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죽고 사는 것도 다 놔지게 된다

▲ 그림 최주현

우리가 한생각을 잘 굴려서 내면은
일체 모든 게 생기고 구해지고
한생각을 쉬게 되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마음이라는 자체가 바로 우주 삼라만상을 빚어내기도 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을 다 마음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마음으로 짓기도 합니다. 이 마음은 정말 어디다 비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을 잘 굴려서 내면은 일체 모든 게 생기고 구해지지만 한 생각을 쉬게 되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두가 소멸된다 이 소립니다. 이 고가 다 소멸된다는 그 자체가 한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다 소멸될 수 있을까 하지만,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생사에 관한 건도 모든 것이 다 놔집니다.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면은 고에서 벗어나는 거죠.

우리가 죽는다 산다 하는 것은 이거 말짱 거짓말입니다. 이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듯이 그와 같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뭐 별건가요? 이 무명을 쓰고 있다가 무명이 벗겨지면 다른 무명을 쓰고 다시 나오고. 그래서 마음의 발전을 해야만이 지금 산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의 발전 즉, 정신계의 발전을 해야만이 물질계의 발전도 할 수 있거니와 또는 여러 가지로 중용을 할 수 있어서 자동적으로 자유자재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한 그릇 먹어도 그것을 해서 올리는 자는 누구며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해서 올리는 자도 자기요 받는 자도 자깁니다. 그런데 내면으로 볼 때 내가 먹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먹는 것입니다. 몸속에도 수십억 마리의 생명들이 모두 들어 있음으로써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누가 먹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 한 그릇을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생각을 잘하면 공양이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 하면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것이 아니니 그래서 공양입니다. 그래 공양을 올리게 되면 공덕을 입는다 이런 소립니다. 공양이 아니고 개별적인 밥이라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공양이라는 것이 내 한 몸체의 조직체 즉, 모든 생명들이 다 같이 한 그릇을 놓고 다 같이 먹는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먹으니까 다 같이 마음을 내서 모두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서로서로 작용을 하고 작용을 해주고 이러면서 사니까 공동체고, 그러니까 바로 공덕이 되죠. 공덕이 된다는 뜻도 그렇지만 공양을 올린다 하는 것도 그렇고 공향(共香)을 피운다 하는 것도 이런 데서 오는 겁니다. 공양을 올리면은 이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전부, 만물만생이 전체가 다 한 그릇을 놓고 내부나 외부 전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덕이 될 수밖에요. 나를 떠나서 상대로 믿는다면, 상대를 믿는다면 공덕이 될 수가 없죠. 그리고 공양이 될 수가 없고요. 그리고 마음의 향이 될 수가 없고요. 공향이 될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공덕이 되게끔 공양을 올리고 공향을 피우고 공덕이 되게끔 행을 하고 마음을 내라 이거죠. 바깥으로 믿고 바깥으로 끄달리고 바깥으로 아무리 공양을 많이 올리고 시주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조직체로서 운영을 하는 거지 조직체가 아니고는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회사도 조직체가 돼 있기 때문에 회사를 운영을 하는 겁니다. 조직체라는 이름 없이도 말입니다. 회장이 있고 사장이 있고 직원이 있고 총무가 있고 상무가 있고 이렇게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공동체고 그렇듯이 우리가 공양 한 그릇을 올린다 하면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공양입니다. ‘이거는 내가 먹으니까 아무렇게나, 뭐.’ 이렇게 하지 말고 단 한 숟가락을 먹더라도 공양을 올리십시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도 공양이요, 둘이 아닌 바로 공생(共生)ㆍ공용(共用)ㆍ공체(共體)ㆍ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는 이 전체가 바로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먹든, 한 그릇을 바치든 공양은 공양입니다. 더불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제사 지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는 사람은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천도를 할 수가 있는가 하면 내가 먹는 밥 한 그릇 가지고도 지극하게 공양을 올릴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거를 알면은 아주 멋진, 자유권을 갖고 행할 때 그게 공덕이죠, 모두가. 내가 먹는다고 해서 공양이 아니고 남을 준다고 그래서 공양이고, 이게 아닙니다.
향을 하나 피워 놓는다 하더라도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우주 삼라만상을 한 찰나에 돌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 물질적인 향이 아니라 마음의 향을 피우시라 이겁니다. 잘 생각해서 공덕이 되게끔 마음을 잘 내는 것이 바로 마음의 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예배를 올릴 때 계향(戒香)ㆍ정향(定香)ㆍ혜향(慧香)ㆍ해탈향(解脫香)ㆍ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합니다. 이 다섯 가지 향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공양을 올려야죠? 누구나가 입산제자나 유발제자나 다 마찬가집니다. 이 모두가 다 공양이 되게끔 하고, 공덕이 되게끔 하고, 내가 공동체로서 어느 거 하나 빼놓지 않고 구할 수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이 계셨다고 볼 수 있겠죠. 첫째, 계향(戒香)이니, 부처님의 법에 누가 되지 않게 하며, 은사에게 누가 되지 않게 하며 자기한테 누가 되지 않게 하라. 그리고 일체 물질계와 내면세계와 모두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거를,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려라. 자기 탓으로 돌리고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체 모두 화목을 가져올 수 있다. 더불어 악과 나쁜 것을 녹이고 선행을 그대로 여여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길 것이다 하는 것이 계향 아닌 계향입니다.

