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삼장 쓴 만해 스님… 3.1운동 주도하다
공약삼장 쓴 만해 스님… 3.1운동 주도하다
  • 신중일 기자
  • 승인 2014.03.24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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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3.1운동과 만해, 그리고 태화관

만해 스님 3.1운동 주도적 역할
불교·유림 소집… 공약삼장 첨가
종로 태화관서 독립선언서 발표
만해 “최후 一人까지 독립 쟁취”
발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공약삼장 만해 집필 아냐” 주장에
故김상현 교수, 티흐노프 교수 등
“공약삼장, 만해가 썼다” 반박


▲ 태화관에 모여 있는 민족대표를 상상한 그림. 이들 모임을 주도한 것이 만해 스님이다.
기미년(1919) 3.1운동은 민족의 역량이 총체적으로 결집된 거국적이고 평화적인 독립투쟁이었다. 이 같은 운동이 종교계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은 만해 스님의 회고대로 “일제의 혹독한 탄압 정책으로 국내의 정치단체는 ‘절종(絶種)’”됐기 때문이다.

주지한대로 3.1운동은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때를 기다리던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일제히 민족 독립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 가운데에는 만해 스님도 있었다.

만해 스님은 1918년부터 각계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자주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이들은 애초 구황실의 귀족들과 대한제국 고관, 재력가들을 끌어 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이 규합하는 궐기를 구상했다.
만해 스님은 직접 최린과 권동진, 오세창을 만나 참여자의 뜻을 모으고 천도교 측이 추진 중이던 독립선언 개입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실제 3.1운동 궐기에 있어서 만해 스님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월남 이남재와의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해 스님은 이남재를 찾아가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하지만 이남재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독립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제안했다.

실제 이남재의 주장은 운동을 준비하는 진영 안에서도 함께 있었던 논란이다. 만해 스님은 이남재 등의 주장을 일축하며 ‘독립선언’을 주창했다.

만해 스님은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는 것은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일본의 예속국이라는 인상을 주며 그것은 비복(婢僕)이 상전에게 선처는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파했고, 결국 ‘독립선언’으로 노선이 정해졌다.

이후 만해 스님은 불교 대표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전국을 다녔다. 1919년 2월 하순 범어사에서 오성월 스님과 김법림 스님을 만나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박한영, 정진응 스님 등을 만났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합류하지 못했고, 백용성 스님만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유림(儒林)을 포섭하는 것도 만해 스님의 몫이었다. 거창에서 영남 유림의 거두 면우 곽종석을 만나 승낙을 얻었지만 3월 1일 직전 급환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곽종석은 인편으로 인장을 보냈으나 이 역시 시일 내 도착하지 못했다. 민족대표로 참석하지 못한 곽종석은 훗날 ‘파리장서’를 주도하게 된다.

▲ 옛 태화관인 태화빌딩과 이곳이 '삼일독립선언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지석. 현재는 개신교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결국 민족대표는 불교 2명,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총 33인으로 정해졌고, 거사일인 3월 1일이 됐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1시 서울 태화관에 모였다. 본래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를 선포하려 했으나, 전날 밤 민족대표들은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만일의 경우 흥분한 민중들이 폭력화해 왜경과 충돌하는 것을 우려해서 였다.

사실 태화관은 이래저래 얄궂은 곳이다. 태화관은 본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의 별장이었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정사를 논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후 이완용이 이사하며 여기에 궁중요리사 안순환이 요리집을 개점했다. 모체인 명월관은 친일파들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돈으로 방탕하게 노는 곳으로 유명했으나 1918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안순환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을 열었으며, 기생들과 양악대가 춤과 노래를 제공해 손님들을 불러모았다. 이후에는 주로 언론인과 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됐다.

