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배지에서 돌아와 썼던 추사의 편지
추사가 제주 적거에서 해배 소식을 들은 것은 1848년 12월19일 경이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2월 26일에야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난다. 이후 소완도를 거쳐 이진(梨津: 해남군 북평면)에 도착한 것은 2월 27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1849년 2월 28일, 이진에서 용산 본가로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대흥사로 초의를 찾아간 사실도 드러난다. 해배 이후, 그는 삼호(三湖)에 살았다. 삼호는 지금의 마포이다. 이 편지는 추사가 유배지에서 돌아와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았던 삼호시절에 보낸 것이라 짐작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의 노스님의 편지를 받고, 승련노인(勝蓮老人)이 답장하다.

금년 들어 마침내 편지 한 통이 서로 오지 않았습니다. 비록 막혔다 하더라도 무슨 허물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과는 두륜산을 경계로 서로 건너가지 않고, 야마도리천에 들어가 끊어 버린 것인가. 세상 사람은 오히려 수행하는 것을 그리워하니 도리어 다시 일이 많고 바쁩니다. 이런 중에 집 없는 달팽이 같은 (내가)삼호에 오두막을 지어 삼호에 권속이 모두 모였으니 또한 세속적인 입장에서 고통과 즐거움은 평등한 것입니다. 참으로 차별하는 바 없이 번갈아 들어오는 것을 알겠는가. 덕순 스님이 갑자기 와서 만났고, 아울러 그대의 편지와 차를 전해 받았는데, 바라지도 않던 편지와 차가 당도하니 기쁩니다. 그대도 청정하고 길하고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편지를 가져온 스님에게 그 곡절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대는 전륜왕처럼 무병장수하여 자주자주 차를 보내주십시오. 이는 일대사의 인연일 뿐입니다. (艸衣老衲梵收 勝蓮老人答 入今年來 遂無一信相及 雖爪何以過之 其與世不相涉 頭輪一境 卷入夜摩摩利去耶 世人尙有戀於團蒲香燈之間 還復多事矣 此中同一蝎牛 廬於三湖上 湖眷亦聚合 亦世諦是所以苦樂平等 眞知互攝无所差別歟 有德順衲子 驀地來見 ?投師書函茗 喜出望外書來茗來 知師之淸淨吉利 无委曲相使 師无病長壽如轉輪王 頻頻寄茶來 是一大事因緣耳)

 

추사가 ‘금년 들어 마침내 편지 한 통이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한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듯하다, 이 편지에서 추사가 말한 ‘금년 들어’란 언제일까. 대략 1850년경이라 짐작된다. 이 무렵, 그의 일상도 어느 정도 여유를 회복했던 가 보다. 이는 그가 고통과 즐거움이 ‘참으로 차별하는 바 없이 번갈아 들어오는 것을 알겠는가’라고 말한 점이나, ‘비록 막혔다 하더라도 무슨 허물이겠습니까’라는 느긋함에서도 느껴진다. 하지만 벗의 소식이 못내 궁금했던 그였기에 ‘세상과는 두륜산을 경계로 서로 건너가지 않고, 야마도리천에 들어가 끊어 버린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추사의 해학적 언어 구사는 이런 대목에서 빛난다.

그에게 벗의 편지와 차를 전달해 준 덕순 스님에 대한 고마움도 ‘갑자기 와서 만났고’ 아울러 그대의 편지와 차를 전해 받았다’한 것에서 또렷하다. 실제 덕순 스님의 내력은 자세하지 않지만 추사와는 면식이 있었던 사이로, 초의와 관련이 깊은 대흥사 승려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추사는 그리도 잊지 못하던 초의차가 당도했는데도 ‘바라지도 않던’ 것이란다. 하지만 ‘그대는 전륜왕처럼 무병장수하여 자주자주 차를 보내주시오’라는 말이 추사의 솔직 담백한 심정이었다. 아울러 이 일이 일대사의 인연이라니 이는 초의에게 보인 추사의 깊은 속내였을 것이다. 따라서 추사에게 초의는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 같은 존재였고, ‘초의차’는 추사자신을 교화하는 방편이었음이 분명했던 것이라 하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