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 스님 (동국대 교수·성남 정토사 주지)

보광 스님은 … 1951년 태어난 보광 스님은 경주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부터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정각원장, 100주년기념사업본부장, 대외협력처장, 불교대학원장 등의 소임을 역임했다. 학계에서는 대각사상연구원 원장,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장, 국제전자불전학회장, 한국정토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정토사 주지를 맡고 있다.
염불만일결사는 새 불교 신행운동
2월 12일 5000일 회향…1759명 동참
1982년 정토사 창건, 사찰재정공개

일본서 정토 전공, 한국 정토학 이끌어
논문 150여편, 한국불교 정토사상 정리
대각사상연구원 설립, 정토학회 결성

불교는 유일신적 아닌 연기론적 타력신앙
인권위·호스피스·후진양성 등 활동 다양
“자비와 지혜의 조화…정토구현 나서자”

2000년 6월 6일, 서울 청계산 자락에서는 불교를 새롭게 하자는 뜻 깊은 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만일염불결사다. 예부터 국난기나 교단의 부패가 심할 때 결성돼 새 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 염불결사, 이날 모인 1000여 출재가 대중들은 2027년 10월 22일까지 27년5개월 동안의 긴 수행을 시작했다.

만일염불결사를 이끌고 있는 보광 스님을 만난 2월 11일은 결사 5000일을 맞는 날이었다. 한국불교학계 최초의 정토학 박사인 보광 스님은 1982년 성남 정토사를 창건해 포교와 재가자 교육에 매진해왔다. 만일염불결사를 비롯해 한글대장경 전산화, 정토학회 창립, 국가인권위원 활동 등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 남산의 한 자락에 자리한 동국대 스님의 연구실에서는 논문을 윤독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연구원 문을 두드리니 책들로 가득한 소박한 방안에서 스님이 편안한 미소로 기자를 맞이했다.

성남 정토사 염불만일회 법회의 한 장면. 염불만일회 법회는 함께 염불하며 정토를 발원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불교 혼탁할 때 새 불교운동으로 일어나

보광 스님은 종교의 신앙에는 구심점이 뚜렷해야 함과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일반 대중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수행법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앙결사는 바로 자신이 일생동안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대발원이며 불교가 혼탁했을 때 전개된 새 불교운동입니다. 대표적인 신앙결사인 정혜결사는 참선을 주로 해 민초들이 쉽게 참여하기 어려웠어요. 반면 원묘 요세 스님의 염불결사는 많은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불교 내에는 참선 외에도 염불과 같은 여러 근기에 맞는 수행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근래에 이런 수행법들이 맥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조계종의 비구·대처 간 정화에서 참선 위주로 나가며 염불을 비롯해 여러 불교의식 등의 전승이 단절됐어요. 2000년도부터 ‘한국 불교의 신앙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염불결사 운동을 펼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토사의 염불만일결사의 핵심은 스님의 지론처럼 신행활동을 생활화 하자는 것이다. 중국 여산 스님의 〈반주삼매경〉과 원효 스님의 〈아미타경소〉에 사상적 근원을 둔 염불만일결사는 △매일 108배를 하자. △매일 1000번 이상 칭명염불하자. △매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부처님 전에 100원 이상 보시하자는 지침으로 진행된다. 매월 세 번째 일요일에는 철야정진이, 1년에 한 번씩은 계를 다시 받으며 참회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현재 한국불교계가 자정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신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수행만을 강조했지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 약속인 신심과 발원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염불을 많이 했어요. 상근기를 위한 참선수행법이 있다면 나머지 하근기 대중을 위한 염불수행법을 보급해야 합니다.”

스님은 “일본의 경우에는 임제종이나 조동종의 선불교도 있지만 정토·법화종 같은 종파들이 서민들의 신앙적 갈증을 다 해결해 주니 개종할 필요가 없어 기독교 비율이 1%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타력 염불+자력 선=불퇴전의 염불선

스님은 한국불교 저변에 자리한 타력신앙에 대한 낮은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보통 타력이라면 무조건 안 좋게 보기도 하는데 불교의 연기법 자체가 타력”이라고 강조했다.

“이 세상에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숨 쉬고 하루 생명을 유지하는데 타력이 아니면 단 5분도 못살아가요. 타력이기에 연기인 겁니다. 저는 불교야 말로 적극적인 타력이라고 보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유일신적 타력이 아닌 연기론적 타력이라는 거지요.”

스님은 “염불수행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 그 경계를 관하는 관상염불, 그 다음에 염불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며 “염불하는 이 주인이 누구냐는 의심을 화두로 삼을 수도 있으니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염불이라는 타력과 선의 자력이 합쳐지는 것이 염불선입니다. 그렇게 해야 불퇴전의 경지에 이르지요. 수행을 할 때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금생에는 부처님을 확인하고 내세에는 왕생극락하는 것이 염불의 목표입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수행해 살아서 부처님 못 뵈면 죽을 때라도 친견해야지요.”

