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사찰 건축 3. 서울 삼선포교원

모전탑 외형 그대로 옮긴 3백평 법당
2층 법당 후불탱 대신 관음보살 부조
신영훈 큰 그림 그리고 손정호 설계
흙 구운 ‘전’ 7만장 쌓은 전탑 형식

1983년 3월 1일 준공된 삼선포교원은 경주 분황사 모전탑 외형을 그대로 확대시켜 옮긴 혁신적인 불사다. 연꽃이 활짝 핀 지붕의 석탑이 절을 상징한다.
한국불교에서 안타까운 역사 중의 하나인 경주 황룡사가 사라지던 날, 그 허망한 순간을 함께 했던 절이 있다. 황룡사 옆 분황사이다. 분황사 역시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법당 하나와 무너진 석탑 하나가 겨우 옛날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무너진 흔적이 분명한 석탑은 언제부턴가 삼층만이 남아있다. 분황사 모전탑(模塼塔·국보 30호)이다. 그 옛날 신라의 기억을 간직한 석탑은 아득한 세월을 건너 20세기 서울 땅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1983년 3월 1일. 분황사 모전탑의 형태를 그대로 옮긴 법당이 서울 성북구 동선동 주택가에 섰다. ‘삼선포교원’이다.

탑형식의 새로운 법당
지상 2층, 지하 1층의 삼선포교원은 분황사 모전석탑의 외형을 그대로 확대시킨(300평) 건축물로 불교건축사에서 혁신적인 불사로 기록되고 있다. 건물 상부에는 신라 석탑을 올려놓아 전탑과 석탑의 합성건물처럼 보인다. 1층 법당에는 석굴암 현실과 동일한 돔을 만들고 16개의 감실을 벽면에 설치했으며 벽체에는 연화문의 전돌로 내장하여 백제 양식의 요소도 가미했다.
2층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으며, 후불로는 전통적인 탱화 대신 3백 여 관세음보살이 거닐고 있는 관세음보살 부조를 조성했다. 그리고 2층 법당의 특징은 기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대중을 수용하고, 법사와 불자들의 사이를 좁힌다는 취지이다. 또한 기존 사찰과 다른 점은 단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 층과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존의 사찰과 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공사(工事) 아닌 불사(佛事)
1979년 임대건물에서 삼선포교원을 연 지광 스님(현 회주)과 묘순 스님(현 주지, 삼선불학승가대학원 원장)은 불사의 원을 세우고 전국 각지를 돌며 지금의 포교원을 어떻게 지을 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경주 분황사를 찾게 되는데, 모전탑을 본 지광 스님이 포교원 건물을 분황사 모전탑 모양으로 짓기로 한 것이다.
지광 스님과 묘순 스님을 중심으로 대중이 불사를 위해 머리를 모았다. 신영훈 문화재위원이 큰 그림을 그렸고, 구체적인 설계는 은하건축의 손정호(67) 건축가가 맡았으며, 시공은 코오롱 건설이 맡았다.
“우선 분황사로 내려갔죠. 모전탑과 똑같이 지어야 했으니까요. 모전탑의 모습을 사진과 노트에 가득 담아왔죠. 하지만 사진과 노트에 담긴 모전탑만으론 무언가 허전했어요. 사진에 담긴 모습과 노트에 적힌 숫자를 토대로 도면을 그리고 공사 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했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분황사 석탑의 겉모습만을 옮겨오는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다. 공사(工事)와 불사(佛事)는 다른 것이었다. 또 하나의 분황사 탑을 올리는 것은 토목이나 건축의 ‘공사’가 아닌 ‘불사’였던 것이다. 특히나 탑을 세우는 일은 불사 중의 불사다. 탑 중에서도 불탑은 그 의미가 다른 탑들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일에서 시작된 불탑의 기원을 생각하면 삼선포교원 불사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단순한 ‘축조’의 개념을 넘어선 찬탄과 예배의 발현인 것이다. 불자였던 그는 이러한 불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부터 사찰 관련 크고 작은 불사를 해오고 있었던 손정호 씨는 어떻게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할 지 고민했다.
“산사와는 달리 도심의 좁은 주택가에 지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건물의 외형이 석탑의 형태이고, 그 안에는 법당을 앉혀야 하는 새로운 불사였습니다. 주변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또한 신라의 석탑을 옮겨오는 작업이니 시대를 오가며 세월을 허무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의 불교문화가 있었듯 20세기엔 20세기의 불교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 냈듯이 20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은 20세기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러니 단순히 외형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같으면서도 다른 한 시대의 독창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시말해 전통을 잊지 않으면서 진화된 불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면 위에서 탑을 쌓고 허물기를 며칠, 그는 마침내 생각했다. 다른 공법과 치장은 필요 없었다. 그 옛날 분황사 마당에 탑이 세워졌듯이 집을 짓는다는 생각보다는 ‘탑’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라 시대로 돌아가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올리던 불사의 현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득한 세월을 건너와 서울 도심에 그 시절과 똑같이 탑을 세운다. 삼선포교원은 분황사 탑과는 다르게 석재가 아닌 전통 공예가 김영림 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구워낸 전통 벽돌 ‘전(塼)’ 7만 장으로 쌓아 올렸다. 모전탑이 아닌 전탑인 것이다.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삼선포교원 대중의 서원이 담겨 있다.

후손이 연구하게 될 또 하나의 역사 분황사탑
신라의 탑 양식은 목탑-전탑-모전탑-석탑으로 발전했다. 전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 ‘전’을 쌓아 세운 탑을 말하며, 모전탑은 전탑을 모방한 것으로 흙을 구운 전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벽돌)를 쌓아 세운 탑을 말한다. 신라 탑은 전탑양식이 유행하여 백제의 미륵사지 목탑 구조를 모방한 전탑과 결합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룬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원형이 몇 층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넓은 토석 기단 위에 안산암을 전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옥개석 받침과 낙수면은 모두 층단을 이루는 전탑 특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법을 수호하는 힘찬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석탑은 시대를 건너와 새로운 역사와 문화가 됐다. 먼 훗날의 후손은 같으면서 새로운, 또 하나의 역사를 관찰하고 연구하게 될 것이다.

1층 작은 법당엔 석굴암 현실과 동일한 돔을 만들고 16개의 감실을 벽면에 설치했다
많은 대중을 수용하기 위해 기둥을 없앤 2층 큰법당. 큰법당엔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 대신 관세음보살 부조를 조성했다.
건축가 손정호는

조선대학교 병설공업전문대 건축학과와 동국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국보건설단에서 문화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1975년부터 공동으로 ‘은하건축’을 개소해 불교 관련 불사를 맡기 시작했으며, 1980년부터는 독자적으로 은하건축을 운영하며 본격적으로 전국의 사찰 복원과 건립 등 불교 관련 건축을 하고 있다. 주요 불사로 순천 송광사 대웅전 중창불사 설계와 김천 직지사의 만덕전 신축 설계, 서울 봉은사 법당 신축 설계, 화엄사 삼성각, 종각 증축 설계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불교 관련 건축과 중요 문화재 관련 사업을 해오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