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지 않으면 苦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그림 최주현

한마음 주인공에다 무조건 믿고 맡겨 놔야 됩니다.
무조건 맡겨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살을 쏘면 똑바로 탁 들어가야 되는데
화살이 일로 가서 맞고 절로 가서 맞는다면 그게 되겠습니까.
전체를 그냥, 중심을 꿰뚫는 공분데 말입니다.

견성이라는 말을 하는데…
문) 불교에서 견성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일반적으로 견성을 했다는 스님들의 행적이나 어록, 또는 경전에서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견성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답) 우리가 경전을 파악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알고 그 경전을 증득한 거하고, 내 마음을 증득한 거하고는 다릅니다. 경전을 증득한 거는 말이나 모든 것은 다 유창해도 결정적인 문제에 가서는 해결을 못해요.
그러니까 생활 속에서 ‘모든 일체를 다 거기서, 고놈이 하는 거니까 고놈이 해결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아라 이겁니다. 그리고 ‘고놈이 있다는 것은 고놈이 증명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아라. 그 나를 끌고 온, 나를 진화시킨 그 장본인에게. 그래서 부와 자가 상봉을 하게 돼요. 이렇게 둘이 아니게. 그래서 내가 나를, 과거의 내 조상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전에도 내가 이런 말을 했죠. 묘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들의 묘지고 하나는 자식의 묘지다. 그런데 날더러 묻기를 ‘아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이 하나가 돼 버리고, 자식이 아비한테로 오면 아비가 하나가 돼 버리니, 그것은 무슨 연고냐.’ 하고 묻더라 하는 거를. 그랬을 때에 그것이 왜냐.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는 거죠. 일을 할 때는 온 정신을 다해서 거기 일을 하니까 자식이 하나가 되고,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두루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듯이 예전에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날더러. “이 대 경을 전체 위로 꿰고 바로 꿰고 이렇게 했는데 실질적으로 닥친 거를 어찌할 바가 없더라.” 하고요. 그 마음의 도리와 경과 선과, 인제 교가 둘이 아니게끔 된 거는 다 모두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굴왕신이 내려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손이 있어서 이사를 못 간다든가, 이 터가 나빠서 못 짓는다든가, 산소 자리가 나빠서 못 쓴다든가 이런 문제에 닥칠 때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거예요. 그건 꼭 당하고야 말죠.
그러나 법의 능력이 그렇게, 나 자체와 나 자체가 상봉을 했다면 그건 선과 교가 둘이 아니에요. 모두 일체가 둘이 아니죠. 그리고 그대로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대로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은 남한테 화두를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세상이 벌어졌지, 내가 없는데 무슨 종교가 있고 부처가 있고 세상이 있느냐. 나부터 알아라 이겁니다.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알라고 그랬죠? 너부터 믿으라고 그랬고.

예전에 어느 스님이 고치지도 못하고 막 쓰러지는 병이 동네에 발생을 하니까 도대체 그냥 앞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생각을 하니까, 자기가 이날까지 배우고, 이날까지 이론적으로는 다 배우고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니깐 어렵더라 하고는, 그냥 나 하나 버리면 되지 하곤 그냥 거기 들어섰다 이겁니다. 그러니 ‘나’가, 내가 문젭니다. 나 버리는 데의 문제라고요.
지금 살아가는 것도 고정됨이 하나도 없죠? 변하고 부서지고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그게 그대로 공한 겁니다, 그대로. 그대로 공했기 때문에 내 몸도 그대로 있지 않고 공해서 돌아가죠. 고정되게 그냥 있지 않는 겁니다. 말하는 거나 가고 오는 거나 만나는 거나 다 고정됨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나라는 걸,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이름을 가졌을 때 내가 그 이름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언니라는 이름, 오빠라는 이름, 형이라는 이름, 아우라는 이름. 또 사회에 나가서 장가들고 시집가면 며느리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또는 아내라는 이름, 남편이라는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 뭐, 천차만별로 이름이 많죠. 그 이름 따라서 아버지 노릇 할 때에 나라고 할까요, 남편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아들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그러니깐 전부 공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그 도리를 알면, 없다 하는 걸 알면은 죽는 것이다 이 소리예요.

