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강좌 - 이태호 교수(명지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분기마다 이야기로 풀어가는 고문헌강좌 열 세 번째 시간은 ‘한국 고판화의 아름다움과 불교’였다. 2월 26일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를 통해 불교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고판화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뛰어난 판각 기술과 깊이 있는 예술성을 느껴본다. 강의는 <한국 옛 목판화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중앙대학교 송일기교수와 함께 발표 했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이태호 교수는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였으며 전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예술대학원장이다. 전남 문화재위원을 지냈고 현재 경기도와 충남 문화재위원이다. 저서로 <옛 화가들은 우리의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옛 화가들은 우리의 땅을 어떻게 그렸나> <조선후기 산수화전> <조선후기화조화전>이 있다.

목판인쇄의 시작은
신라 8C 불경간행에서 비롯

이후 고려시대 거치며
동아시아 최고 기술 수준까지 올라
대장경ㆍ사경ㆍ변상도 등
다작(多作)통해 고려 미감 살려내

조선, 정조때 제작된 <부모은중경>
불경 영향 받아 뛰어난 회화성 자랑

최적의 재료에서 나온 최고의 판화
목판화는 한국문화사상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1300년 전 신라 때 조성한 세계 최고의 목판화 작품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판각기술과 예술성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가히 ‘목판화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목판화 발달은, 우선 천혜의 자연이 가져다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팔만대장경의 재료로 쓰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그리고 박달나무ㆍ단풍나무ㆍ후박나무 등은 단단하면서도 칼이 잘 들어 목판 인쇄문화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나무가 무르면 반복해서 여러 장 찍을 수 없고, 너무 단단하면 새기기가 힘들다. 그런데 특히 우리 산야에 흔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등은 그 두 가지 점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최선의 재료이다.

목판화가 발전한 또 다른 요인으로 종이의 생산도 한 몫 하였다. 우리나라 닥종이는 중국 상피지나 죽지에 비해 양질이었다. 이를 더욱 발전시킨 ‘고려지(高麗紙)’는 당대 중국에서도 최고의 명품으로 상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닥나무는 섬유질이 질기고 길어서 좋은 종이를 만들게 했다.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닥나무는 같은 닥나무임에도 한국의 것보다 섬유질이 짧고 푸석푸석하다. 이 같은 종이와 나무는 그야말로 우리 풍토가 제공한 목판화 예술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목판화에 사용된 물감은 잘 아다시피 수성 먹(墨)이다. 먹의 농담을 강조하는 수묵화(水墨畵)와 달리, 목판화는 고른 농도의 짙은 먹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농도 조절을 위해 탁주나 식물성 동백기름이 쓰이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단사류(丹砂類)를 첨가하기도 했고, 사향과 장뇌 같은 향료나 석류피ㆍ비목피 같은 방부방충제를 썼다고 전한다. 이는 동물성이나 광물성 기름 혹은 화학재료를 개발한 서양 판화와 비교도했고, 사향과 장뇌 같은 향료나 석류피ㆍ비목피 같은 방부방충제를 썼다고 전한다. 이는 동물성이나 광물성 기름 혹은 화학재료를 개발한 서양 판화와 비교도되지 않는다. 나무와 종이의 선택부터 수묵으로 찍는 과정까지 우리 고판화는 요즘 유행어로 ‘웰빙’ 문화에 가까운 예술 영역이라 하겠다.

