통의 화살을 뽑으라”

오늘은 괴로움의 소멸, 고집멸도에 대해 이야기 할까 합니다. 사성제 다들 아시죠. 정규 교육과정에서는 사성제, 팔정도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떠나 워낙 뜻이 고귀하기 때문이죠. 성경구절을 아냐고 물으면 머뭇거리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불자가 아니더라도 ‘고집멸도’ 정도는 알죠. 고집멸도를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집합시키고 소멸시킴으로써 도를 얻는다.

여러분들은 고통을 집합시켜보셨나요? 어떤 것이 고통입니까. 태어나는 것부터가 고통입니다. 아이들이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이에요. 아기들은 태어난 후 2달 정도 감각이 없다고 해요. 바늘로 찔러도 모를 정도로요. 그러나 어머니의 심장박동소리를 들으며 뱃속에 열달 동안 있었는데 태어나고 보니 갑자기 익숙한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거죠. 아기들에게 무의식중에 갑자기 공포심이 엄습합니다.

살아가며 겪는 고통이 많죠. 학교 공부하랴, 영어단어 외우랴, 외모 단장하랴 이런 것도 고통입니다. 박복하니까 수술을 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돈을 버는 고통도 있지만 돈을 쓰는 고통도 있어요. 늙어가며 병드는 것도 고통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가서는 안 될 곳이 두 군데 있다고 합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교도소와 병원입니다. 병원은 몸에 병이 들어서 가는 곳이지만 교도소는 정신에 병이 들어 나쁜 행동을 하게 돼서 가게 되는 곳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참 큰 복입니다.

앎으로 인해 고통이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많은 정보를 취함으로써 고민거리가 더 생기게 되는 것이죠. 저 역시 얼마 전 한의원에 가서 맥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괜스레 신경이 쓰이게 되던데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이 같은 고통을 어쩔 수 없이 안고 끌고 갑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육신이 다 됐다라는 뜻으로 쓰이긴 하지만 불교적으로 보면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반은 뭔가에 대해 이뤄짐, 성취된다는 바라밀을 의미합니다. 보시바라밀은 무슨 뜻입니까. 보시라고만 해도 되는데 말이죠. 여러분 남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해 왔을 것입니다. 예쁘게 치장하는 것도 보시요, 밥을 챙겨주는 것도, 가난한 이를 도와주는 것도 다 보시입니다. 그러나 보시바라밀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준 것 조차도 잊어버리는 ‘완전한 줌’을 의미합니다. 뭔가 댓가를 바라거나 하는 것은 진정한 보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족에게 밥상을 차려줄 때 자식과 싸웠거나 하면 차려주기가 싫을 때가 있죠. 그러나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밥상을 차려주기는 하지만 기분이 나쁠 때가 있어요. 이 같은 경우는 보시에서 끝나버린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보시에 대한 완성으로서 ‘집착과 걸림없이 네게 이걸 베푸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 또한 이에 머물지 않고 계율 등을 완전히 통달해버리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면 안 되는데’하면서 안하는 것과 거짓말이라는 용어를 모르면서 거짓말을 안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바라밀은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를 이릅니다.

깨달음과 고에 대해 설한 반야심경의 대의(大意)는 첫 구절에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할 적에 오온이 공함을 알아서 일체의 고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대의입니다. 나머지는 이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현장 스님은 굉장히 똑똑한 분이셨습니다. 인도의 방대한 경전을 번역하다 보니 한꺼번에 다 전할 수는 없겠다 싶어서 반야심경을 기술했고 그 중에서도 앞 쪽에 핵심을 마련해놨죠.