모두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고, 뭣이든지 심봉이 끼어져야 바퀴가 굴러가죠? 맷돌도 심봉이 끼어져야 맷돌이 굴러가듯이 차도 심봉이 끼어져야 바퀴가 돌아가죠. 그렇듯이 인간도 이 심선이 서야 모든 게 일체 그걸 따라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을 그냥 선으로, 주장자로 세워 놓고 모든 걸 거기다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이열치열로서 들어가면 없어지고 들어가면 없어지고,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가 다시 넣으면 앞서 게 없어지고 또 넣으면 또 앞서 게 없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나라. ‘하나’ 하고 ‘둘’ 하면은 벌써 ‘둘’ 할 때 하난 없어져요. 그러곤 하나예요, 그게. ‘셋’ 해도 하나 둘이 없어지고 셋이 그냥 하나죠. 그러니까 전체 포괄적인 한마음이란 얘깁니다. 그러니 삼 배를 올리고 백팔 배를 올려도 아무 소용 없고, 모든 것은 이 주인공에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둥글려서 일 배를 올려도 만 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런 거를 이렇게 알았는데…. 내가 뭐 일 배만 해도 만 배가 된다는데….’ 이러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삼 배를 올릴 때는 삼 배를 하고 바쁠 때, 무슨 경우에 따라선 또 일 배로 하고…. 자연적으로 이렇게 돌아가게끔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공해 버렸으니까 나라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어요. 본래 없잖아요. 자기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겠죠? 그래서 무(無)라는 소리를 한 원인이 거기에 있다 이겁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하니까 “없다.” 하더니 또 한 번 물어보니까 또 있다, 있다 없다를 다 떠나면, 이거 보세요. 아버지가 어린애를 하나 생산하는데 엄마 아버지가 딱 다 없어지고 애만 생산이 돼서 나왔거든요. 그거 앨 쓴 사람은 다 없어지고. 그래서 전자와 전자가 작용을 하면은 그 양자의, 즉 말하자면 질량은 다 없어지고 에너지 광력만 나와서 큰 덩어리를 이룬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나와 나가 그 작용을 하는 거를 다 놔라 이 소립니다. 전자와 전자가 작용을 하는 거를 다 놓으면은 거기에서 에너지 광이 일어난다 이겁니다.

하여튼 모두 여러분이 지금 여여하게 살면서도 사는 게 없다. 여여하게 사는 반면에 여여하게 살기 때문에 무다. 없다.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무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한마음 주인공에다 무조건 믿고 무조건 거기에다가 놔야 된다. 맡겨야 된다. 무조건 맡기지 않는다면은 어떻게 그것이…. 화살을 쏘는데 똑바로 탁 들어가 맞아야 되는데 화살이 일로 가서 맞고 절로 가서 맞는다면 어떻게 그게 되겠습니까. 전체를, 원을 이렇게 해 놓고선 전체를 그냥 중심을 꿰뚫는 건데, 꿰뚫는 공분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뭣고? 이놈이, 이럭하는 놈이 뭣고?’ 이거는 10년 20년이 가도 어렵습니다. ‘이놈이 모두 집어먹고 가는 놈이로구나. 그리고 내놓는 놈이고 들여놓는 놈이고, 들여놓고 내놓는 거를 다 하는 놈이로구나.’ 하고 그대로 그냥 인정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빨라요.

무심으로 행하는 도리
문) 둘 아니게 무심으로 행하는 도리에 대하여 바른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두 더불어 주고받고 삽니다. 더불어 살지 혼자 사는 사람 없어요. 옷도 더불어 같이 주고받고 입고 먹는 것도 주고받고 먹고, 모두가 일체가 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둘 아니게 실천을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둘 아니라고 하느냐. 분명히 줬고 분명히 받았는데 어째 둘이 아니라고 하느냐 이러겠죠.

