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깨달으려 말고 나부터 발견하려고 애를 쓰세요

▲ 그림 최주현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보지 않는다면 되돌아나올 수가 없고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라는 것도 무섭게 생각하지 마시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다 하고 주인공에다 놓을 때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지듯 녹아지는 것입니다.

봄이 오니깐 활동하시기가 좀 유하시죠? 아주 추울 때보다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봄이 와도 살기에 좀 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진리를 배우는 데 세 가지의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순응해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셋째는 시대에 따라야 한다는 얘깁니다. 이 세 가지가 어긋날 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과 같아서 그거는 불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이 정신세계의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을 한번 숙고해보도록 합시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나가면서 갖가지로 생활에 얽매이죠. 그러나 만물에 대해서 한번 거론해봅시다. 모든 생물들,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떤 새들이든, 어떤 곤충이든, 개든 고양이든 모두가 자기 분수를 안다 이겁니다. 말이나 소나 개나 돼지나. 돼지는 자기가 돼지인 줄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새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모든 게 다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오직 한 군데에다 몰두하고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바를 틀림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건이 주어지면 개는 개로서 사는 방식을 허탈하게 보내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인간처럼 아주 악순환을 겪고 얽히고설킨 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집착과 관습에 의해서 그냥 얽매이고 살지는 않죠.

어떤 큰스님이라든가 어떠한 사람들이, 또는 사대 선지식들이, 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그러면 거기에 끄달려서 아예 한 발짝도 떼놓지 못하죠. 부처님께서도 ‘말에 끄달리지 말라. 뜻을 봐라. 뜻에 따라야지 말에 따르면 안 되느니라. 그 말을 들어서 뜻을 가지고 행하라.' 이런 말씀 하셨죠. 사람은 그렇게 얽매이고 지내는데 동물들이나 식물들은 아주 편리하게 얽매이지 않고 산다 이겁니다. 그것은 어떠한 점 때문이냐 하면은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얽매이고, 집착에, 욕심에 분수를 모르고 끄달리는 그러한 일들이 허다히 많습니다. 아니, 모두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가 자기 다리가 긴지 짧은지 그걸 모른다면은 개천을 건너 뛴다 하더라도 아마 개천 중간에 빠질 겁니다. 그러나 자기 다리가 짧은 줄을 안다면 뛰지를 않겠죠. 넓은 데는 뛰지 않고 자기가 뛸 수 있는 만큼만 뛰겠죠.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안 그래요. 개천이 넓으나 좁으나 막론해놓고 그냥 넘어갈 생각을 하거든요.

이 공부하는 자체도 그래요. 우리가 분수를 안다면 나부터 발견하려고 애를 써야지, 말을 많이 들어서 첨단을 넘어서려고 기어오르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은, 그건 자기 자리도 모르는 그런 위치가 되죠. 자기 내면의 자기가 철저하게 그렇게 해나감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생중생들은 제도가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를 않는 모양 같습니다. ‘어떡하면 빨리빨리 알아질까? 어떡하면 빨리빨리 깨달을까?’ 하지만은 내 자생중생들부터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한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게 되고, 자생중생들이 튼튼하고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고, 또한 자생중생들이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아야 내가 둘 아니게 돌아갈 줄 알고. 그러니만큼 모든 것은 자생중생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제도를 해야 내가 제도를 받고, 자생중생들이 제도를 받아야 내가 깨달음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겁니다.

