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대사선궤(禪)에 칠십이구초당에서 이 칠십 못난이가 보냅니다.
(그대가)단포와 맑고 깨끗한 공양 중에 있음을 멀리서 듣기에는 부족합니다. 요즈음 〈화엄경〉을 읽고 있는데, (화엄의)큰 뜻을 그대와 함께 말하며, (화엄의)주체와 주체에 종속되는 이치와 겹겹이 이어지는 인다라망(因陀羅網), 교차되어 나타나는 묘리가 (그렇게 된) 연유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십 이대종사가 말한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방편대로 한번 보여주십시오. 순 스님의 사람 됨됨이와 기량은 빈틈이 없어서 도를 이루기에 족하니 칭찬할 만합니다. 수일동안 머물다가 가을 물을 계산하여 돌아갈 겁니다. (순 스님 편에)단오절 부채를 보냅니다. 향훈과 자흔들은 근래 소식을 듣지 못해 매우 섭섭하고 섭섭합니다. 간신히 여기에서 줄입니다. 5월8일 노과(艸衣大師禪 七十二鷗艸堂寄此七十醜狀 無足遠聞於團蒲淸供中也 近日頗有見於華嚴 大義恨無由與師共說主伴 重重帝網 交現之妙 未知十二大宗師所說者 爲何義耶 隨便一示之 順衲才器嚴足以成就 可嘉 留之數日 讀秋水去耳 節?寄去 薰欣輩近無消息 甚?甚? 艱此不 五月八日 老果)
당시 추사는 ‘화엄경을 읽고 있다’. 하지만 교학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화엄경의 심오한 경지는 조선 후기 대학자였던 추사라도 초의와의 담론이 필요했던 셈이다. 추사는 초의와 이런 내용을 토론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특히 화엄의 큰 뜻인 ‘주체와 주체에 종속되는 이치와 겹겹이 이어지는 인다라망(因陀羅網), 교차되어 나타나는 묘리가 (그렇게 된) 연유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였기에 초의의 안목은 그를 교리의 피안으로 이끌어 주는 도반이었다. 추사가 말한 12대 종사의 뜻은 무엇인가. 화엄의 교리에 대한 추사의 의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화엄의 본지가 무엇인지도 더욱 그를 심문(審問)으로 이끈 화두였다.
따라서 그가 초의에게 ‘십 이대종사가 말한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라고 거듭 물었던 터이다. 더구나 멀리 있는 벗의 수행은 그에게도 커다란 관심사요, 궁금함이었다. 추사는 초의의 소식이 못내 궁금했던지, ‘맑고 깨끗한 공양 중에 있음을 멀리서 듣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에게 차를 보내주던 자흔과 향훈의 근황도 궁금하던 그였기에 이들의 ‘소식을 듣지 못해 매우 섭섭하’단다. 늘 자신에게 차를 보냈던 이들에 대한 추사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당시 추사는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艸堂)이란 호를 사용하였는데, 도교의 〈〈선경〉〉에도 칠십이는 신선이 사는 선경을 의미한단다. 이러한 사실은 최준호의 연구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70이 된 추사는 이미 선경에 사는 노인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걸림이 없었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계를 노닐던 도학자요, 신선이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