이러한 최적의 목판화 재료를 보유하고 있던 만큼,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판화기술이 발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목판화는 중국, 일본과는 달리 다색판화나 동판화 기술을 배제하고 오로지 단색 목판화에 천착했다. 따라서 단색 선묘의 옛 목판화는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한국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찬란한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 한국에서 활동한 독일인 신부 에카르트(Andreas Eckardt)는 자신의 저서 <한국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1929)>에서 중국이나 일본 미술과 다른 조선 문화의 고유한 유물로 고려 불경과 조선 후기 서적의 목판화를 들고 그 우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판화는 그림의 시각적 효용성을 빌어 문자 텍스트의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세 종교예술에서 주로 민간을 대상으로 한 교화에 활용되었다. 고려나 조선시대 고서 중 불교와 유교 서적에 삽화가 많이 쓰인 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사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현상을 그림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의학ㆍ천문ㆍ농학ㆍ군사ㆍ지리 등의 기술서적에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삽화에는 이야기 전개식의 서술적 구성이 즐겨 쓰이게 된다. 한ㆍ중ㆍ일 동아시아 지역의 초기 인쇄물은 거의 대부분 불교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고려불교 판화, 사경변상화 기반 축적
우리나라 목판인쇄의 역사는 대략 신라 8세기 전반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750년 경의 <탑인다라니(塔印陀羅尼)> 실물이 1995년에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3층석탑 모양을 목판에 새겨 종이에 사방연속 무늬로 찍은 일종의 다라니이다. 이 탑인자료는 인쇄문화사에서 초기 단계의 귀중한 목판화로 평가할 수 있다. 화엄사의 탑인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같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과 거의 동시기에 제작된 점으로 미루어, 신라 때 불경의 삽화로 그려지는 변상도 판화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대장도감의 주관 하에 대장경이 판각되었고, 이어서 대각국사 의천이 수집한 교장(敎藏)을 교장도감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복원하여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이들은 실로 방대한 불경 판각사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의 인쇄 및 판각 기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의례용이 아닌 독경용으로 간행했다는 점은 본격적인 인쇄문화시대로 진입하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불교를 후원한 왕실과 국가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붓으로 쓴 사경을 개별적으로 제작하여 봉헌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당시 사경은 공덕을 빌며 납탑 또는 복장을 목적으로 정성스럽게 제작되었다. 특수하게 만든 두툼한 감지(紺紙)나 상지(橡紙) 바탕에 귀한 금니(金泥)나 은니(銀泥)를 사용하여 고급스럽게 조성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경의 앞머리에는 대부분 경전의 내용을 도해한 변상화가 그려졌다. 고려의 불교판화는 곧 이런 사경의 변상화를 기반으로 축적한 성과이다.

사경의 변상도를 방불케 하는 목판화로 13세기 중엽의 <화엄경>변상도를 들 수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화엄경> 변상도 판화에는 중국 송ㆍ원대 도상이나 장식문양이 혼용되어 있으며, 중국 판화에 비해 선이 굵은 편이다.

이보다 앞서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본격적인 변상도는 1007년에 개성의 총지사(摠持寺)에서 제작한 <보협인다라니경>이다. 이 변상도는 세로 5.4㎝, 가로 10㎝의 소형 판화이다. 작은 화면에 단순한 표현으로 여러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을 별다른 구획 없이 서사적으로 구성하였다. 10세기 후반에 간행된 중국의 오월판을 바탕으로 조성한 것이나, 그보다 고려본 판각이 한결 정성스럽다.

불경의 변상판화는 대부분 경전의 앞쪽에 한 장이 실려 있으나,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초조본 <어제비장전>이나 1363년에 복각된 <금강경>등은 본문 사이나 윗편에 배치되어 본격적인 삽화본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판화는 중국 송ㆍ원대 대장경을 모본으로 삼았으면서도 뚜렷이 고려적 요소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예컨대 북송 판을 바탕으로 제작한 고려의 <어제비장전>의 경우, 단순히 중국 본을 임모(臨摹)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중국 북송대 <어제비장전> 판화에 새겨진 산수 표현이 험준하고 뾰족한 암산(巖山)으로 채워진 반면, 고려의 그것은 산 능선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우리의 풍광을 닮은 듯한 인상은 고려 고유의 실경산수화로 착각하게 한다.

본격적인 삽화 형식의 고려시대 판화 불서로는 <금강경>과 <부모은중경>을 들 수 있다. 성암고서박물관 소장의 삽화본 <금강경>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남원부 관아에서 간행된 사례이다. 각 장은 상ㆍ하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경문의 내용을 요약한 판화가 배치되고, 하단에는 경문이 수록되어 있다. 판화는 <영산회상설법도>를 비롯하여 각 품의 핵심이 되는 대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리고 맨 끝에 <호법선신장도>를 넣어 한층 불경의 장엄성을 돋보이게 하였다. 지방에서 판각되어 각법이 정교하지 않고 인쇄 상태도 깔끔하지 않으나, 판화가 가장 많은 고려 불경이라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높다.