하물며 물에서 사는 생물들도 각층의 차원을 가지고 각층의 모습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나갑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 모두가 주고받고 이렇게 서로가 공식(共食)하면서 공생(共生)으로서 공용(共用)을 하고 돌아갑니다. 그런 동시에 자기가 놀고 있는 그 집이 엄연히 있어서 테두리를 질서정연하게 찾고 또 질서정연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꾸라지는 미꾸라지 노는 데서 놀고, 게는 게대로 게 노는 데서 놀고, 각계각층이 자기 노는 데서 논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방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제 집 찾아가느라고 허덕이다가 죽고 하는 걸 보면, 난 그 생각이 가끔 나요. 해방이 되고 나서 차 대가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오다가 다 그냥 떨어져서 죽고, 머리통이 깨져서 죽고, 다리가 부러져서 걷질 못하고 쓰러지고 이러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생각이 나느냐 하면은, 고기를 방생한다고 풀어놨을 때 제 집 찾아가느라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과 같았어요. 얼마나 치욕입니까, 그게? 자기네들은 무심코 그냥 잡아다가 또 갖다가 넣고 또 잡아서 가둬놨다가 또 풀어놓고 이러는데, 그거는 오히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그렇게 망친 거와 같습니다.
어떠한 것이 진짜 방생인지도 모르면서, 실천도 못하면서 그림자로만 왔다 갔다 하고 남의 말만 듣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갈대와 같이 쓸리는 마음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입니다.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를 찾아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릅니다. 제자리를 찾아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은 그냥 잡아먹히고 그대로 추방을 당하고 이렇게 하니깐 말입니다. 그런 이 아래, 하의 동물이나 아래 하의 생명들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자기 자리를 자기가 알고 자기 분수를 자기가 알고, 자기가 새면 새라는 걸 알고 미꾸라지는 자기가 미꾸라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죽는 데 대해서 조금도 애타게 고(苦)라고 생각을 안 한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化)해서 진화가 되고, 진화돼서 인간으로까지 이렇게 올 수 있는 길이 터진 겁니다.

그러면 그런 대로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걸 가만히 보십시다. 여러분은 애고(哀苦)가 많으니, 고(苦)가 많으니 병고가 많으니, 온통 야단들인데 난 병고다 애고다 고통이다 이런 생각 안 합니다. 그 고통을 받아보신 분들이 그 낙을 알 수가 있는 거지, 고통을 모르면 남의 고통도 모르고, 또 사람이 발전을 해서 진화돼서 창조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동시에 평등한 겁니다, 이게. 그래서 항상 재료로 알라고 그러죠. 여러분이 아무리 빠져나가려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이치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알아야 될 일인데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허허, 그걸 말을 어떻게 해야 여러분한테 잘 비벼서, 비빔밥을 해서 맛있게 해서 먹게끔 하고 나중엔 소화를 잘 시키고, 나중에는 대변을 잘 눠서 속이 시원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도 때로는 부실할 때가 많습니다, 표현이 여러분한테.

