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의 길을 가다- 불교 운동가 만해와 범어사, 통도사

굴욕적인 日조동종 맹약 반대 위해
임제종 시작… 만해 스님 관장 대리
1911년 첫 총회, 범어사에 종무소 설치
일제 탄압으로 좌절 선학원 설립 씨앗

양산 통도사서 대장경 1천여 부 열람
‘불교대전’등 대중서 잇달아 발간

1910년대의 만해 스님은 불교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다져갔다. 실제 1915년 만해 스님은 영·호남 지역 사찰(내장사, 화엄사,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쌍계사, 백양사, 선암사 등)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어 대중들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하지만 한일합방과 함께 조선의 일본지배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불교계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0년 10월 6일 조동종맹약, 1910년 11월 6일 맹약에 반대한 임제종 운동의 전개, 1911년 6월 3일 사찰령 반포 등 격랑이 일었다.

이중 임제종 운동은 항일과 친일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던 사건이었고, 그 중심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있었다.

조동종 맹약은 단순히 한일 간의 특정종파가 친선을 도모하고 우의를 돈독히 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원종(圓宗)이 근대불교 최초의 교단이었고, 불교발전을 위해 한국 불교의 본산으로 각황사(覺皇寺)를 창건하고, 명진학교를 불교사범학교로 승격 개편하는 등 불교쇄신과 발전을 위해 진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일본 조동종의 고문을 위촉하고, 조동종의 한국 포교에 편리를 도모할 것을 체결했다. 이회광은 이 조약을 처음에는 불교계에 공표하지 않았으나 맹약의 내용이 전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 부산 범어사<사진 왼쪽>와 양산 통도사<사진 오른쪽>의 전경. 범어사는 조동종 맹약을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의 산실이었으며, 통도사는 만해 스님이 <불교대전>을 집필하기 위해 대장경을 열람했다.
만해 스님, 박한영 스님 등이 주축이 돼 1910년 10월 5일, 광주 증심사에서 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인원 부족과 준비 소홀로 열리지 못했다. 이듬해인 1911년 1월 15일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송광사에 임제종 임시종무원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김경운 스님을 관장(管長)에 임명했지만, 연로한 탓에 만해 스님이 권한 대리의 소임을 맡게 됐다.

1912년 하동 쌍계사에서 제2총회를 개최할 때는 임제종의 종지를 널리 드날릴 것을 결의하고, 부산 범어사가 임제종에 들어오도록 권유하였다. 처음 범어사는 가입권유를 따르려하지 않았지만, 임제종 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길 것을 약속한 다음에야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임제종은 동래·초량·대구·경성 등 4개 지역에 포교당을 설치하고, 임제종을 그 칭호로 삼았다. 이른바 남당(南黨, 임제종)과 북당(北黨, 원종)의 갈등과 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11년 6월 3일 사찰령(제령 제7호) 7월 8일 사찰령 시행규칙(총독부령 제84호)을 연이어 반포해 두 당파의 싸움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전락해버렸다. 사찰령이 반포되면서 30본사 또한 이미 법으로 정해졌고, 30명의 주지가 차례로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사법(寺法)을 제정하는 일에 봉착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원종을 인가해주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사찰령 반포 이후 종지의 칭호를 한가지로 통일하는 일은 당시 불교계의 큰 숙제였고, 이는 조선총독부에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결국 총독부가 내린 결론은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체제에 기초한 선교양종(禪敎兩宗)이었다. 이른바 ‘조선승니의 법계품승(稟承)예일반(例一斑)’ 속에는 ‘승니의 성립’, ‘승니의 입신’, ‘승니시험의 제도’, ‘법계승진의 규제’, ‘법계의 명칭’ 등을 규정한 것이다. 총독부의 이 조치로 원종과 임제종은 간판을 내려야 했고, 1912년 6월 ’조선선교양종 각 본산주지회의원‘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그러나 권한 대행이었던 만해 스님은 범어사에서 임제종 종무원의 간판을 걸고 활동을 지속했고, 1912년 4월에는 서울 대사동(大寺洞)에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을 개설했다. 훗날 선학원의 설립이념을 제시한, 당시 임제종의 관장대리인 만해 스님이 한국불교(임제종)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싶은 포부가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님은 이 일로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압송됐다.

