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귀경례

 ‘관세음보살’은

부처님 심정 헤아리고

중생 심정 알 수 있는

합일된 경지를 의미

괴롭고 죄 많은 중생

구제하고 건져주는 어른

 

흔히들 선정(禪定)을 닦는다고 말을 하지만 선정이란 확고 부동한 정각(正覺)을 이루는 방법인데 단지 그것만을 한다고 멍청히 도사리고 앉았기만 한다면 이는 정(定)에 계합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를 닦으면서도 선정에만 머물러 있지를 말고 어떤 일이건 사리지 않고 모두 다 해나가는 거기에 스스로의 정신이 통일되어 확고 부동한 자세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반야반라밀(般若婆羅蜜)을 만족케 하고, 따라서 모든 진리를 이러쿵 저러쿵 헐뜯어 희론(戱論)하지 않는다. 또 부질없이 논술(論述)하지도 않으며 헛되이 안다니처럼 씨석받은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하는 일을 우리는 육바라밀(六婆羅蜜)이라고 하여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선정(禪定), 반야(般若)가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여실(實如)히 수행(修行)한다고 하며 이를 실천 궁행하는 것을 불방일이라고 한다. 이와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신불인 아미타불은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두 보살과 관련이 있다. 문수보살의 성격은 아미타불의 반야의 일면, 즉 큰 지혜를 대표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지며, 또 보현보살은 그 실천궁행하는 방면을 특히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보살은 보디사뜨바 마하사뜨바인데 중국사람은 원래 보리살타(菩提薩唾)로 좀 줄여서 번역을 했다가 다시 그것도 길다고 하여 아주 보살로 줄여서 말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요즘 유나이 티드 네이션즈를 UN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至心歸命禮大慈大悲觀世音菩薩大喜大捨大勢至菩薩摩訶薩(一拜)

앞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아미타불의 덕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부처님 노릇을 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중생을 어떻게 건질 것인가 하는 일면을 나타내 보여준다.

관세음보살의 관(觀)은 부처님 구세주(救世主)이라는 말이다. 세음(世音)이란 우리들 죄악의 많은 중생이 괴롭다, 괴로워 못살겠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나, 하고 허덕이는 이 세상의 뭇소리라는 뜻이다. 바로 이 자리는 구세주로서 건지는 사람과 우리 중생이 한데 합일된 경지이므로 부처의 심정도 헤아리고 우리들 중생의 심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자를 표현하여 우리는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이 관세음보살이라는 번역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라는 스님이 한 것인데 그 뒤 당(唐)나라 때 현장법사(玄?法師)라는 이는, 이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바꾸어 보았다. 자재(自在)한 것을 살펴 본다 하는 뜻으로 새겼던 것이다. 그러나 관자재 보살은 인도말에는 더 가깝지만 우리에게는 관세음보살이 훨씬 정답게 들린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세상 사람들은 괴롭다, 우리는 죄 많은 사람이다 우리 죄 많은 사람을 어떻게 구제해 주었으면 하는데서 갖가지 청이며 온갖 소원을 들어서 우리를 곧 건져주시는 어른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 관자재보살이라고는 보통하지 않는다. 일본 중국, 우리나라 할 것 없이 아무데서도 관자재보살이란 말은 잘 안 한다.

관세음보살은 대승(大乘)의 정신(正信)을 일으킨다. 이 분은 곧 크나큰 대도(大道)의 바른 신앙을 일으키도록 하는 사람이다. 우리들도 또한 그와 같은 바른 생각을 일으키도록 해야한다. 대승이란 무엇인가? 기신론(起身論)에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나서 무엇인지 하나를 설명해야 할 것이 있고 무엇인지 크게 문제 삼을 것이 하나있고 무엇인지 그것을 진리라고 할까, 전 세계를 두루 표현할 수 있는 무슨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말하기를 유일심(唯一心)이라거나, 또는 대승이라거나 아니면 진여(眞如)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대승을 다시 우리 현대어로 말한다면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사회성 그것은 항상 공도(公道)라야 되고 정당한, 공정한 실체라야 한다. 사회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항상 공정을 기해야 한다는 신앙을 불러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환언하면 부처의 씨가 끊어지지 않는 증거다. 부처의 씨가 종자가 끊어지지 않은 때인지라, 우리가 나는 부처님 제자다,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공정성을 띠고, 공정성을 실천하고 규명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말 제자며, 씨가 되는 도리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우리들의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희대사(大喜大捨)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하는 것은, 앞의 관세음보살의 경우와는 달리 중생을 건지는 얘기가 아니라, 이는 크게 기껍고, 용단을 내어 크게 버려야 하고 또 크나큰 위세를 가지고 있는 보살이란 것이다. 위로 부처의 도(道)를 넓힌다는 데에 목적이 있다.

위로 부처의 도를 넓히는 데에는 원효대사께서 우리에게 좋은 방법론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이변(二邊)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하라는 것이다. 두 가지의 극단을 제거하고 공정한 중도를 택하는데는 확고부동한 신앙이 선행조건으로 요청된다. 또 이 신앙을 세우는데는 앞에서 말한 바대로 이 세상의 본체(本體)에 대한 뚜렷한 인식(認識)과 악과 사회관(社會觀)이 밝게 이루어져야 하며, 즉 진여(眞如), 법계(法界), 대승(大乘)이라고 하는 그것은 실체를 정확히 알아 버려야 된다. 그리고 우주관(宇宙觀)을 바르게 가진 다음에 이것은 다 이루어진다.

보통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심(一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글자그대로 한 마음이라는 뜻이 아니고, 우주와 사회의 실체인식, 그리하여 공정성(公正性)으로 풀이되고 또 내가 대사회성(大社會性)이라고 하는 그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글은 지난해 12월 발간된 〈효당 최범술 문집(편자·효당사상연구회 회주 원화 채정복)〉 전 3권(민족사 刊) 중 제 2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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