둘째, 정향(定香)이니 이 내면에 굳건히 내 주인공을 세우고, 나쁘고 악한 거든지 그런 게 다가올 때는 마음을 한생각 잘 내서 굴려서 거기 놓고, 자기가 선행을 했든 좋은 일이 생겼든 모두를 감사하게 생각을 해서 그 자리에 굴려놓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이름해서 정향입니다.
셋째, 혜향(慧香)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서 물질계와 내면계를 둘 아니게 관찰하는 것이, 그리고 체험하는 도리가 바로 혜향입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혜향이지, 혜향 아닌 혜향입니다.
넷째, 해탈향(解脫香)이니 만물만생이 무명에 묶여 있음을 푸는 것이, 또는 풀며 여여하게 다스려나가는 것이 해탈향입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해탈향이지, 해탈향 아닌 해탈향이죠.
다섯째,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우주 삼라만상, 일체 만물만생을 느끼고 다스림이 항상 밝아서 걸림없이 구족함을 해탈지견향 아닌 해탈지견향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 내가 여직껏 말씀해드린 것은 그 다섯 가지 향이 바로 오음(五陰)의 직결심이 한 일심으로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섭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것만 닥친다고 이것만 해서는 닥쳐오는 모든 걸 타파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는 의사 노릇만 하지 다른 건 못합니다. 공업계에는 공업계만 하지 이걸 못 하고 참, 천문학계는 천문학계만 하지 이걸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게 많으면 다가오는 걸 어떻게 타파를 합니까?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어떠한 거든지, 윤회성이든지 영계성이든지 업보성이든지 또는 세균성이든지 어떠한 고뇌가 닥친다 하더라도 모든 거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하나도 없이 다 타파해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가져야만이 여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부처님이 이렇고 저렇고 얘기를 하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해드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급한 게 마음 씀씀이와 행동, 말 그런 것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겁니다. 마음을 잘 써야 행동을 잘하고 행동을 잘해야 말을 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여여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은 화가 나는 대로 즉시 화가 안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화가 나게 하는 것도 그 자리니 그 자리에다가 즉시 돌려서 화가 안 나게끔 하는 도리를 아셔야 할 겁니다. 그 화나는 것 하나로 표현을 했지만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표현을 하기를 ‘구정물을 아주 새 물로 해서 먹고 써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 어느 법당엘 가든지 부처님이 계시니까, 칠성도 계시고 신중도 계시고 또는 독성도 계시고 산신도 있고 신장도 있고 모두 이렇게 해놓고 한 것은 옛날에 얘기해드렸죠? 스님네들을 탄압을 할 때에 먹고 살 수가 없어서, 한 군데다가만 갖다 놓으면은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어서 여러 군데다가 놔야만이 그걸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놨던 거라고요. 그런데 그 유래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흘러 내려오고 있죠.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절간을 운영을 못한다는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해놓는다고요.