‘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할 때’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혜에 꽂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묻혀버리는 것이죠. 지혜 속에 완전히 몰두하다 보니 오온이 공함을 아는 것입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합니다. 색의 세계를 보는 것은 눈이죠. 그러나 눈을 뽑아 놓는다 해서 눈이 볼 수 있습니까? 귀를 잘라놓는다고 해서 귀가 듣나요? 눈으로 본다는 것은 눈에 들어온 정보가 시신경을 통해 뇌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 받아들여야 본다는 것이 성립되겠죠. 그런 후 머릿속으로는 상상을 합니다. 상이죠. 그 다음에 행동이 나오면 그것이 의식이 됩니다. 짧게 이야기했는데 색수상행식, 이 다섯가지가 공함을 알면 집착에서 넘어서게 됩니다. 일체 고에서 건너가는거죠. 해탈의 언덕으로 건너갔다는 도피안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집착을 하는 이유는 인연고리 때문입니다. 우리집 아이가 맞고 왔다 했을 때 여러분들은 당장이라도 자식을 때린 아이를 쫓아가려고 합니다. 앞집아이가 똑같은 경우를 당했다하면 그런가보다하고 넘기죠. 집착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넓게 보고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데 해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체의 번뇌를 끊어 해탈을 성취해 육신이 남은 상태인 유여열반이 있고, 일체의 번뇌와 육신조차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이 있습니다. 유여열반은 탐욕이나 어리석음 등과 같은 모든 번뇌망상이 제거될 때 증득하게 되는 열반인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증득하셨을 때 도달하신 열반을 가리키지요. 무여열반은 세존께서 입멸하실 때 육신과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해소됐음을 일컫습니다. 열반은 살아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사람이 뭔가 이뤄낼 수 있다는 자긍심을 만들어주는 종교입니다. 어떤 얽매임도 없는 상태, 신조차도 없는 상태, 인간 스스로가 뭔가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일깨워준 것이 부처님의 일생입니다. 부처님같이 산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다 내려놓고 고생을 해가며 길에서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부처님같이 사는 것이 참 영광스런 삶이죠.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부처님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 불자들의 인생입니다. 부처님은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를 가지고 인생을 살다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부처님의 열반송하면 ‘자등명 법등명’이 있죠. 그러나 이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훨씬 이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무상하다
시생멸법(是生滅法) 바로 생멸법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생멸이 소멸하여 그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다.

부처님 또한 모든 것은 무너지고 무상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이 영원할 뿐,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변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우리에게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현재를 이루어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전날 피곤하게 하루를 마감했거나 하면 새벽예불을 할 때 못 일어날 때가 있어요. 그런날이면 스스로 부끄러워지고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약해진건가 하고 미안해집니다. 기력이 다 되어가나 싶을 때가 있지만, 공부는 정말로 힘들게 해야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정진함에 있어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느라 기력을 빼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가 공부하고 싶을 때 못하게 되니까요. 부처님같이 정진하는데 힘쓰는 것이 최고의 일 아닐까요.

불자님들, 다들 좌우명 가지고 있으신가요? 불자로 살아가는데 있어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공부하겠노라’ 하는 것 말이죠. 수행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좌우명을 만드시기바랍니다. 부처님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법구를 들려드리죠.

바라건대 피부와 힘줄과 뼈만 남아라. 내 몸에 살과 피도 말라붙으라. 대장부의 끈기와 대장부의 노력과 대장부의 정진으로만 이룰 수 있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어떻게 남겨둘 힘이 있으랴.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도 새겨들을만합니다. 함께 암송하며 각자 좌우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 받는 이에게 잠이 웬말인가.

일어나라. 앉아라.
평안을 얻기 위해 일념으로 배우라.
그대들이 게을러서 그 힘에 굴복한 것을
죽음의 왕이 알고,
그대들을 헤매지 못하도록 하라.

신과 인간은
애착에 얽매어 무엇인가를 갖고자 한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라.
짧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짧은 세월을 헛되이 보낸 자는
지옥에 떨어져 슬퍼하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때와 같은 것,
때는 게으름 때문에 생긴다.
애써 닦음으로써,
또한 밝은 지혜로써
자기에게 박힌 화살을 뽑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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