스님이 세운 전자불전연구원에서 전산화한 한국불교전서
어려서부터 정토사상과 인연 깊어

이러한 정토사상과 스님과의 인연은 어려서부터 이어졌다. 스님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모친의 병환으로 인근 사찰을 찾은 보광 스님에게 당시 사찰 주지 스님은 “너희 어머니가 회복하려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밤잠도 자지 말고 다른 생각도 말며, 오직 관세음보살만 찾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은 어린 마음에도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님을 살려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법당에서 하룻밤, 이틀 밤을 새우면서 일심으로 불렸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7일이 지나 회향일이 되었습니다. 그 후 병명도 몰랐던 어머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한겨울 법당에서 추웠다는 생각보다는 한 밤중에 바람이 불면 촛불이 꺼질 것 같아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스님은 그 이후 불교학생회 활동을 할 때 스님이 돼 불교를 중흥시키자며 인사할 때도 ‘성불합시다’ ‘불교중흥합시다’ 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원효 스님이 활동하신 경주 분황사에서 행자생활과 학업을 계속하다 이듬해 출가했는데 은사인 도문 스님이 분황사 약사전 현판인 보광전(普光殿) 이름을 따 보광이라 법명을 지어주셨다.

출가 이후 스님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진학했다. 여기서 스님은 ‘정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3학년 때 〈정토삼부경〉 과제를 했는데 평소 염불기도를 해서인지 마음에 계합이 되었어요. 이후 일본에 정토학으로는 세계적인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스보이 준에이 교수님 지도를 받으며 정토를 깊게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스님은 동국대 교수로 정토사상을 신라시대부터 최근까지 총정리 했다. 일본에서 학위 논문으로 원효 스님의 정토사상을 비롯해 신라 정토사상을 연구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 특히 서산사명 스님 제자들의 정토사상에 대한 논문을 펴냈다. 스님이 펴낸 논문은 150여편으로 책도 20권에 달한다.

스님은 “초의, 영담유일, 백용성 스님까지 하면 한국정토사상을 총정리하는 셈”이라며 “향후 한국 정토사상을 총 망라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스님은 “현재 25년째 일본 도원 스님의 ‘정법안장’을 번역해 주석을 달고 있는데 20년을 더해 95권 전체를 강의서를 내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용성 스님의 전서 30종도 새로 번역하고 있다.

스님의 정토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자불전연구소와 대각사상연구원 등을 세운 것. 스님은 한국불교전서 전산화를 완료하기도 했다.

스님은 “요즘시대에 부처님 말씀을 전산화해 인터넷에 올리면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이 이상 복 짓는 일이 없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1982년 보광 스님이 창건한 성남 정토사 전경
성남 정토사는 불국정토 구현 터전

스님은 학문적 성과 외에도 주석사찰인 성남 정토사를 정토구현의 터전으로 만들고 있다. 정토사의 만일염불법회에는 모두가 목탁과 악기를 치는 신명이 넘치는 법회가 진행된다.

“염불이 대중화될 수 있는 것은 모든 대중이 함께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목탁뿐만 아니라 북, 징 등을 치며 모두 함께 염불하는 순간에는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가 모두 평등합니다. 누구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정토사도 사부대중의 평등구조에서 운영된다.

스님은 1982년 사찰 재정을 모두 공개해 신도회가 관리하도록 했다. 신도들의 신뢰 확보는 정토사가 초창기 100평 규모에서 7000평 규모로 도량을 키우는데 원동력이 됐다. 스님은 여기에 2차, 3차 염불결사 등의 진행을 위해 대각회에 사찰을 헌납하기도 했다. 정토사에서 스님과 신도들은 최근 700평 규모의 염불만일결사 회관을 짓기로 결의하는 등 중창불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회관에서는 호스피스 교육을 비롯한 정토사상에 기반을 둔 다양한 교육과 문화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호스피스·장례문화 운동 적극 전개

스님은 정토사상을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1997년 동국대에 장례문화학과를 만들기도 한 스님은 호스피스 운동, 인권위원회 위원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스님은 왜 정토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얘기하는지에 대해 “잘 죽자는 것은 잘 살자는 것”이라며 “염불 또한 생사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노령화 시대에 필요한 문제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로 갈수록 정토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임종 수계를 다니며 있었던 사례를 예로 들었다.

“돌아가실 때 80%가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죽어서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임종수계를 받은 사람은 숨이 끊어져도 얼굴이 편안해요. 극락에 간다는 임종염불은 인간이 마지막 단계에 갔을 때 마지막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계가 이 운동을 소홀히 하고 있어요.”

스님은 이어 불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했다. 스님은 “적어도 불교를 믿는다면 불보살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며 “그 확신이 없으니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고 지적했다.

“부처님의 본원력이 아무리 커도 내가 믿지 않으면 안되요. 부처님이 계신 것을 믿고, 부처님의 본원력을 간절히 믿을 때 부처님께서 가피를 주는 겁니다. 돈 한푼 없었는데 경전을 전산화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부처님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힘을 믿으니 이뤄진 겁니다.”
스님은 그런 면에서 불교계가 불자들의 의식을 높이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가 내세관을 뚜렷이 제공해야 한다”며 “호스피스 문제, 내세 문제 등에 대해 소홀히 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 사회에서 종교는 타력의 자비와 자력의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활동을 펼치는데서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정토행자로 정토세상을 구현하는데 함께 정진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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