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귀경례

진리를 의심하게 되면

발심에 장애가 되고

망설이다 아무것도 못한다

 문(門)을 의심하면

수행에 장애가 되어

갈팡질팡하게 된다

 물론 부처님 외에 많은 대종사(大宗師), 큰 스님네와 큰 보살(菩薩)들 즉, 마명보살(馬鳴菩薩)·용수보살(龍樹菩薩)·무착보살(無着菩薩)·세친보살(世親菩薩) 또는 달마대사(達磨大師)·천태대사(天台大師) 등 위대한 스님네들이 많이 나시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또 인도나 중국에서 그 밖에 여러 나라에서 대성자(大聖者)들이 많이 나셨지만 그 성자들 가운데 원효보살은 가장 뛰어나시고 어느 불 보다도 부처님의 전체적 부분을 종횡무진으로 남김없이 설명하시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인간 생활에 있어서 탁월한 체득을 하셨다. 그러므로 8백년 전에 우리들의 대선배인 고려 대각국사(大覺國師) 같은 어른이 이미 해동교주 원효보살(海東敎主 元曉菩薩)하고 보살 칭호를 바쳤던 것이어서 우리들도 지금 그분 말씀을 따라 이렇게 원효보살 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럼 원효보살은 어떤 분인가? 이분은 니르바나를 잘 아신 분이고 또 이를 잘 실천 궁행하신 분이다. 다시 원효보살 자신의 말씀을 빌려서 얘기한다면, 만일에 사람이 이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는 것, 우주의 공정성(公正性)을 잘 알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크나큰 신근(信根)을 일으켜야만 된다.

그렇다면 믿음의 뿌리가 되는 이 신근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믿음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알뜰한 데 있다. 알뜰한 믿음은 애써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신(信)을 닦아서 얻었을 때 이에는 무궁한 공덕(功德)이 있다. 이런 것을 설명하셨다.

신리(信理)는 실유(實有)하다. ‘믿음의 원리는 무엇보담도 알뜰한 데 있다’하는 것은 신의 체(體)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신(信)은 일체법(一切法)을 가히 얻을 수가 있다. 또 신은 알뜰하기 때문에 아주 평범하고, 그리고 신은 애쓰고 노력하면 얻어진다 하는 것은 신의 상(相)을 설명하신 것이다. 신이 이러한 체와 상을 갖추면, 또 이는 중생에게 많은 이익을 끼친다 하는 것은 신의 용(用)을 말한 것이다.

즉 신리실유 신수가득 신수득시 유무량공덕(信理實有 信修可得 信修得時 有無量功德)이라고 한 것이 이런 뜻이다. 해동교주 원효보살께서는 이렇듯 신의 체·상·용에 걸쳐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어 얼마나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분의 가르침인 대사회성을 위하여는 이를 어떻게 건설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두 가지 극단을 여의어야 하고, 내노라 하는 아집(我執)과 내가 아는 이데올로기, 법집(法執) 따위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한 해탈(解脫)을 얻는데는 중도(中道)의 지경에 들어가야 한다. 중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주의 본체인 열반(涅槃), 니르바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를 정확히 아는데는 확고 부동한 신념이 선행조건이다. 그 확고부동한 신념은 알뜰한 것이어야 하고, 알뜰한 신념은 노력하면 가히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노력하여 가히 얻어진 신념에는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하였다. 간단한 것 같지만 이 얼마나 간곡하고 꿰뚫어진 설명일까보냐. 원효보살은 이렇게 설명하시고 또 자신께서도 이렇듯이 실천 궁행하셨다.

두 가지 극단을 여의어야 한다는데는 또 이런 중요한 얘기가 있다. 믿음에 반대되는 의혹(疑惑)이라든지 의문이라든지, 의심나는 일은 밝히어 끝내는 아주 이런 것이 하나도 없어져야 된다. 의심은 완전히 버려야 된다. 그런데 공리(公理)라고 할 수 있는 믿음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첫째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진리 자체를 의심하게 되면 발심(發心)에 장애가 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늘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아무 일도 못하고 만다. 의혹의 철학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데카르트도 밝히어진 진리, 수학의 원리인 공리(公理)같은 것을 의심한다면 과학적 연구에 진전을 볼 수 없다고 말하였다. 진리가 존재한다는 그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과학의 성립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의혹을 지성(知性)의 무기로 존중하는 사람이라도 일단 학문에 들어간 이상 그러한 부질없는 망설임은 버려야 되는 것이다. 원효보살의 말씀은 이를 명확히 지적해 놓으신 탁월한 견해이시다.

둘째, 문(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문을 의심하면 수행에 장애가 되어,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된다. 문이란 진리에 이르도록 부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방법론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길이므로 안심하고 믿어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믿고 수행을 해 나가므로서, 그 도상에서 한 가지씩 결정을 보고 매듭을 지어 나가게 된다.

의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풀이한다면 가령 대승(大乘)이라는 진리를 의심하는 경우에 이를 하나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많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나라고 본다면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다시 진리를 많은 것이라고 한다면 대승의 진리도 하나로서 완전한 진리는 아닐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구체적인 문제로 중생의 구제에 이론(異論)이 제기되는 것이다. 우리가 구제하고 교화한 중생은 한 사람이냐, 많은 종류의 인간들이냐? 하나이냐 여러 가지냐? 많은 중생을 교화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분별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지느냐? 동체의식(同體意識)은 어디서 나오느냐? 대자대비로 보아 중생과 나와 똑 같다고 하는 생각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나의 살이 떨어질 경우에 모든 중생의 살이 떨어지고 모든 중생이 악도(惡途)에 걸리어 신음할 때 과연 나도 똑같은 고통을 받게 되느냐? 이런 의심을 위한 의심이 자꾸만 생겨난다. 이렇듯이 의심한 경우에는 그만「아이쿠, 이러니 저러니 복잡한 생각할 필요 있나! 그냥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내버리고 말지」하고, 드디어는 방일(放逸)·태만(怠慢)해져 버린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