우왕 4년(1378)에 간행된 <부모은중경>은 이후 조선시대 간행된 80여 종의 <부모은중경>의 준거가 된다. <부모은중경>은 대표적 유교판화 서적인 <행실도류>와 더불어 한국판화사 연구에서 질과 양으로 쌍벽을 이룬다.

조선시대, 고려 못지 않게 다수 불경 제작
조선시대에도 고려 못지않게 많은 불경들이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고려본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수준이 유지되었으며, 새로운 변모도 보인다. 그런데 중종대 이후 간행된 불서에서는 세련미가 떨어지는 가운데 조선화가 시도되었고, 지방 곳곳의 사찰에서 제작되면서 다변화하게 된다. 16~17세기 덕주사에서 간행한 <불설아미타경>, 연기사에서 개판한 <불설대목련경>, 그리고 선운사 및 불암사에서 판각한 <석씨원류>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장면마다 삽화를 끼워 넣은 조선적인 그림책 목판본이라 할 수 있다.

정조 때 왕실에서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한 <부모은중경>이 조선시대 불경 판화 중에서 가장 참신하고 뛰어난 회화성을 지녔다.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정조의 어명으로 특별히 간행되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각 장면마다 기존의 서술적 표현이 사라지고 모필 선묘의 맛을 최대한 회화적으로 살린 판화 변상도로 꾸며져 있다. 그 필법은 전형적인 단원 김홍도의 양식이다. 당시의 목판이 용주사에 고스란히 전하며, 목판을 구리로 주조한 동판도 남아 있는데, 수준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특히 생생한 판각 솜씨는 그 판자체가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1434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에 실린 판화들은 조선사회의 유교적 ‘충효’ 사상을 역설한 삽화 형식이다. <삼강행실도>는 ‘진주 사람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에게 삼강윤리를 교화시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책이다. 백성들이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효자ㆍ충신ㆍ열녀의 사례를 110명씩 선발하여 각각의 전기와 함께 판화로 꾸미게 하였다. 3권 3책본으로 330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밑그림 그리기와 목판 새김의 판화가 소용되는 작업이었다. 기초작업과 간행까지 대략 6년에 걸친 대규모 국가적 사업이었다.

책의 앞면에는 수록 인물에 대한 일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판화를 실었고, 뒷면에는 개개 인물의 행적을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본문의 체제는 먼저 인물의 행적을 쓰고 여기에 칠언시로 칭송을 덧붙였다. 판화들은 2~7개의 이야기를 한 화면에서 전개한 설화적 구성이나 각법에 고려시대 불교판화 전통이 수용되어 있다. 특히 다원적 장면이 지그재그 구도로 조합된 장면들은 불화 전통과 유관하다. 초간본 판화의 밑그림은 당시 안견을 비롯하여 유명 화원들이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1천년 목판화 기술은 인쇄문화의 꽃
우리나라 목판화는 불교의 수용과 함께 발달하였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목판본으로 제작된 불교 대장경은 중국의 송(宋)ㆍ원(元)의 불경을 참작하였지만, 고려의 개성미가 물씬하다. 11세기 <초조대장경>부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 이르기까지 중국 변상도를 그대로 옮겨 번각하지 않고, 고려 화가의 손으로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새기는 과정에서 고려화한 것이다. 그 덕분에 고려 불화나 사경 변상도들과 함께 목판화는 고려 문화의 귀족적 세련미를 간직하고 있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불경 제작이 활발하였다. 정치적으로 억불정책을 내세웠으나 왕실은 물론 민간의 저변에 불교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그 증거가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제작된 목판본불경과 목판화이다. 조선 초기 15세기에는 고려 형식이 전승되었으나 16세기 이후 심하게 퇴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시대 목판화의 고졸한 형태미와 질박한 선 맛은 조선 민예의 감성과 상통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 판화의 형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고려시대 변상도의 판화 기법이었다.

천 년 이상을 꾸준히 이어온 목판화는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 책을 가진 나라’라는 명성에 손색없는 문화유산인 셈이다. 우리의 옛 고서가 문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구현하였기에 책의 목판화도 그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책의 삽도로 등장하는 목판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예술성을 성취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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