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주 안 어느 곳에도

내가 없는 곳이 없다.

시긴적·공간적으로 얽혀

분리할 수 없는 존재 자각이

대승이며 수행문의 선행 조건

문에는 진여문·생멸문이 있다

止觀병행, 운용의 묘 터득해야

4-8 귀경례

또 문(門)을 의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어떤 수행문(修行門)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여래(如來)가 세운 수행문은 대단히 많아 과연 어떤 문에 의지하여야 여래가(如來家)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것도 실상은 해결할 수 없는 부질없는 의심이다. 문에 대한 의심은 다음의 적당한 방법으로 풀어 버려야 한다.

우주와 나는 하나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다. 먼저 이러한 명제(命題)에 의하여 나를 살펴 보기로 하자. 나를 거슬러 올라가 추궁해 보면 거기엔 무수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나의 두 부모, 두 부모의 각기 두 부모씩인 네 부모, 네 부모에서 여덟 부모, 여덟 부모에서 열여섯 부모, 서른 두 부모, 예순네 부모…… 하는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조상의 수량에 압도되어 버리는 나를 보리라. 그 막대한 조상들의 퇴적인 물구나무선 피라밋과 횡적인 얽설킴을 생각할 때 나란 존재는 그만 짓눌려 부셔져 버리고 말 것만 같다. 다시 미래의 자손의 분상에 의하여 붕괴되는 나의 모습에 눈을 돌려 보라. 이것은 보다 더 많은 기하급수적인 중대의 분산 과정으로 한량 없이 퍼져 나가 이내 전 우주는 수십억만명의 나에 의하여 꽉 차 버리고 말 것이다.

이렇듯 나를 시각적으로 고찰한다면 동체의식(同體意識)이란 마치 물 속에 녹아버린 각설탕 같아서 아무 데서도 나를 볼 수가 없으면서 실상인즉 이 우주 안에 어느 곳에나 내가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이렇듯이 금방 없어져 버리며 무수한 존재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또 공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다솔사 행원방(行願房)에 있다. 행원방 어느 장판위에 이렇듯 내가 동그마니 앉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구와 떼어 놓을 수 있느냐? 또 이 지구를 우주 성운의 태양계의 태양이 공전하는 그 궤도의 테두리 안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느냐? 나의 존재를 얹고 있는 이 우주적인 위치란 것은 이렇듯이 거시적(巨視的)인 막대한 량으로 어느 하나를 떼어 놓을 수도, 옴짝할 수도 없이 꽉 달라붙어 우주의 광대무변한 넓이로 퍼져 나갔으므로 이를 생각한다면 바늘 끝만한 점 하나의 위치라도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자리는 없는 것이다. 나를 주장하면서 우리가 발 디딜 곳이란 이 우주 안에선 아무리 찾아보아야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나는 종횡으로 얽히어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나 자체란 있는 듯이 없는 것이며 없는 듯이 있다는 자각을 갖는다면 ‘나’라는 개체(個體)는 결코 동떨어져 고립된 것이 아니고 사회 기구의 혜택을 받고 그리로 직결되어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칭하여 일심관(一心觀)이라,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 또는 대승(大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은 문(門)의 의심을 푸는데 마련되어야 할 선행조건이다.

문에 대한 의심을 푸는데는 다음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진여문(眞如門)에 의지하여 들어가는 수지행(修止行)이고, 둘째는 생멸문(生滅門)으로 들어가는 관상(觀相)이다.

지(止)는 사마타, 머물러 주의하고 한군데 마음을 집중한다는 것. ‘거기에 마음을 붙인다’고 한다. 생멸문이란 현상을 이름이다. 나고 꺼지고 하는 현상을 본다는 것이다. 관(觀)은 위빠사나. 생멸문에서는 이 관을 일으켜야 한다.

지와 관은 병행해서 수행해 나가야 한다. 지는 정신통일을 하여 생각을 집중시키는 노력, 관은 그 집중된 생각의 대상을 현상 세계에서 실제로 관찰하는 행동이다. 단순히 관찰할 뿐만 아니라 이 둘을 활용하여 대상으로서의 사물(事物)을 잘 처리하고 그 사물 안으로 들어가 행동화(行動化)해야 한다. 그러므로 결코 지관(止觀)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참선(參禪)하는 이는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화두(話頭)를 내걸고 여기에 정신통일을 한다. 이것은 지다. 그런데 마냥 참선만 하여 지에 그쳐 버려 포로가 되어 가지고 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참선의 목적은 정신통일을 하므로서 어떤 사물에 통찰력을 가지고 처리하여 가는 것인데 이러한 의의는 몰각해 버리고 지 한 가지에만 노상 머물러 있다. 이러다 한평생을 덧없이 보내 버리고 만다. 이것은 특히 우리나라 불교 선객(禪客)들의 통례다. 이래서야 사람 사는 모양도 아닐뿐더러 더욱이 승려가 걸어갈 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참선에서하는 지의 목적은 통찰력을 얻는다는 것, 즉 관이다. 지는 어디까지나 과정이요, 프로세스이지, 그것이 목적일 수는 없다. 목적은 관이다. 사물을 꿰뚫고 보아 잘 알고 잘 처리해 나가야 중생을 건지든지 자신이 부처를 이룩하던지 할 것이 아닌가.

관(觀)하는 사람은 첫째 법집(法執)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내가 아는 것, 나의 이데올로기에 붙들리어, 멀뚱한 눈으로 끌려다니는 해괴한 꼴은 시정해야 한다.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이라고 하니까 이 마음 심자(心字)를 옳게 해석을 못하여서 그것이 바로 소박하게도 마음이라는 줄 알고 ‘마음이 없으면 산도 강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론적(認識論的)인 착오를 저지르는 이가 버젓이 우리 불교계에 활보하고 있다. 그 자신의 마음이 없다고 어떻게 산이 없어진단 말인가? 이런 말은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지 도무지 통찰력이라고 할 수 없다. 관이 없으면 이러한 오류에 빠진다. 지와 관을 떼 놓지 않고 함께 수련해 나가는데서 우리는 운용의 묘(妙)를 터득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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