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원 화요열린강좌-박찬국 교수(서울대 철학과)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
고통스런 현실의 극복은
정신의 변화를 통해 가능

니체와 불교의 차이점
니체는 명예ㆍ야심 추구 긍정
불교는 집착, 욕망 벗어나야

▲ 박찬국 교수는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호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에 관심이 많으며, 서양 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것도 주요한 연구관심 중의 하나다. 저서로 <에리피 프롬 읽기><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니체와 불교><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니체 사상과 불교 교리를 비교한 연구들이 많다. 박찬국 교수는 그 연구들 중 다수가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며 니체와 불교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했다. 3월 18일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열린 박찬국 교수의 ‘니체와 불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의 강의를 들어본다.>

니체의 유명한 말 중 ‘신은 죽었다’ 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봐서는 안됩니다. 니체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근대인들이 기독교의 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라는 것입니다. 신을 끌어들여 설명하려 했던 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신의 존재는 무의미해지게 되었죠. 신이 인간 역사를 규정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을 죽이고 나니까 허무주의가 발현합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 방향감각이 사라져버리는 거죠. 삶의 가치 또한 없어져버립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제시해주지 못하니까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지구에서 태양이 사라져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전까지는 신이 삶의 방향과 의미, 빛을 제시해줬는데 말이죠.

그러나 니체는 신을 죽인 행위를 위대한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믿고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으로요. 청소년들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부모에게서 떨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믿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죠. 니체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에 버금가는 존재, 초인의 개념을 등장시키는 거죠. 니체는 “신을 죽이고 인간이 스스로 독립하는 것만큼 위대한 것은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행위 이후의 역사는 그전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니체는 새로운 삶의 철학을 신이란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찾아냈습니다. 고통과 고난을 겪고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키우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거죠.

니체는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를 완전히 전환시켜버립니다. 근대 이전에 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뜻대로 하는 것, 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라고 봤다면 니체는 선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력, 힘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악이란 인간의 정신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죠.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행복으로 보았다면, 니체는 자신의 힘이 고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봤습니다. 고통, 고난을 극복할 때, 투쟁하면서 자기가 강한 존재가 된다고 느낄 때를 말하는거죠.

니체는 힘을 칭송했습니다. 니체 사상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힘에의 의지’라하면 강한자가 약한자를 억누르고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니체는 이런 경우를 비겁하고 야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힘의 의지를 느끼려면 자기와 대등한 상대와 겨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니체는 강한 힘, 정신력은 자기를 극복하는 데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지배자라고 해서 강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괴롭히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야말로 쉽게 자신의 힘을 느끼기 위해 왜소한 자들을 괴롭히니까요.

니체는 민주주의를 기독교적인 가치의 연장이라 봤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사용한 것이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죠. 기독교에서는 약한 이를 도와주고자 하는 것을 선으로 보고, 전쟁을 일으키고 남을 괴롭히는 것을 악이라 합니다. 민주주의적 양식도 마찬가지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전쟁을 일으키고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 시저 같은 이들은 악인입니다. 그러나 위인전에서는 이들을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죠. 오늘날에도 이처럼 두 가지 도덕관과 가치관이 혼재하고 있어요.

때문에 니체는 새로운 도덕, 군주도덕을 주창합니다. 군주도덕은 월등한 능력, 자부심, 지혜, 카리스마, 리더십 등을 갖추고 있는 탁월한 군주를 선한 사람으로 봤고, 저열하고 비겁하고 열등한 것을 악으로 봤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아도 국가 간, 사회 내 경쟁이 늘 존재합니다. 군주도덕이 추구했던 도덕이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죠. 강한 긍지와 경우에 따라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갈 수 있는 리더십 같은 것이요.

사람간의 투쟁, 갈등이 없는 사회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인정을 하고 경쟁을 없애기보다 바람직한 형태로 바꾸어 가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니체 역시 이같은 생각을 했어요. 남을 압도하려는 호승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순화시키자는 거죠. 서로를 고양시키고 강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투쟁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네 가지 미덕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자신과 친구에 대해 성실할 것. 적에 대해 용기를 가지지만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고 타인에게 공손할 것. 니체가 말하는 초인 또한 ‘그리스도의 영혼을 갖는 카이사르’라고 했습니다. 강한 용기와 긍지를 갖지만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요. 니체를 전적으로 배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니체는 또한 인간들간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했어요. 약한 자들이 자기를 합리화하는 걸로요. 심지어 노예가 필요하다고도 했으니까요. 니체 사상이 가진 독소죠.