우리가 이런 걸 생각해보십시다. 영화를 찍는 데 미리미리 대사나 모든 것을 촬영해가지고 영화를 찍지요? 인간들도 자기가 살아나가는 데에 자동적으로 촬영이 되고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이 생활을 해나가는 영화를 돌린다 이겁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영화 제작이 되고, 또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대사와 모든 것이 그렇게 정신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영화를 할 때에 때에 따라서 국민이 ‘이렇게 이렇게 이거는 잘못됐다.’ 하고 말을 하면은 좀 고치기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 80%, 90%는 고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벌써 그렇게 역할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그래서 자기가 한 것대로 방영을 해주는 겁니다. 아주 요만큼도 빈틈없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태양계가 모든 행성을 이끌고 다니되 태양이 잘나서만이 아니고 행성들이 잘나서만도 아니에요. 서로 주고 서로 받고 이렇게 공용(共用)하는 겁니다. 공식(共食)이 없다면 공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성이 아니라면은 우리가 움죽거릴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아주 이 도리를 확실히 안다면 한 치도 어긋날 게 없고, 진리에 순응하고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우리 생활도 시대에 따라서 용어가 변천되고 바뀌고 하는 대로 발전이 돼서 아마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만이 아주 적절하게 여러분이 생각을 하실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정신세계의 이 마음공부를 안 한다면은 절대 안 된다는 거! 우리가 이 테두리 안에서, 이 지구 안에서 벗어나면 벗어나는 대로 정신계와 통해야 한다는 거를 추려서 말씀드립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저 우주의 근본과 직결이 돼 있다고 그랬죠.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건 가설이 돼 있다고요.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그렇게 가지고 나온 거죠. 이 세상에 나왔다 하면은 내가 나온 게 바로 화두요, 앉고 서고 생활하는 게 그대로 참선이요, 그 모든 살림살이하는 것이 바로 자기기 때문에,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자기기 때문에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다 이겁니다.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하고 행하고 그런 거를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린 왜 이렇게 정신계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세계와 통해야 우리가 정신세계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 옷을 벗고 이 정신이. 즉 말하자면 원자가 발전을 해서, 은하계라든가 태양계라든가, 만약에 거기의 지배자가 된다면, 수명은 더 길어지고 모든 각계각층 중생들을 다 건지게 되고 살리게 되는 거죠. 그런 반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나가 다 내가 되지 않는 생명들이 하나도 없고, 나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한 뜻이 뭔 줄 아십니까? 만약에 이렇게 여러분이 잘 아시는 태양계의 지배자라면, 모든 행성, 혹성을 이끌어가고 있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마음의 줄에, 염주알이 한 줄에 꿰어서 돌아가듯이 다 돌아갑니다. 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인간의 한마음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서로가 주고 받고 공생(共生)ㆍ공용(共用)ㆍ공체(共體)ㆍ공식(共食)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내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을 제도해가지고 내가 깨쳐가지고 통해서 보면은, 모든 게 나 아님이 없고, 모든 게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모든 게 내 삶 아님이 없고 그렇죠. 이 도리를 완전히 터득해야만이 태양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며,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태양계의 지배자가 된다 하더라도 딴 행성 혹성의 모든 것을 듣고 보고 알고 행할 줄 알아야, 또 그 오신통(五神通)에서 벗어나야 누진(漏盡)이 된다고 그랬죠? 누진은 한마음의 한 클럽입니다, 전체가. 우주에 관한 건이나 이 진리에 관한, 이 세상살이 만사에 관한 건이나 모든 게 한데 귀합된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몸을 가지고 열반계에 이르러야 된다, 구족해야 된다.’ 이런 뜻은 뭐냐 하면은 앉은 자리에서 모두 커버할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응(應)해줄 줄 알고 모든 걸 그렇게 해야만 되고 또 앉은 자리에서 자기 원자에서 입자로서 수만 개로 자기가 화(化)해서 모든 다른 혹성이라든가 다른 위성이라든가 모든 생명들에게, 모든 인간 생명들에게 모두 응해줄 줄 알아야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 우물에서 산다면 우물의 이치만 알지 연못의 이치도 모르고 바다의 이치도 모른다 이 소립니다. 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광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보세요. 닭이나 개나 이런 거 본다면은 닭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우리 인간은 태로 형성돼서 열 달이 돼야 이렇게 낳죠? 그런데 닭이나 그런 거 보면 금방금방 낳습니다. 금방금방 낳아요. 금방금방 또 죽어요. 어쨌든 죽게 돼 있죠. 그런데 사람은 누가 육신을 건드려서 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신을 뺏기고 죽죠. 정신이 빠지면은 송장이 되니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정신이라고 그랬죠. 이것이 자기 영원한 뿌리 자체가 죽는 게 아니라 혼이 빠지면 육신은 송장이 돼버리죠.
얼른 쉽게 말해서 종(種)이라고 할 거 없이 씨라고 그럽시다. 씨만 남는 거죠. 그래서 그 씨가 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씨가 잡종이냐, 선종이냐 이게 나오는 겁니다. 잡종은 유전자의 종수가 그렇게 많은가 하면, 선종의 종자도 또 그와 같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신 하나의 원자에서 한생각이 나가는 것이 입자라고 한다면, 한생각의 입자가 그렇게 이 우주 전체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이 소립니다. 이게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아마 여러분이 진짜 실감하고 진짜 알아야 되겠죠. 덮어놓고 50%의 물질세계만 끌어 잡아다니는 그 습관, 욕심, 관습, 이게 관습에 얽매여서 모두 헤어나질 못해요. 우리 중들도 그래요. 어떤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셨다 이러면 그 언어조차 어기지 않고 할 양으로들 애를 쓰거든요, 시대는 변천하는데. 시대는 발전이 돼서, 예를 들어서 항상 내가 그렇게 말하지만, 달구지다 하면은 지금 비행기라고 그래야 맞습니다. 먼 데 가는 짐을 나르려면 비행기 아니면 못 나릅니다. 그런데 지금도 달구지라는 말을 해야만 옳겠습니까? 시대가 변천하고 발전이 되고, 그렇게 되는 대로 용어는, 뜻은 따르되 용어는 바꿔져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야 자라나가는 사람들한테 전체의, 즉 말하자면 천체의 양식을 먹일 수가 있죠. 이 산하대지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이 거름이 잘 돼야 잘 살 수 있듯이, 천체의 양식을 먹고 자랄 수가 있고, 지혜롭게 물리가 터져서 잘 자랄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맞추지 않는다면은, 직결돼 있는 맞춤에 어긋나면은 밝게 지혜가 생기질 않아요. 우리가 만날 보면서도요, 이 불 들어오는 것도 갖다 맞추었기 때문에 불이 들어오는 거지 갖다 맞추지 않는다면은 불이 안 들어옵니다. 세상과 모두 가설이 돼 있는 이치와 직결이 돼 있는 이치가, 갖다가 삼합이 딱 맞아야 불이 들어올 수 있고, 삼합이 딱 맞아야 생산을 할 수가 있고, 삼합이 딱 맞아야 잉태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부부가 없이 잉태할 수 있습니까? 또 자기 영혼이 없이 잉태할 수 있습니까?