그런데 내가 전깃줄 얘기를 가끔 합니다만 전력이 들어왔을 때는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전력이 끊어졌다 이럴 때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양면의 전깃줄을 갖다가 이어야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렇듯이 주고받을 때, 이게 한순간에 같이 이 마음이, 즉 말하자면 정신계가 둘 아니게 이어진단 얘깁니다. 이어지니깐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단 얘기죠. 찰나에 주고받은 예가 없다. 그리고 함이 없이 살고 있다. 삶이 없이 살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옛날의 머슴은 자기네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맘대로 하죠. 그래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렇듯이 이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내가 듣는데 듣는 순간, 주는 순간, 말을 하는 순간에 하나가 돼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 대신 내가 하는 거죠. 그러니깐 항상 한 찰나찰나마다 이게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이 없이 하게 된단 얘기죠. 그래서 자기 속에서 한생각이 나서 이걸 해야겠다 이러고 하는데도 함이 없이 하게 되고요, 남이 주는 거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은 사이가 없고 그 상대방도 준 사이가 없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데 둘이 아니다라는 실천을 해야 할 텐데 둘이 아니라는 것만 말로 알고 있지 실천을 할 수가 없단 얘기죠. 항상 둘이 아니라고 그러시는데 이게 어째서 둘이 아닌가. 저쪽에서 나를 줬고 내가 저쪽에서 받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닐까. 근데 한순간 전깃줄에 닿는 거와 같단 얘기죠. 이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빨라요, 속도가.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속도가 빨라서 한생각에 그냥 그저 갖다 놓고 ‘고맙다’, ‘고맙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고 하나로 그냥 이어지기 때문에 고맙단 말 없이 그냥 고맙게 되는 거죠.

근데 어떻게 해야만 둘이 아니게 실천이 되느냐 이겁니다. 모두 내 몸뚱이 네 몸뚱이를 가지고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뿌리가 뭐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상대방이 나를 줘도 그 상대방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져 버려요. 합쳐지게 돼 있어요. 이 텔레비전도 끄면 안 나오죠. 켜면은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하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처음에는 서툴겠지만 그게 둘이 아니가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은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걱정 좀 안 하고 살고 싶어요
문)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답) 모두가 한 철의 살림살이니까 우리가 착을, 식구에도 착을 두지 말자.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되, 너 나 할 거 없이 전부 사랑을 베풀고 그러되 착은 두지 말자. 죽어도 같이 갈 수도 없고 또 아파도 대신 아파 줄 수 없고 대신 자 줄 수도 없고, 그러니 아예 놔서 참, 울지 않고 돌아서서 뼈저린 눈물 안 흘리게 우리 탁 놔 주자. 그냥 주인공이 끌고 다녀야 된다. 진짜로 믿고, 진짜로 자식을 위하고 남편을 위하고 아내를 위하고 형제를 위하고 부모를 위한다면은 탁 놓는 거예요. 놓지 않으면은 그거는 고생거립니다. 고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말로는 잘해 주고 사랑해 주고 다 하면서도 이 착은 두지 마세요. 옆에서 그냥 오늘 살다가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아주 무심으로 돌아가는 그 마음이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세요.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세요. 그리고 말도 좋게 해 주고 다 이렇게 그냥 뭐, 더 십 배 천 배 다 해 주되 착은 두지 말고 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있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리만큼 말입니다. 그래야 모두 고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가설이 벌써 아들이라는 가설, 부모라는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주인공에 그렇게 딱 불을 켜 놓으면 다른 데도 다 불이 들어옵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그런데 절에 가면 인등을 단다 뭘 한다 하는데, 백일만 이 세상이 움죽거리는 게 아니거든요. 영원이지. 마음의 불을 켜세요. 우리가 마음의 불을 켠다면 나도 밝고 남도 밝고 다 밝게 해 줘요. 여러분, 그걸 모르실 거예요. 여러분 속에, 배 속에서 막 그냥 쑤시고 막 짓두들기고 그렇게 부수고 그러거든요. 그럼 그걸 제재하느라고 또 배 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그걸 막거든요. 그럭하는 거 모르시죠? 배 속으로 들어가서 보면, 이게 간단하게 조끄마한 물건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본다면요, 궁이에요, 궁. 작게 보면 작은 거고 크게 보면 큰 거예요. 전체 우주라 그래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병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 우환이라든가 이런 것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그저 모두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금방 이 다리를 못 쓰고 그래도 ‘아이고, 약을 먹으면서 해야지 더 빠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죠. 그런데 아예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아요. 버리세요, 그냥. 죽거나 말거나. ‘네가 끌고 다니는 건 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네가 할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버리라니까요. 그렇게 버리면 얻게 되고 버리지 않으면 아예 그냥 죽어요. 뭐든지 그렇죠. 그래서 한 찰나에 한 백지장 사이를 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은산철벽을 뚫고 세상을 뭐 어쩌니 저쩌니 하느냔 얘기죠. 그러니 알아서들 해요.

