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를 벗어나고 싶었던 추사의 열망은 1849년에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가 제주로 유배될 초기까지만 해도 9년이나 제주도에 머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당대의 권세가였던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1785~1840)이 그와 뜻이 통했던 인물이었고, 그와 절친했던 권돈인의 정치적으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의 인연은 무심한 것인가. 그토록 기대했던 김유근이 1840년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로 인한 그의 상실감은 한동안 그의 마음을 괴롭혔으리라. 아! 세월의 인고를 견딘 추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는 바로 차와 불경이다. 더욱 그를 위로했던 것은 초의의 편지와 차였다. 아울러 간간이 찾아오는 그의 제자들과 승려들, 가족들의 소식도 더할 나위없는 청량제가 되었다. 호의와 초의는 추사의 오랜 벗. 1846년 정월에 보낸 그의 편지엔 따뜻한 훈풍처럼 그의 언 가슴을 녹일 희소식을 들었던 것일까. 늦봄쯤이면 해배될 것이란다. 한껏 부풀었던 추사의 기대는 호의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가득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의, 초의스님들께

새해가 바뀌는 것을 기다림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스님의 편지를 받고, 곧 정월이 되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수행의 자취와 분율(分律)이 더욱 길하다니 천만번 위로가 됩니다. 나는 그대들이 축원하는 힘에 힘입어 몸과 마음이 모두 맑고 복됨을 얻었으니 복되고 복됩니다. 다만 객의 마음은 때로 답답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유배에서 풀려 돌아갈 날이 아마 늦은 봄쯤이 될 듯합니다. 이만 정오(1846)년 정월 4일 늑편

(縞師 草師 僉尊 歲新翹耿 卽於謂外 承梵 就認元正 戒履分律增吉 慰荷萬千 俗人賴師輩祝釐之力 身意俱得淸福 可喜可喜 但客懷有時悶苦 歸期似在晩春間耳 不式 丙午 正月 四日 便)

 

추사가 초의와 호의에게 이 편지를 보내기 전, 1845년 5월, 집으로 보낸 그의 편지에 ‘제주목사가 내직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여러모로 다행이다. 임금께서 지척에 계시고,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어 (내가)한번 회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더욱 감축할 일이다.’라고 했다. 당시 제주 목사는 이원조일 것이라 짐작된다. 이원조는 초의와도 교유했던 인물로, 추사와 가까운 사이었다. 따라서 이원조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내직의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임금에게 자신의 무고를 변론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듯하다. 실제 이원조가 추사의 해배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846년 정월 추사의 해배 논의는 본격화되어 거의 해배가 결정되었던 것일까. 그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갈 날이 아마 늦은 봄쯤이 될 듯’하다고 한 것은 이미 해배의 희소식을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 편지는 새해의 첫 날을 보낸 후, 5일 만에 보낸 편지이다. 새해가 되었지만 이 의미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누구나 새해는 새로운 계획과 희망으로 부푼다. 하지만 제주 유배지에서 그가 느낀 덤덤한 새해를 새롭게 일깨워 준 것은 바로 초의였다. 그가 ‘스님의 편지를 받고, 곧 정월이 되었음을 인정’했다는 대목은 이것을 알게 한다. 한편 객지에서 새해를 맞았지만 그의 마음은 ‘때로 답답하고 고통스럽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적인 그의 속내가 또렷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초의처럼 뜻을 나눈 벗을 염려하는 그의 정 깊은 배려는 ‘수행의 자취와 분율(分律)이 더욱 길하다니 천만번 위로가 됩니다’는 대목에서 이들의 오롯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호의는 완호의 제자로, 초의의 형이다. 완호의 제자 중에 삼의(三衣)라는 뛰어난 제자가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호의, 하의 초의였다. 이들은 모두 추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한통의 편지에 수신자가 둘인 사례는 추사의 이 편지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당시 편지를 쓰는 형식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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