한 가정에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가 이렇게 식구를 이끌어나가고 있는데 때로는 이게 되고 때로는 저게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형이 되고 사위가 되고 아들이 되고, 이렇게 되듯이 부처님 마음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즉 마음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동일하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생각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지울 수도 있고 또는 일으켜서 생산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모두 그려서 생산한 것이 바로 우리 모든 만물만생입니다.

또 법당에 가서 초를 켜놓고 향을 피워놓고 공양을 올리고 그러는데 공양을 공양답게 올립니까, 어디? 공양을 올릴 때 내 공양, 네 공양 하고 올립니다. 내거 네거, 촛불도 네거 내거, 향도 네거 내거 하고 싸움들을 하고 올립니다. 그전에 보니까 말입니다. 아는 사람은 빙그레 웃고 옆에서 구경을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게 아니죠. 죽을 둥 살 둥 내가 켜야 되고 누가 치우면은 그냥 벌벌 떨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몰라서 그렇습니다.

꽃은 바로 사람의 마음, 아름다움을 말하는 겁니다. 상징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꽃공양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나뿐이 아니라 전체 조직이 돼 있는 우주 만상이 전체가 조직이 돼서 전달을 하고 돌아가는데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어떻게 내 아름다움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꽃공양’ 합니다. 꽃공양!

그런데 향공양은 우리가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 것이 바로 향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을 잘해서 내는 것이 우주 법계에 바로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는 그런 향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의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죠. 필연적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더욱더 향을 피우죠, 마음의 양식이라고.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발전도 할 수가 없고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목석인데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향을 켤 줄 알아야 하고, 그래야 공향이 되지 마음의 향을 못 켠다면 공향이 아니라 그냥 물질적인 향입니다.

그리고 공미 공양은 바로 아까 얘기했듯이 그렇게 한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 만물만생이 전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면서 찰나찰나 전달을 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공생 공용을 하고 있고 공식화하고 있는데 공양 한 그릇을 올렸다고 그게 어떤 귀신이 혼자 받습니까, 어떤 부처가 혼자 받습니까? 또 자기가 혼자 먹습니까? 혼자 먹어도 혼자 먹은 사이가 없죠. 내 몸뚱이 속에도 생명체가 수십억 개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양이죠. 허허허. 네가 더 먹었느니 덜 먹었느니 할 것도 없이 공양이죠.

그러니까 한 그릇을 올려도 공양으로 올려라. 공향으로 피워라. 꽃공양을 할 때도 아름답게, 마음의 아름다움을 말한 거니까 아름다운 마음으로 올려라. 그게 방편으로서 표시지 물질적인 우리 이 몸뚱이도 허망한 것입니다.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허망한 그 물질의 움죽거림이 움죽거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이 허망한 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기에 청수를 올리는 건 사람의 마음, 지혜를 말합니다. 바로 지혜의 공양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몸뚱이 자체가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물을 먹든 꽃을 받든 일을 하든 어떤 걸 하든,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하고 상점을 하고 어떤 걸 연구를 해서 물건을 만든다 하더라도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자기 생각에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거지, 넓게 생각을 해보면은 전체 공동으로 먹고 공동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도 바로 공행이 되는 거고 공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을 ‘공양’할 수도 없으니깐 일하는 데는 그게 공덕이 된다 이 소립니다.

우리가 공덕이 된다는 것은, 안팎에 공덕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공덕을 짓게끔 공양을 해야, 즉 말하자면은 모든 일거일동이 공동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시라고 해서 공생ㆍ공용ㆍ공체ㆍ공식화하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당신만이 살았다고 하지 말고,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내가 줬다고도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바로 나 아닌 내 주인공이 하고 있는데, 내 주인공이 주고 있는데, 모두가 준 것이 없어. 그쪽이 왔기 때문에 내가 줬을 거고 내가 줬기 때문에 그쪽에서 오는 것이지. 모두가 그렇게 서로서로 주고받고 사는 거죠. 그게 공동체며 바로 그 도리를 알면은 공덕이 될 수가 있고 공양을 올릴 수가 있고 지혜롭게, 맑고 밝게 살 수가 있다 이런 얘기죠.

