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칠십세를 앞두고 초의에게 보낸 편지
추사의 말년 편지는 담담한 소회로 가득하다. 자신의 나이가 이미 칠십이 되었다고 하니 이 편지는 1854년 12월 말경에 보낸 듯하다. 칠십이 된 자신의 삶을 회고한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의 노사방장에게 노완이 답합니다.

칠십 년을 사는 동안 산중(山中)과 대나무 사이, 차나무 숲 사이, 솔바람 산골 물 사이, 차를 끓이는 동안에, 범패 소리 사이, 수행 중에 성태(聖胎)를 잘 길러 늙었지만 그러나 무리 중에 눈썹이 땅에 끌리니 장로라 존중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나는 이처럼 칠십이 되었는데도 과거의 묵은 빚으로, 현재 새로운 일에도 움직이면 문득 고해가 됩니다. 초목 같은 나머지 삶을 무엇으로 지탱하겠습니까. 나와 그대가 함께 해를 같이하고 명을 함께함에 이른다면 날로 참선에 기뻐하고 현묘한 묘리에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때를 그 어찌 잊겠습니까. 불과 열흘이 지나면 초의도 칠십이고, 나도 칠십이 됩니다. 칠십(이 된 내가)어찌 칠십(이 된 그대를)잊겠습니까. 근래에 산중엔 무슨 일이 있습니까. 너무 춥지는 않습니까. 차를 끓이고 물을 감별하는 것은 (나이 든)삶을 지행할 만합니다. 아닌가요. 유마경은 주가 아니면 순조롭게 읽어 내려가질 못하겠습니다. (그대와 함께)서로 헤아리고 증험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나는 사리에 밝지 못하니 어찌 족히 말 하리오, 올해 차포는 장차 어떻게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시겠습니까. 마침 다음에 보낼 인편이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쓴 것을 먹지만 달게 느낄 뿐입니다. 지난 것도 더 보내시길…(艸衣老師 方丈 老阮答, 七十年 山中 竹中 ??林中 松風澗水中 石?竹爐中 梵唄中 禪誦中 長養聖胎 ?然衆中眉毛拖地 宜其長老之稱尊 至如此身 過去宿債 現在新業 動輒苦海 艸木殘年 何以支柱 到此與師齊年共命 日不說禪說玄 此時其何以忘之也 若過十數日 艸衣七十矣 吾亦七十矣 七十何以忘七十也 邇來山中有何事 不甚寒耶 茗品泉 可以支年否 維摩經非注有不順下處 恨無以相對勘證也 此狀干 何足言 今年茶逋 將何以補完也 適因轉(=遞)不多只餐辛蔗甘 去益)

이 편지에서 자신의 벗 초의는 칠십년을 사는 동안 속진이 없는 세상인 산중에 살면서 자연과 차를 벗하여 수행했기에 신성한 몸을 잘 길렀다. 그래서 늙었지만 ‘눈썹이 땅에 끌리’는 선승의 풍모를 갖추었으니 ‘장로라 존중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초의와 동년배인 추사 자신은 칠십이 다 되도록 전생에 지은 묵은 빚도 청산하지 못한 채, 현재에도 ‘움직이면 문득 고해가’되는 어려움이 연속되고 있다는 것. 그의 삶을 지탱케 하는 것은 바로 ‘나와 그대가 함께 해를 같이하고 명을 함께함’이다. 그렇게 하면 ‘날로 참선에 기뻐하고 현묘한 묘리에 즐겁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이는 진정 추사의 속내였으리라. 불과 10일이 지나면 칠십이 된다니 이 편지는 대략 1854년 12월 20일 경에 쓴 것이다. 칠십의 나이란 공자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가는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세월을 살았던 추사의 소회는 무엇일까. 아마 진실한 소통의 의미를 나눈 벗, 초의와 추사는 실로 서로 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가 보다. 그가 ‘칠십(이 된 내가)어찌 칠십(이 된 그대를)잊겠습니까’ 라고 말한 것은 이를 나타낸다. 특히 거사선(居士禪)에 큰 관심을 보였던 추사였기에 그가 〈〈유마경〉〉을 탐독하는 것은 당연하다. 해석의 실마리를 열어주는 주(注)가 없다면 읽을 수 없었던 그였기에 초의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단다. 조선 후기 최고의 석학이었던 그가 〈〈유마경〉〉을 읽을 수 없어서이겠는가. 이는 벗을 그리워하는 정회를 이리 표현한 것이리라. 한편 추사의 말년, 초의가 보낸 차는 그를 즐겁게 동반자였다. 아마도 추사는 초의가 보낸 차에서 초의를 만나고, 차의 향기에서 벗의 지극한 마음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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