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4. 원표 스님

원표 스님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장흥 보림사. 원표 스님도 경덕왕 때 국가화합에 크게 기여했다.
위구르 지역서 80화엄 입수
중국 복건 지제산에 절 세워
회창법난 피해 귀국. 보림사 창건
서역·중국·신라 화엄 통섭한 선지식

중국 동남쪽 복건성 동북단 지역에 자리한 영덕 지역은 불교가 가장 일찍 들어선 지역 중의 하나이다. 진나라 때 이미 불교가 전파되어 불법 구도 활동이나 매장 풍속이 있었다.

지제산은 영덕 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천관보살과 그 권속이 상주하는 불교 도장에서 유래됐다. 지제산은 오늘날 중국에서 범어로 산명을 삼은 유일한 곳으로 천관의 지제산은 문수의 오대산, 보현의 아미산, 관음의 보타산, 지장의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오대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

이 지제산에 천관사상을 처음 전파한 고승이 신라 원표(元表) 스님이다. 원표 스님은 구도의 원력 하나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들어갔다가 천축으로 들어갔다. 천축에서 〈화엄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와 지제산 나라암에 들어 온 원표 스님은 이곳에서 한동안 두타행을 행하다가 다시 신라로 귀국해 장흥 보림사를 세웠다.

오늘날 중국불교계에서는 원표 스님이 〈화엄경〉과 천관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면, 지제산이 불교 명산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며 스님을 매우 높이 숭앙하고 있다. 나라암 나라사에는 원표 조사상이 봉안돼 있고, 지제산 지제화엄사에는 원표 스님을 개산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역 위구르로 구법여행

가장 오래된 기록인 송나라 때 찬녕이 저술한 〈송고승전〉의 〈당 고려국 승 원표전(唐高麗國僧元表傳)〉에는 원표 스님에 대한 얘기가 전해진다.

‘원표 스님은 본래 삼한 사람으로 천보년간에 중국을 유람하였고 이어서 서역으로 가서 성적(聖跡)들을 참배하였고 심왕보살이 지제산 영부를 가리켜 드디어 〈화엄경〉을 짊어지고 곽동(지금 복건성 곽동진 화엄사를 말함)을 찾아가 천관보살에게 예배하고 지제산 석실에 이르러 집을 짓고 살았다.’

지제산은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심왕(心王)보살이 ‘동남방에 지제산(支提山)이 있으니 옛적부터 보살들이 거기 있었으며, 지금은 천관(天冠)보살이 그의 권속 일천(一千) 보살과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하고 있다’고 전하는 등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져 있다.

〈송고승전〉에는 원표 스님이 인도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내용이 없다. ‘서역에 가서 불적에 예배했다’라고 되어 기록돼 있을 뿐이다.

조선 태종 때 쓰인 〈보림사사적〉을 보면 ‘원표 대덕(元表 大德) 선사가 월지국에 있으면서 처음 창건한 것이 이른바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이다. 산과 골짜기가 깊숙하고 물은 돌아 흐르며, 구름은 꽉 끼었고 지세는 넓고 평탄하여 당료(堂寮)가 구비하고 법려(法侶)들이 무리를 이루니 아름답고 상서로운 빛을 놓아서 불림(佛林)의 별세계가 되었으며 금모래의 보배로운 땅이라 절을 보림으로 삼으니 그 이름이 진실로 옳다. 돌아와 중국을 다니다가 월지국의 산과 같은 것을 얻어 절을 세우니 규모와 일상의 분위가가 월지국의 생김새와 한결같이 같았다. 산 이름을 이로써 하고 절 이름도 이로써 하였으며 회중(會衆)과 경전을 마련함도 월지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같지 않음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보림사는 서역의 모습을 모델로 해서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우전국이 월지국이라고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본래 월지국이 지금의 현재의 중국 신강 위구르지방에서 출발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서역을 대표해 표현됐다고 보면 될 것이다.

원표 스님이 〈화엄경〉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서역은 오늘날 신강 위구르 지방에 있는 호탄을 가리킨다. 지금은 이들이 모두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원표 스님 당시의 불교국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이 기록에서는 인도를 의미하는 천축은 전혀 언급이 되고 있지 않으며 월지국과 서역이 원표 스님의 구법여행지로 묘사되고 있다.

화엄경
왜 원표 스님은 서역으로 갔을까?

원표 스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장흥사 보조선사비
그런데 왜 원표 스님은 이곳으로 갔을까? 〈한서(漢書)〉 ‘서역기’(西域記)에는 ‘우전국왕은 서성(西城)에서 다스리고 있다. 장안에서 9천 6배 70리, 호수는 3천 3백, 인구는 1만 9천 3백, 승병은 2천 4백 명이다’고 전하고 있다. 우전국은 현재 중국에 속해 있지만 언어적으로는 인도와 가깝다. 이 지역에서 대승불교가 꽃을 피우고 〈화엄경〉이 완성된 것은 지리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인도와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우전국의 역경 승들은 적극적으로 대승경전들을 번역해 중국에 전했다. 〈화엄경〉의 경우, 60화엄과 80화엄이 모두 이곳 사람들의 번역에 의해 중국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구법여행의 대상지였던 것이다. 화엄신앙의 본 고장으로 크게 중요시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전국 사람들은 불심이 돈독하여 탑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법현전〉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 앞에 작은 탑을 세우 놓았는데, 그 중 제일 작은 것의 높이는 약 2장쯤 되어 보였고, 불상을 그 수레 안에 세워 두 보살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고 여러 천신들을 만들어 모시게 했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조각해 공중에 매달았다”고 전해진다.