1912년 6월 26일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이 경상남도 지사에게 내린 통첩문까지 보내면서 임제종 활동을 막았고, 임제종 운동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같은 임제종 운동은 만해 스님이 민족주의 운동가로 거듭날 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31년 만해 스님이 임제종에 대해 술회한 부분에 의하면 “조선불교의 부흥을 도모할 때 원종(圓宗)의 맹약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단을 별도로 세워야 원종을 자멸케 함이 첩경이라는 견지에서 조선 고유의 임제종을 창립했다. 이로서 조선불교는 그대로 살아있을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임제종 운동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조동종 맹약을 지켜본 만해 스님 안에 민족의식이 폭발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됐고 이는 만해 스님의 인생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불교의 매종행위를 차단하고 자주적으로 한국불교의 정신을 고수했다는 데에 역사적, 불교사적 의의가 있다”면서 “나아가 임제종 운동은 이후 한국불교의 개혁운동, 민족운도의 정신적인 근원이 됐다”고 평가했다.

▲ 만해 스님이 추진한 임제종 중앙포교당 건립 자금 모금이 불법이라 하여 일제가 만해 스님에게 구형한 판결문. 사진= <만해 한용운 연구(김광식 著)>
이 무렵 만해 스님은 출판 사업을 통한 불교 대중화와 의식 개혁 운동을 펼쳤다. 만해 스님의 역작 중 하나는 바로 <불교대전>이다.

불교 교리를 일반대중을 위해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개론서가 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만해 스님은 1912년 여름 양산 통도사에서 <고려대장경>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장경각에 있는 1511부, 6802권을 빠짐없이 열림했으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변용해 요약 정리했다. 이에 대한 초록본만 444부에 이른다고 한다.

앞서 발간한 <조선불교유신론>이 승려를 상대로 한 이념적인 저작이라면, <불교대전>은 불교교를 현대화해 대중에게 제시한 실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대전>은 1914년 4월 국반판 800페이지로 범어사에서 간행됐다. △서품 △교리강령품 △불타품 △신앙품 △업연품 △자치품 △대치품 △포교품 △구경품 등 9개 품으로 구성된 <불교대전>은 만해 스님의 독창적인 대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전은 화엄경으로 약 400여 구(句)가 되고 다음이 열반경으로 200여 구(句)가 된다. 그리고 반야경, 법구경, 대승기신론, 중론, 사분율 등 대소승경전과 율장, 논서 등 총 444종의 경전과 율장, 논서가 등장한다.

당시 시대 언어로 교리서를 발간한 만해 스님에게 찬사는 쏟아졌다. 불교 잡지 <해동불교> 제6호(1914년 4월)에는 “(만해 스님의 <불교대전>은) 광세의 대저작이며 불교 포교의 교과서”라고 평가하고 했며, 또 다른 잡지에는 일독(一讀)을 권하는 광고문이 실리기도 할 정도였다.

<불교대전>의 특징에 대해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한 신문사의 칼럼을 통해 “각 경전의 명구를 뽑아서 9장으로 내용을 분류했는데, 특이한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자치품과 가정, 사회, 윤리, 국가 등 대사회적인 주제를 모은 대치품, 포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포교품”이라면서 “이것은 사회구제와 중생교화, 그리고 해탈과 열반이라는 불교본연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경전에 준하는 ‘품(品)’자를 넣었다는 점도 독특하다”면서 “어쩌면 만해 스님은 이 책이 ‘불교성전’이 되어 장구한 역사 속에 찬란한 빛으로 남기를 염원했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불교대전>을 역주한 이원섭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자유자재로 노리는 듯한 관자재보살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해 스님은 거뜬히 해치우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시기 만해 스님은 대중들의 의식 개혁을 위한 교양 서적 발간에도 힘썼다. <정선강의 채근담>을 발간한 것이다. 전북 순창 구암사에서 머물 때 강의한 것을 묶은 것으로 1915년에 탈고해 1917년 동양서원에서 간행됐다.

이를 발간한 이유도 명확했다. 불교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수양을 위해서 였다. 만해 스님은 “분수에 맞지 않는 권력을 위해 남의 턱짓하는 밑에서 한 허리를 만 번이나 구부리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나, 불의한 복리를 위해 비굴하게 살면서도 태연한 자들을 일깨우겠다는 일념으로 ‘조선 정신계 수양의 거울’로서 이 책을 편찬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30대의 만해 스님은 전국 산사를 돌며 불교 대중화와 민족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방대한 원력으로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채근담>을 써 냈고, 임제종 운동을 주도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남도의 사찰은 만해 스님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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