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법보· 승보

덕과 진리 모두 망라한

원융무애한 자재로운

마하반야가 삼보에 있다.

원효대사는 삼보의 덕을

심덕·색덕·명호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4-9 귀경례

이렇듯 지관(止觀)의 수련을 통해 문(門)에 대한 의심을 풀어 버린다.

불교는 전진적(前進的)인 것이다. 삿된 집착을 버리고 부처의 도(道)를 넓히고 널리 선포하는데는 ‘나’라 하는 것, 조그만 나의 견해 같은 것을 버리고 우주적인 대아(大我)와 공정성(公正性)에 의하여, 방일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후퇴하지 말고 끊임없이 분발 전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아비발치라고 하는데 불퇴전(不退轉)이라는 뜻이다.

 

至心歸命 十方法界常主三寶(一拜)

시방(十方)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유사방(四維四方)인 동서남북과 상중하(上中下),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이렇게 열 개의 방위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시방이란 시간적으로 현재를 가리키는데 비추어 언제나 현재가 이 모든 방위의 중심이 된다.

법계(法界)는 종횡이 구족한 경계를 이름. 종횡이란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이 두루 갖추어져 만족한 상태에 놓인 세계라는 말. 이는 원효대사가 풀이한 말씀이다. 상주(常住)는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 한가지로 구비된 자리다. 불교에서 무상(無常)이라 할때는 반드시 유상(有常)을 내다보고 하는 소리며, 고는 극낙(極樂)을 전제한 명제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열반(涅槃)의 대아(大我)를 지향하는 말인 것과 같이, 번번히 염구(染垢)를 들먹거리는 것은 청정상(淸淨相)을 이에 대비하여 강조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다. 여기 상주(常住)라는 것은 상낙아정이라는 이 네 글자가 가리키는 그곳에 머물러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삼보(三寶)는 이미 말하였거니와 불보(佛寶)인 부처님과 법보(法寶)인 부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승보(僧寶)인 부처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회단체. 이 셋은 광명(光明)·정대(正大)·화합(和合)으로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광명의 반대가 암흑이고, 정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왜곡과 모략이며 화합을 그르치는 것이 파괴라는 것을 상상해 보라. 광명, 정대, 화합의 반대 세계, 즉 암흑과 왜곡·파괴로만 뒤엉킨 세계는 정말로 겁나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보를 성취해야 한다. 이 자리에는 불가사의한 덕과 진리가 모두 망라하여 갖추어져 원융무애(圓融無?)한 자재(自在)로운 마하반야(摩訶般若)가 무르녹아 있다. 이러한 마하반야의 삼보는, 밝고 바르고 사이좋은 이것은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아무도 깨뜨릴 수가 없다. 이 세가지 덕성(德性)을 갖추었을 때 어떠한 헐뜯는 쟁논(諍論)도 이를 깨트리지 못하고 물러난다, 이것이 금강불괴(金剛不壞)이다.

원효대사는 삼보의 덕을 세 가지로 보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첫째는 심덕(心德)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와 또 그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업상(業相)이 참으로 위대하여 생(生)으로부터 사(死)에 이르기까지 다 풀이하시었고 또 광대 무변한 부처님의 일을 이룩하시었다. 이것은 심덕의 체(體)를 표현한 것이다.

다음 심덕(心德)의 용(用)은 어떤 것인가? 부처님이 저 도솔천(兜率天)에서, 마야부인(摩耶夫人)의 태중에서, 룸비니원에서 나서, 커서, 장가 들고 성(城)을 넘어서, 입산(入山)하여, 수도하고, 마구니 항복받고, 중생을 교화하고 마지막으로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 입적열반하셨다. 이를 팔상성도(八相成道)했다고 한다. 팔상성도로써 인간이 가진 모든 현실적인 양상을 우리에게 보이면서 큰 공덕(功德)을 베푸셨다.

둘째는 색덕(色德)인데 이의 체와 용은 앞에서 얘기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셋째 명호(名號)에 큰 덕이 있다. 이름을 이어 관세음보살·아미타불·대세지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원효보살하면 그 명호 자체가 중생을 건지는 덕이 있어 대자대비를 표현하고, 부처님의 위대한 지경, 인간의 모든 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타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대비를 주로 삼아 그 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불법승 삼보의 보(寶)라는 글자에는 위의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5. 탄불게(歎佛偈)

如來妙色身 世間無與等

無比不思議 是故今敬禮

如來色無盡 智慧亦復然

一切法常住 是故我歸依

 

집은 청소를 하였다. 몸과 집을 쓸고 비질을 하여 청청히 해 놓고 다음엔 더 정성을 들여 오분향(五分香)을 피워 향기롭게 만들었다. 여기 우리들이 거처하는 집으로 대성자들을 모시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부처님의 이상을 상징한 모든 덕(德)을 구비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또 이를 각이덕상(各二德相)의 부분적으로 표현한 문수보살(文殊菩薩)·보현보살(普賢菩薩)·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 이러한 모든 부처님의 덕을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되새겨 잘 풀이하신 원효보살(元曉菩薩)등을 시방상주(十方常住)의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갖추어진 우리의 집, 법당(法堂)안으로 모셨다고 하자. 이와같은 거룩한 어른들을 모시고, 마주 대하고, 바라보노라니 그분들의 덕행(德行)이 장엄한 데에 대하여 환희심이 나고 칭양 찬탄을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분들께 게송을 한다. 게송은 범어로 〈가타〉라고 한다.

이 게송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여래의 미묘하고 유다른 색신은(如來妙色身) 우리의 눈에 환히 보이고 그리고 상상할 수 있어 묘한 빛갈의 카야(世間無與等), 그 몸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비할 바 없다(無比不思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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