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a in Comic & Ani - ⑤ 윤태호의 ‘미생’

바둑 대국·에피소드 조화 ‘눈길’
바둑 한 수 한 수가 화두며 공안
‘眞我’ 찾는 사람에게 기회 온다

▲ 〈미생〉의 한 장면들. 바둑 기사를 꿈꿨던 청년이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취직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매회 머리에 있는 대국 기보와 에피소드의 절묘한 조화는 작품의 다른 볼거리다.
누군가 그랬다. 바둑은 인생과 같다고. 가로 세로 19로의 바둑판에서 흑과 백은 서로 번갈아 착수하며 이내 경계선에서 한판 싸움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흑과 백의 돌은 삶과 죽음이 발생하며, 한수 한수마다 수많은 격언과 교훈이 파생된다.

한국 만화가 중 최근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윤태호가 2012년 1월부터 2013년 7월까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연재한 〈미생〉은 제목만 보면 바둑 만화로 보인다. ‘미생’은 완성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바둑용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첨병에 있는 치열한 영업 현장의 이야기이자 한 젊은이의 취업 일기이다.

〈미생〉은 11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가던 청년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고 ‘회사’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입사한 장그래는 특유의 통찰력과 인간미, 배려심 깊은 상사들의 도움으로 드라마와 같은 입사 P·T 시험을 거쳐 계약직 사원증을 목에 건다.  그리고 2년 동안의 신입 계약직 사원 분투기가 총 145회 안에서 펼쳐진다.

〈미생〉의 매력 중 하나는 바둑 대국의 기보를 제시하고 그에 맞춰 이야기를 구성하고 보여준다는 것이다. 작가가 제시한 기보는 한국 바둑을 변방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린 대국이었던 제1회 응씨배 결승 제5국(최종전)으로 한국 조훈현 9단과 중국 네웨이펑 9단이 대결을 펼쳤다. 여기서 조훈현은 유력 우승 후보인 네웨이펑을 145수 만에 물리쳤고, 첫 세계 챔피언이 된다.

작가가 굳이 조훈현의 세계 데뷔 대국의 기보를 매회 머리에 올린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런 스펙을 가지지 못한 변방의 장그래가 대기업이라는 전쟁터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 작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현대의 직장생활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월급과 승진만이 아닌 직장생활 자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이 만화를 시작했다.

▲ 〈미생〉의 한 장면들. 바둑 기사를 꿈꿨던 청년이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취직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매회 머리에 있는 대국 기보와 에피소드의 절묘한 조화는 작품의 다른 볼거리다.
실제 〈미생〉의 장그래는 매일 하루를 자신만의 기보를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안에 펼쳐졌던 이야기들을 ‘수담(手談, 바둑의 다른 말)’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주인공 장그래는 자신이 주어진 바둑판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장그래의 성찰과 발전 과정은 이전 ‘시마 시리즈’와 같은 비즈니스 장르 계열의 만화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시마 시리즈’의 주인공 시마 코사쿠가 온갖 처세술로 라이벌을 물리치고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미생〉의 장그래와 조연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모든 일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은 화두에 몰두하고 있는 참선 수행자와 비슷하다. 바른 안목(正眼)을 갖고 끊임없이 올바르게 노력해야(正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자신의 일에 성공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바둑을 선(禪)에 비유한 이유도 여기 있다. 바른 안목을 지니지 않고서는 좋은 수를 내놓기도 어렵거니와 넘어서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둑에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는 격언도 존재한다. ‘위기십결’을 정리하면, △욕탐불승(欲貪不勝 욕심을 내면 진다) △입계의완(入界宜緩 적의 세계에 들어갈 때에는 누그러뜨려야 한다) △공피고아(攻彼顧我 적을 공격하기 전에 자기의 결함을 돌아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폐석을 버리고 선수를 장악하라) △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취하라) △봉위수기(逢危須棄 달아나도 효과가 없으면 버려라) △신물경속(愼勿輕速 경솔하고 졸속하게 움직이지 말라) △동수상응(動須相應 적의 완급을 보아 응수하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적이 강할 때는 오로지 자신의 보전에 힘쓰라) △세고취화(勢孤取和 고립된 형세에서는 화평책을 써라) 등 이다.

선에 1700공안이 있듯이 바둑은 한수 한수가 모두 화두고 공안이다. 사실 바둑뿐이겠는가. 우리네 인생사 순간 순간이 모두 수행이고 화두이기 때문에 늘 바른 안목을 가지고 정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둑에서는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이라 말한다. 두 집을 만들기 전은 모두 ‘미생(未生)’ 즉,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말, 상대로부터 공격받을 여지가 있는 말이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만의 인생 바둑을 둔다. 수 많은 인연과 사건들이 세상과 나의 바둑판에 채워진다. 나의 바둑이 ‘완생’으로 끝이 날지 ‘미생’으로 마무리될 지는 매일 매일 던지는 나의 돌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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