이 모두가, 이거는 꼭 영화 속에서 우리가 배역과 대사를 가지고 나오는 것과 같이, 전부 살아나가는 이 자체가 무대 위입니다, 무대! 지금 무대에서 영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영화를 하는 대로 위로 직결이 돼 있으니까 여기서 녹음이 되는 대로, 입력이 되는 대로, 그 입력되는 대로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입력되는 대로 올라가니까 올라가는 데서 그 입력이 올라간 대로 잘 검토해서 뽑는 거죠,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그렇지, ‘자기네들이 깨달았다. 자기네가 잘한다. 자기네가 했다.’ 이런 건 있을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도 자기가 한 사이가 없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부처라고 한 예도 없고, 자기가 깨달았다고 한 예도 없고, 했다고 한 예도 없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 예도 없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 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와 같이 이 세상에, 지금 세상에 났기 때문에 이 직결된 뜻으로써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 진리에 순응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서로 교환하면서, 이렇게 돌아가는 이 자체가 진짜로 배움이라 생각됩니다. 그저 우리 중들이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하고 그러는 게 중들이 아니란 얘깁니다. 그러되 그거를 아니 해도 아니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거를 아니 해도. 손은 다섯 개 손가락이 있어야 정상인데, 새끼손가락 하나 없으면은 이게 정상이 못 되죠. 안팎이 다 동등하게 진행이 돼야 되겠죠.
그럼으로써 부처님께서도 ‘나의 고깃덩어리를 믿지 마라. 예를 들어서, 너를 먼저 알게 되면은 나 자체도 네가 알게 되니, 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라. 그냥 따르라. 세 가지가 종합해서 맞는다면 그냥 따르라. 잘 보고 듣고 이 세 가지에 어긋난다면 따르지 말라.’
지금 가만히 보세요. 덮어놓고 종교라 이름만 붙여놓으면은 그냥, 뭐 아우성을 치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미친 사람들처럼 이렇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절대로 부처님께서는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자기가 이 세상에 부모의 혈육을 받고 나와서, 뜻을 받고 나와서, 고상하고 누(累)가 되지 않게, 자기가 누가 되면은 전체 누가 되니까 누가 되지 않게 살아나가는 것이 아주 고상한, 제일 가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점잖고 고상하고 알뜰하고 진실하고 선명하게 살아도, 이 모습을 가지고는 얼마 살 수가 없는 건데….

여러분이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이 몸이 있을 때에, 이 몸이 있어야 상대도 있는 거니까 공부가 되는 거지 몸이 없으면 상대가 없기 때문에 부딪침도 없고, 보는 거 듣는 것도 부딪침이 없어서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여러분이 다른 데다 정신 팔지 마시고 오직 한 생을 점프해서라도, 내가 한 생을 버리고라도, 한 생을 점프해서 내가 탈피하겠다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피안의 세계가 바로 탈피의, 그 얽히지 않는 탈피의 세계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냥 살아나가는 데 가정의 안유나 원하고, 나의 에고나 없애기 위해서 다니지 마십시오.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보지 않는다면 되돌아나올 수가 없고,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고통이라는 걸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귀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라는 걸 무섭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거는 공부할 수 있는 재료구나, 너무나 감사하구나!’ 하고 거기다 놓을 때에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지듯 녹아지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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