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의 차포 선물에 한껏 들떠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 흡족”

추사는 초의가 보낸 차포를 받고 한껏 들떠 있었다. 초파일이 가까워진다고 하였으니 초의가 보낸 차는 새로 만든 것인가 보다. 이 편지는 그가 병완(病阮)이란 호를 쓴 것으로 보아 과천 시절에 보낸 것이라 짐작된다. 날로 쇠잔해지지만 차는 그를 웃음 짓게 한 물품이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촌마을의 붉은 빛은 이미 시들해졌고, 들에는 푸름은 날로 성해갑니다. 초파일이 또 가까워지는데, 남녘의 풍물은 서로 더불어 특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곧 강진의 아전 편에 그의 편지를 받으니 차와 편지는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서 기쁘고 흡족합니다. 또 살펴보니 봄 이후 수행하는 자리가 가볍고 편안하다니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늙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어떨지요.

여기 날로 쇠잔해지는 사람이 본다면 돌의 정수와 소나무의 기골과 같고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속세의 주변의 변화를 겪지 않도록 지혜를 멀리까지 떠 부어 주십시오. 나의 상황은 털끝만큼도 들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묵은 나무와 돌에 의지하여 원통함을 안고 궁벽한 산에 있으니 출세간에 사는 사람은 다만 슬프고 민망할 뿐입니다. 차포는 눈을 뜨이게 합니다. 요즘은 오로지 이것(차)에 의지해 지냅니다. 멀리서 온 이 차포꾸러미가 웃음 짓게 하는 것이니 반듯이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들어가지는 못할 겁니다. 다만 이것을 한번 말씀드립니다. 눈이 침침하여 이만 줄입니다. 16일 병완

 

(村紅已瘦 野綠日漲 佛辰亦近 想南地風物 與之相桀 卽於康津吏便 承到梵牘 爲茶信日企之餘 欣暢圓足 且審春後 禪況輕安 不勝翹喜 以邇來皺白果何如 以此日以衰朽者觀之 似無異同石髓松骨 不當作世諦邊遷流變 知遙遙?注 俗狀毫無可聞 依舊木石抱寃窮山 使出世間者 適足悲憫而已 茶包眼開 近日專以是依賴 荷此遠副 可笑處 必不入於耳根圓通 第此一告之 眼花不式 旣望 病阮)

 

이 편지는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때에 보낸 듯하다. 그가 ‘들에는 푸름은 날로 성해’간다는 것이 그렇고, ‘초파일이 또 가까워지는데’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강진에서 온 아전 편에 초의의 편지와 차를 받았다. 따라서 초의의 편지는 추사의 말처럼 ‘날마다 기다리던 것이라서 기쁘고 흡족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갑인 이들이 더욱 쇠락해져가는 모습은 ‘날로 쇠잔해지는 사람이 본다면 돌의 정수와 소나무의 기골과 같고 다름이 없을 듯’하다는 곳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이렇듯 늙어가지만 초의 수행이 평안하고 가벼워졌다는 소식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던 추사였다.

진정 우정은 그런 것이다. 늘 마주하여말할 수 없지만 몸은 멀어도 마음은 지척에 있는 듯했다. 그래서 멀리서 온 편지는 더욱 가슴 가득 감동이 일었으리라. 이런 마음을 전하고, 전해 받았던 벗이기에 차를 만든 초의는 강진의 아전이 상경한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가웠을 것이다. 새로 만든 차는 자신을 잊지 못하는 벗, 추사에게 제일 먼저 보냈을 것이다. 더구나 만년의 추사는 불교의 연구와 차에 의지해 쓸쓸한 세월을 담금질하고 있었다. 그에게 차는 근심을 없애는 망우초(忘憂草)였던가.

그의 눈을 밝게 뜨게 하는 차포는 멀리 대흥사에서 초의가 보낸 햇차였다. 속세의 속절없는 변화는 이익에 밝은 사람들의 변화이고, 또 다른 한편은 흘러가는 세월일 게다. 멀리서 온 차포만이 추사를 ‘웃음 짓게 하는 것’이라서 아마도 이근원통(耳根圓通)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란다.

이근원통(耳根圓通)은 관세음께서 중생들은 이근(耳根: 귀뿌리)이 총명하므로, 청각의 언어를 통해 이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끄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차만을 좋아하는 자신은 수행의 진리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니 그의 차벽(茶癖)은 이처럼 깊었던 듯하다. 추사의 산뜻한 이 위트는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품위이고, 격이라 하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