이렇게 길을 일러 드렸는데 이것처럼 좋은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는 꼭 한번쯤은 이 백지장을 뚫어야 된다는 결론이죠. 우린 그래야 또다시 거듭거듭 태어나서 거듭거듭 모습을 바꿔 가면서 그 고에서 허덕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남들도, 많은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도 다 제도가 되니까 자기 하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제도가 되느냐는 거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즘 세상은 말세가 맞는가 봐요
문) 예전부터 지구 종말론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요즘 세상이 혼란스럽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걸 보면 말세가 맞는가 봐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 하는지요.

답) 그거는 자기네들 생각에 따라서 지어지는 얘기들이지 포괄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거는 개별적인 생각에 의해서, 자기네들이 이러한 생각이 들면은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겠죠.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땐 말세라고 하는 건 모든 걸, 불로 심판을 받는다 이런 말들이 있죠.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 불. 불이라는 그 자체는 자기 각자의 심판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돼 있어요. 전체가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문젭니다. 마음으로써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돼 있죠? 틀림없이 받게 돼 있어요, 차원에 따라서.

우리가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은 모든 우주와도 직결이 돼 있는 그 자체를 모르고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는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수명이 짧지만 저 태양계나 은하계 별성이나 이런 건 수명이 길단 말입니다. 지구 자체도 그렇고요. 지구 자체도 집과 같습니다. 우리 몸뚱이와 같은 거예요. 기냐 짧으냐 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몸 하나를 가축하는데, 이 몸을 막 혹사하고 술 먹고 담배 피고 또 뭐….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그것도 편안하게 마음을 두고 했다면 별 문제 없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그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그거를 어떻게 해결하지 못하니까 그냥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인제 신경을 쓰고 이렇게 되니까 이 집이 망가지죠. 우리의 마음들이 그렇게 건실하지 못하면 지구도 그렇게 망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마음들은 지구의 대기권에 의해서, 지구에서도 그렇게 마음에 의해서 그 들이고 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원자에서 입자로 분자가 돼 가지고 대기권을 지키고 들이고 내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고 나가는 건 그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마음의 그 작용 때문입니다, 생명의 작용. 우리 인간도 이 몸에, 즉 말하자면 3미터 안팎으로 이거는 보호신이 보호하고 있어요. 그래서 털구멍을 통해서 이 안에 있는 모습들, 의식들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깐 세균성도 끌어들이기도 하고 나쁜 거는 내보내기도 하고 이러죠. 이런 작용을 합니다. 눈에 보이질 않아서 그렇지. 그런데 말세요? 왜, 예전에 내가 스물 몇 살에도 말세가 오고 불로 심판을 받는다더니 심판은 다 받고 넘어갔는지 모르죠.

그런데 지금도 심판을 받는 것이 뭐냐.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잘못한 대로, 저 지금 지옥이란 게 딴 데가 지옥이 있는가요? 그리고 말세가 오는 것이 딴 데서 오는가요? 그게 전부 마음들에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끌려가고 잘못하지 않으면 안 끌려가죠. 끌려가는 게 말세죠? 이 마음에 따라서 끌려가느냐 끌려가지 않느냐 이런 것도 있고요. 마음이라는 건 보이질 않아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아요.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데 그 감옥을 일부러 마음으로 지어서 그냥 모두 바깥으로 그렇게 만들어 놔요.

형제지간에도, 자식 부모지간에도 “너 요놈의 새끼, 고렇게만 해 봐라. 고렇게 너 깡통을 차기 똑 참하다.” 이렇게 욕하는 부모들도 있고 그러는 형제들도 있거든요. 그 식으로 마음속으로다, 거죽으로는 욕을 안 했어도 마음속으로다 증오하고 그럭한다면 그냥 바깥으로 꼭 그렇게 돼요. 되는 일이 없고 그렇게 만들어 놓죠. 팔자 운명은 붙을 데가 없습니다. 과거는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배낭 속에 모두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실에는 공했으니깐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뭐 붙을 자리가 있어서 말세가 오고 뭐가 오고 그럽니까. 모두 마음들이 잘못 작용을 하기 때문에 문제는 벌어지는 건데. 말세가 오는 것도 마음이요, 말세를 안 가져오는 것도 마음이요, 마음에 따라서 말세를 안 가져올 수도 있고 가져올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말세가 온다 이렇게 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말세가 온다 안 온다를 떠나서 공부하는 겁니다, 이건. 온다 안 온다를 떠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계의 발전을 위해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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