이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묘한지 내가 곰곰이 생각하기를 내가 밥을 먹건 남이 밥을 먹건, 하다못해 과자 하나를 먹더라도 이게 공양인데, 이 공양의 뜻을 어떻게 말을 해야 여러분이 잘 들을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해드렸는데 아시겠습니까?
직접적인 이 도리를 우리가 느끼고 알아야 됩니다. 벌써 “얘, 아무개야!” 하고 아버지가 부르면, 아침에 그 아버지가 무엇을 찾는지 그거부터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까 “얘, 아무개야!” 부르면 벌써 ‘신문 가져오너라.’ 이 소린 줄 알고 신문을 가지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거와 같다 이겁니다. 일어나면 눈 썩썩 비비면서 보통 신문부터 찾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러한 것을 아는 사람은 벌써 미리 알고 “아무개야!” 부르면은 ‘뭐, 그걸 찾으시려니.’ 하고 벌써 신문을 갖다 놔야,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 해먹고 살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나는 만날 마음 마음 마음! 이렇게 하는데 마음만 귀중한 게 아니라 귀중한 그 마음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마음으로 나오는 거거든요.

나는 신기하게 또, 오늘 생각했습니다. 우리 금왕지원에 공양주가 계셨습니다. 그 공양주가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말을 합디다. “스님, 나는 이다음에 죽을 때도 자식들한테 가서 앓고 그렇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절에서 죽자니 또 절에서 앓거나 이런다면은 스님네들에게 누가 되고 그러면 아니 됩니다. 그러니 스님, 죽을 때도 그냥그냥, 살다가 그냥 앓지 말고 그냥 금방 가게 해주십시오. 내 처지가 그러니 어떡합니까?” 아, 이래요. “아이고, 그거는 당신의 마음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않소?”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엊그저께 여기 와서 얘기를 모두 벌여놓고 그러고는 가다가 그냥 쓰러져서 열반하셨답니다. 하하하.

자기가 서서 죽든지 앉아 죽든지 누워서 죽든지 자기 마음대로겠죠. 옷 벗는 것도, 내가 전에 그랬죠. 이 업을 모든 것을 녹이지 못하면, 그 애고(哀苦)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은 콩이 익지 못한 콩깍지와 같다. 익지 못한 콩깍지는 까도 속껍질이 찰싹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그게 까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파서 질질 매고 그냥 죽네 사네 하고 온통 남을 괴롭히고 이런 거와 같습니다, 표현을 하자면. 그러나 콩이 잘 익은 것은 탁 건드리기만 해도 싹 그냥 콩이 나옵니다. 하하하. 그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건 늙었는데 뭐, 내가 이런 공부는 해 뭘 해.’ 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니까 젊어서 또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보다 외려 더 쉽게 젊어질 거니까 빨리 해야죠. 허허허. 그러니 노인네든 젊은이든 애든 어른이든 남녀를 막론해놓고 이 도리를 알아서 벗어나야만이 우리가 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애고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게을러서 말입니다. 하하하. 뭐 속가에 계신 분들은 게으르다고 할 수 없죠. 그전에 가만히 보면요, 스님네들이 그 도리를 몰라서,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도리를 몰라서 말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그냥 가만히 앉아서만 있는 것이 스님인 줄 알고 그렇게 돌아간단 말이야. 그냥 만들어서, 의정을 만들어가지고선 내는 거야. 만들어가지고 의정을 내려면 이게 의정이 의정이 아니죠. 스스로서 의정이 나야지 그게 진짜 의정이죠. 이런 것은 어디서 왔을까? 이 화나는 것은 어디서 왔을까? 하하하. 또는 즐겁게 생각이 나는 건 또 어디서 올까? 자기가 스스로 의정이 나야만 의정이지 이거를 만들어가지고, 아는 것도 일부러 만들어가지고 의정을 내는 건 의정이 아닙니다. 이 모두가 사람이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고, 부지런히 마음의 계발을 해서 바깥으로 뛰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참, 정신적으로도 계발을 하고, 육체적으로도 뛰면서 이렇게 해야만이 우리 스님네들이나 유발승이나 모두들 여러분이나 다 같이 그 공덕의 의미를 세밀히 알고 실천을 하는 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