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보름 발원 위해 밀랍초 공양

추사가 원한 것 ‘도반과 차담’

추사의 이 편지에는 ‘호의 초의 연조(縞師 草師 聯照)’라는 구절이 있다. 바로 호의와 초의 두 스님에게 보낸 편지인데, ‘연조(聯照)’란 나란히 살펴보라는 뜻이다.

실제 이 편지를 어느 해에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편지의 내용 중에 ‘상원(上元)’이라는 말이 보인다. 상원은 바로 정월 대보름날을 의미한다. 이런 단서를 통해 이 편지는 정월 대보름날에 보낸 것임은 분명한데, 어느 해에 보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추사는 새해를 맞아 이미 보름이 흘러갔지만 얼마동안 초의와 호의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듯하다. 추사는 이들의 소식이 궁금해 ‘새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스님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 ‘아프고, 허탈’하단다. 그러기에 이런 마음이 ‘어찌 사라지겠느냐’라고 반문하였으니 멀리서 벗을 그리는 정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가 ‘수행이 길하고 상서로운지 궁금하고 또 염려가 된다’는 말의 진정성은 지기(知己)와 나누는 살가운 인정이다. 아마 이 편지는 추사가 제주 유배 시절이나 아니면 북청에 있을 때 보낸 편지라 추정된다. 자신의 처지를 ‘속인의 객지 상황은 더욱 따분하고 지루한데, 또 시간만 늘어지니’라고 말한 대목은 이러한 사실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럼 추사가 호의와 초의에게 보낸 편지의 사연을 살펴보자.

 

호의스님과 초의스님, 나란히 보세요.

새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스님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프고, 허탈한 마음이 어찌 사라지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정월 대보름인데 (두 스님들은)모두 수행이 길하고 상서로운지 궁금하고 또 염려됩니다. 편안치 않은 것에 매달린 것이 더욱 심하여 속인의 객지 상황은 더욱 따분하고 지루한데, 또 시간만 늘어지니 어찌 하겠습니까. 종이 1속과 밀랍초 2대를 보냅니다.

오늘 저녁 모든 부처와 관세음보살, 준제보살 상전(相前: 불전)에 불을 켜시고, 무량수경을 읊어 멀리(있는 나를 위해) 발원을 축원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생각건대 응당 가까운 날에 지팡이를 짚고 한번 왕림하시기를 더욱 깊이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등잔불 아래서 어지럽게 날려 썼습니다. 이만. 정월 대 보름날 새벽에 연생(蓮生). 김 10톳을 보내니 나누어 수령하심이 어떨지요

(縞師 草師 聯照 新年尙未聞梵音 茹?何已 卽今上元僉禪履吉祥 奉溯且念 懸耿者深 俗人客況 益覺支離亦足髮華 奈何 紙一束蠟燭二對奉 似今夕以爲燈於諸佛觀音準提相前 誦無量壽經 遙祝發願如何 想應從近振錫一枉 深自企企 燈下胡草 不式 上元曉頭 蓮生 海衣十吐送去 分領如何)

추사는 두 스님들에게 김과 밀랍초를 보낸다. 밀랍초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인 듯하다. 그가 밀랍초 공양물을 보내면서 ‘오늘 저녁 모든 부처와 관세음보살, 준제보살 상전(相前: 불전)에 불을 켜시고’ 예불할 때마다 ‘무량수경을 읊어 멀리(있는 나를 위해) 발원을 축원해’ 달란다.

이러한 발원의 목적은 바로 ‘편안치 않은 것에 매달린 것이 더욱 심하여 속인의 객지 상황은 더욱 따분하고 지루한데, 또 시간만 늘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 전에 발원을 원했던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았던 두 스님이 실제 어떤 발원과 축원을 모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준제보살에게 올렸을까. 추사가 1840년 제주로 유배된 후, 그를 아꼈던 이들의 발원은 실제 대광명전을 신축하게 된 이유였다. 이는 추사를 위한 축원발원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한편 조선 후기 종이를 세는 수양사(數量詞)는 속(束)이며, 밀랍으로 만든 초는 대(對)로 표기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추사의 바람은 축원발원도 중요하지만 뜻이 통하는 벗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이런 은근한 만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유되어야할 정서이기에 더욱 그렇다. ‘등불 아래서 어지럽게 날려 쓴’ 이 편지는 그러기에 이들의 따뜻한 우정이 더욱 돋보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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