니체의 사상 중에 중요한 것은 영원회귀 사상입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삶보다도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길 바라죠. 니체는 그런 식의 희망을 단절시켜버립니다. 영원회귀 사상에서는 천국도 없고 유토피아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거죠.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면 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달리보입니다.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회귀 사상과도 통합니다. 강한 사람은 험한 운명이 반복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죠. 초인이란 그러한 사람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하수나 강물을 끌어들이고서 자기 속성을 잃지 않는 바다처럼, 초인은 궂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오히려 그런 것을 자기발전계기로 받아들입니다.

니체와 불교사상 사이에는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구조적으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삶의 고통스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둘 다 초점을 맞추고 있죠. 근대계몽주의는 구조를 바꾸면서 인간 고통을 극복하려하죠. 니체와 불교는 인간 정신을 변화시킴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니체는 정신력을 강화시키면서, 불교는 자기집착주의를 버림으로써 고통을 극복합니다. 이처럼 니체와 불교는 고통을 인간정신의 변화를 통해서 극복하려한다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체와 불교는 내세라든지 유토피아 등을 꿈꾸며 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불교의 경우 자기집착을 버리면 지금 있는 이곳에서 열반한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니체 역시 독립정인 정신을 강조하죠.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철학이란 측면에서 니체와 불교는 공통됩니다.

언뜻보면 니체와 불교간 유사점이 많이 보이지만 양자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선명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을 바라봄에 있어 니체는 어떤 고통이든 긍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불교는 고통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여여하게 바라보라고 하죠.

또한 니체에게는 현실에 대한 강한 애착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명예라든가 야심을 추구하는 것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며, 문화창조의 강한 동력이라고까지 했어요.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이야기죠.

니체는 부정적인 욕망들과 정열을 승화하려고 하지만 불교는 정화를 추구합니다. 니체는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원한과 증오를 선의의 경쟁심으로 승화할 것을 촉구하지만 불교는 모든 경쟁심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추구합니다.

니체와 불교가 지향하는 인간상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니체의 초인이 강한 자아에 가깝다면 불교는 자기중심주의에 반대하죠.

니체와 불교가 추구하는 덕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니체는 긍지, 모험, 지혜 등 남보다 앞설 수 있는 덕들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하심을 강조했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으므로 자신이 잘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열정이나 정열 대신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라고도 하며, 책략대신 진실, 모험대신 명상을 강조했습니다.

니체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처럼 천지창조 등 신화적 이야기를 끌어들이지 않고 인간의 심리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를 최초의 실증주의적 종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욕, 평정을 최상의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투쟁, 용기 등을 최고로 두었죠. 그래서 불교를 노쇠해버린 종교로 보기도 합니다. 불교는 정신적인 작업에 몰두해서 삶의 고통에 민감하고 유약해져버린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란 우울증으로부터 사람을 벗어나게 하는 치유의 성격을 띤다고 했습니다.

또한 불교는 인격신을 부정하는 정신적 진보를 이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적이고 생명력이 약화된 데카당한 종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당시에 불교가 유행할까봐 우려했습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유럽적인 불교’라고 부르는 동시에 자신을 ‘유럽의 붓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니체가 자신의 사상을 불교와 동일시했다고 보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니체 자신과 불교가 유사하다고 본 것일 뿐이죠. 자신이 유럽의 붓다가 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유럽의 부처는 인도의 부처에 대한 대립자일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니체가 보기에 불교는 내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는 종교였고 삶에 지친 자들이 추구하는 쾌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교사상은 에피쿠로스의 사상과 비슷하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내면적 평화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죠. 깨닫자마자 가르침을 펼치려고 하니까 에피쿠로스의 개인주의적 철학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 니체가 불교를 오해했단 생각이 들어요.

불교가 고통에 대한 지나친 감수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지만, 불교도 역시 그렇게 유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죠. 진정한 불교도가 고통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은 자그마한 상처나 병 등이 아니라 삶 전체의 무상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불교가 가진 고통에 대한 병적인 민감성은 오히려 불교가 극복하고 초극하려고 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니체는 불교가 윤회에서 벗어나고 삶을 완전히 부정하려고한다면서 현실도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불교가 윤회극복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마저도 버리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불교는 내적인 황홀경으로 도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비, 지혜 같은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 개화시키려고 합니다. 불교는 혼자 평온한 종교가 아니라 모두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상 니체와 불교간 유사점과 차이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니체 사상이 현실적으로 적용되기에 무리인 측면이 상당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니체보다 불교가 우월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었으면 하지만 너무나 요원한 이상이죠. 니체의 철학 또한 오늘날 현실에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긍정적으로 순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