이미 한역을 완성했는데 많은 구법승들이 우전국으로 가 〈화엄경〉을 구하려고 한 이유는 산스크리트어 원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또 인내와 고행을 통해 구도하려는 실천수행의 뜻도 강했다. 〈화엄경〉을 짊어지고 중국으로 가져오는 것은 〈화엄경〉 자체가 마치 탑이나 불상과 같이 신이한 영험을 지닌 대승경전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지제산에서 화엄사상 펼쳐

서역의 우전국에서 원표 스님은 자신의 구법여행의 목표인 〈80화엄경〉을 입수하고 또 심왕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심왕보살은 천관보살의 주처인 지제산에 〈화엄경〉을 가지고 가서 수행하라는 계시를 했다고 한다.

“나는 서역을 주유하며 심왕보살을 친견하였는데 (보살이) 나에게 이 경을 주었다. 또한 중국의 지제산은 천관보살의 주처인데 그 장소를 찾아서 경을 짊어지고 이르렀다. 거기서 이십 리를 가니 나가용담(那伽龍潭)이 바로 내가 찾던 곳이다.”

〈80화엄경〉에는 ‘동남방에 장소가 있는데 지제산이라고 부른다. 옛날로부터 여러 보살들이 그 가운에 머물고 살아오고 있는데 지금의 보살은 천관(天冠)이며 그 권속과 더불어 1천명이 항상 그 가운데 있으며 법을 설한다’고 전한다.

원표 스님은 지제산에 있으며 여러 자연환경의 악조건들을 극복했다. 맹수와 독충 그리고 귀신 등의 도전을 극복했다고 한다.

지제산 전설에 의하면 원표 스님의 화엄경 독송소리를 듣고 어느 날 나무꾼이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그 땅에 절이 세워졌다고 한다. 원표 스님은 화엄경을 독실한 불자들에게 주고 이후 ‘하늘을 올라가 떠났다’고 묘사된다.

장흥 보림사 창건 신라 화엄사상 중흥

‘하늘을 올라 떠난’ 원표 스님의 기록은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장흥 보림사의 창건주로 다시 등장한다.
유감스럽게도 원표 스님의 행장을 담은 기록은 많지 않다. 하지만 원표 스님이 보림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기록은 미국 하버드대 연경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신라국무주가지산보림사사적기〉에 남아있다. 이 사적기는 조선 세조3년 1457년부터 세조10년 146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림사 사적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중국 지제산에서 화엄수행을 하던 그가 귀국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 훼불(회창법난)에 따른 피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귀국한 원표 스님은 피난민의 신분이 아니라 경덕왕의 지원 하에 가지산 보림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펼친다. 가지산사는 화엄종 사찰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하였고 원표 스님은 경덕왕의 개혁정치에 법력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경덕왕은 특별한 왕명으로 가지선사에 장생표주를 세우게 하여, 사찰에 면세ㆍ면역의 혜택을 주었다.

화엄사상은 원융의 관점을 제시해 당시 국민통합을 이끈 사상이기도 했다. 수많은 보살들이 등장해 중생들의 비원을 수행과 기도를 통해 성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표 스님이 경덕왕의 지원을 받고 당시 지방 세력의 후원을 받은 것도 이런 화엄사상의 국가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림사가 원표 스님에 의해 창건된 내용은 884년에 세운 보조국사 체증의 탑에 기록돼 있다. 현재 보림사 경내에 세월을 딛고 서있는 이 탑에는 체증 스님이 왕명에 의해 보림사로 거처를 정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의 뜻을 전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마지못해 석장을 날려 가지산문으로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은 법력으로써 정치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경덕왕 18년(759) 왕이 특별히 명하여 장생표(長生標) 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표주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탑비의 내용은 보조선사 체징이 보림사를 동국선종의 총본산으로 만들고, 구산선문 가운데 첫째인 가지산파의 중심지임을 확인하는데 이 절이 원표대덕이 창건한 사찰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원표 스님이 서역과 중국의 보림사를 찾아보고 돌아와 신라에도 보림사를 창건하겠다는 원을 세웠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할 것이다. 그 원은 바로 이땅에 불법을 전하는 것이었다.

‘대저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이미 서역 중국과 같고 앞의 원표 대사와 다음 도의대사와 뒤의 체징 대사의 세분 큰 스님은 모두 선문의 대각조사이시니 생령을 사계에서 제도하고 성화를 삼한에서 베풀었으며 여래의 마음을 만리의 밖에서 얻어 여래의 도를 만세의 아래에 전하시어 이 산으로 하여금 옥을 온축하여 산은 빛나고 보배 구슬을 간직하여 물이 명미하며 숲 골짜기가 힘입어서 중첩하고 법교가 무궁토록 드리움이라. 이 절에 거주하는 이는 가히 힘쓰지 않으리오. 절 북쪽에 원표 대사가 초창하신 땅이 있으니 이에 절을 세운 옛 자취이므로 인하여 고가지(古迦智)라 일컫고 아울러 여기에 기록하여 써 뒷사람의 이어 받아 기술한 밑천을 여노라.’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