현재 자리에는 기독교 감리회의 태화복지재단의 건물인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3.1운동 장소라는 것은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만이 알리고 있다. 일제의 폭거에 맞선 평화적 독립투쟁의 시작을 알린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쓸쓸하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담당한 이종일이 가지고 온 선언서를 돌려 읽고, 만해 스님의 식사(式辭)를 들었다. 식사는 최린이 만해 스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 모임은 곧 독립 만세를 고창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서고 민중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 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히 최후의 일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싸웁시다.”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는 최린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했고 일본경찰대 80여명이 곧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했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만해 스님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됐다. 이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의 함성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민족대표들이 왜경에 끌려갈 때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이 몰려나와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만해 스님은 경찰차 안에서 본 그 광경에 깊은 감회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만해 스님이 1932년 1월 8일 〈조선일보〉에 회고한 ‘평생 못 잊을 상처’를 보면 알 수 있다.

“기미운동이 폭발할 때 온 장안은 ‘대한 독립 만세’로 요란하고 인심은 물 끓듯 할 때에 우리는 지금의 태화관 당시 명월관 지덤에서 독립선언 연설을 하다가 경찰에 포위돼 한쪽에서는 연설을 계속하고 한쪽에서는 체포돼 자동차로 호송돼 가게 됐습니다. 그때입니다. 12~14세 돼 보이는 소학생 두 명이 내가 탄 차를 항해 만세를 부르고 일경의 제지로 개천에 떨어지면서도 불렀습니다.〈중략〉 그때 그 학생들이 누구이며, 왜 지극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본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였습니다. 그때 소년들의 그림자와 소리로 맺힌 나의 눈물이 일생 잊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 전문.
만해 스님의 주도로 진행된 3.1 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서’로 집약된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끝에 있는 ‘공약삼장(公約三章)’은 선언서를 집약하는 행동강령이다. 일제는 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잡아 내란음모죄로 몰아가려 했다. 일반적으로 선언서는 최남선이 쓰고, 공약삼장은 만해 스님이 기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모두 최남선이 작성했다고 주장한다.

1969년 문인 조용만은 〈동아일보〉에 만해 스님이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보지 못한 점을 들어 선언서의 본문을 물론 공약삼장까지도 최남선이 전담했다고 기고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 교수도 당시 여러 글에서 △일제가 심문과 공판에서 최남선을 기초자로 파악하고 심하게 추궁했으나 만해 스님은 추궁하지 않았고 △만해 스님에게 최린은 선언서 초고를 맡기지 않았으며 △선언서를 수정할 시간도 없었던 점 등을 들어 ‘만해 스님의 공약삼장 기술설’을 반박했다.

하지만 곧바로 반박은 이어졌다. 故김상현 동국대 명예교수는 만해 스님의 제자 김관호, 최범술의 회고를 비롯해 △스님 역시 심리 중에 공약삼장의 취지에 대해 추궁받은 점 △인쇄 전에 스님은 초고를 보았고, 수정할 시간적 여유도 있던 점 △만해 스님이 공약삼장을 추가했다는 이갑성의 생전 증언 등을 제시하며 ‘만해 스님의 공약삼장 첨가설’을 주장했다.

특히 김상현 교수는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공약삼장의 굳센 정신은 ‘때가 아닐 때 경솔히 행동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한 최남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티히노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동양학 교수는 공약삼장을 선언서의 ‘눈동자’이고 만해 스님의 사상과 신념의 축약판으로 봤다. 티히노프 교수는 “불교의 해탈·불살생·박애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온 만해 스님이 자유·비폭력·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의 필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만해 한용운 평전〉의 저자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 역시 정황상 공약삼장은 만해 스님의 저술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공약삼장을 근거로 내란죄로 몰아가려던 일제가 최남선은 징역 2년 6월을 선고한데 반해 만해 스님은 징역 3년이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형량을 받았다”면서 “당시 3년형은 손병희, 최린, 오세창, 함태영 등 3.1운동 주역들에게만 선고됐다. 이를 미루어봐도 공약삼장은 만해 스님이 저술했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3월은 3.1운동 기념일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3.1운동 정신은 퇴색하고 잊혀가고 있다. 인사동 한 켠에 서 있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만큼 박제화된 기억이 되고 있다. 불교계 역시 몇몇 사찰에서 기념법회를 하는 것으로 구색을 맞추고 있다. 3.1운동은 만해 스님이 주도해 이뤄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후학들은 3.1운동 정신을 되새기고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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