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바른 믿음으로

공정성을 확고히 해서

대사회 건설하는 ‘보살의 길’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아집과 법집에 빠진다.

애착 버려 무분별지 얻으면

여래집에 태어났다한다

 4-6 귀경례

더욱 직접적으로 사회의식(社會意識)이라고 하여도 좋은데 이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두 극단에 떨어지기가 쉽다.

두 가지 극단이라고 한 것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이다.

신(神)이, 하나님이 있다느니,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靈魂)과 같은 것이 있다느니 하는 유(有)의 관념과 이를 부인하는 아무것도 없다,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무의 관념이 언제나 우리 내부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론을 유발하고 드디어는 숙명론(宿命論)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귓밥이나 만지고 앉았지, 인간의 노력 정진이 관여할 틈을 찾을 수 없다. 또 무의 관념에 고착(固着)되어 버린다면 허무의식(虛無意識)만 곰팡이처럼 번식해서 퇴폐에 흘러, 매사에 되는 대로 흥청거리게 되고, 부모고 형제간이고 아랑곳 할 바 아니므로 잔뜩 에고이스틱하게 뭉쳐버려 사회는 아귀다툼의 수라장화(修羅場化)하고 질서가 아주 문란해진다. 사회는 무기력(無氣力)과 공포(恐怖)를 낳으면서 서서히 파괴되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이변(二邊)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라고 하여 반쯤만 있고 반쯤은 없다는 따위로 엉거주춤 둘 다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공정성을 확고히 믿는 데서 대사회 건설이라는 보살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다. 대자대비로서 중생과 더불어 중생을 위한 보살의 사업에 협력해 나갈 때에 우리들의 믿음은 빛나고 우리들의 사회에도 아름다운 아침은 밝아 올 것이다.

이 중도를 지키는 것을 불교에서는 바른 믿음이라고 하여 정신(正信)에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信念]이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금 다음 두 개의 망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점이 불교가 휴머니즘과는 다르고 이를 경계하는 단적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내가 제일이다, 내가 잘 났다, 내노라하는 자기중심(自己中心)에 빠진다. 이것은 이른바 아집(我執)인 것이다.

둘째는 내가 안 것이 제일이다. 하고 자기가 아는 것만 내세우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무조건 그르다 하고 부인하는 태도,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그것만 지상(至上)으로 섬기려는 외고집 같은 데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법집(法執)이다.

양대진영으로 나누어서 냉전으로, 또는 지역적인 제한 전쟁으로 첨예화된 오늘날 세계의 정치적 양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야말로 불교의 입장으로 이를 법집(法執)의 상(相)이라고 일컫는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제가끔 자기 자신을 이데올로기에 결박지워 용신을 못하는 꼴들을 해가지고 어떻게 세계와 인류 장래를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지 않는다고 장담들을 하는 것일까?

아집과 법집을 홀가분히 벗어던져 버리고 애착을 버렸을 때 무분별지(無分別知)를 얻는다.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분별을 다 초월하여 반야(般若)의 지경에 나아가야 하며 이렇게 되어졌을 때 우리는 이를 가리켜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래의 집에 태어났다는 말은 이 세상을 건질 사람, 구세주(救世主), 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아주 공정한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을 잘 알아 가지고, 구세할 수 있는 여래의 집에 새로운 일원이 되어 태어났음을 이르는 말이다.

다시 말한다면, 공정한 우주의 생명력과 호응하는 대승(大乘)이며, 대사회성(大社會性)의 역사적 사명을 바르게 파악하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그 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람은 부처의 지위를 계승할 것이며 그 구세주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대희대사(大喜大捨)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위한다. 이 보살은 우리가 위로 부처님의 도를 넓히는 길이란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는 중생을 건지고 후진을 교화(敎化)해 가르치고 또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도를 연구하여 넓혀 나간다. 우리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마하살을 받드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마하살(摩訶薩)은 마하 ― 큰, 거룩한, 하는 데에 사뜨바가 붙어서 된 말로 거룩한, 큰 생명력 있는 어른이라는 뜻이다.

 

至心歸命禮海東敎主元曉菩薩摩訶薩(一拜)

지성스런 마음을 돌이켜 우리가 여기서 절하는 것은 바로 이편의 우리 신라(新羅)에 나신 가르침의 주인 되는 어른 원효보살(元曉菩薩)이라는 분 앞에다. 이 원효보살은 부처님의 제자로 승보(僧寶)에 드는 분으로 앞에 나온 문수(文殊)·보현(普賢)·관세음(觀世音)·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각기 일면을 나타낸 상상의 인격(人格)들이지만 (定中의 佛菩薩像) 원효보살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 천삼백여년 전 신라 땅에 태어나셨다.

그러면 왜 이 분을 받들어 여기서 모시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이 분이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 행원례(行願禮)에서 논의하는 데는 우리니 남이니 그런데에는 상관 없이 다만 어떻게 하면 알뜰하고 참된 진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는데 관점을 둔다. 원효보살을 여기 모시는데는 이에 대한 설명을 이 분의 가르침에서 얻게 되고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우주적이고 대사회적인 깨침이 부처님의 본 뜻에 꼭 계합(契合)하는 말씀이라 여겨지므로 이 분의 가르침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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