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정말로 자기 주인공의 불성을 믿어야 합니다

▲ 그림 최주현

오는 것 막지 말고 가는 것 잡지 말고
아무리 우리 도량에 누가 소 한 마리를 잡아왔다 하더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지극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이
그게 진짜 부처님 법입니다.


이 도량이 비좁아서 여러분이 바깥에 저렇게 전부 서 계신 걸 생각하니 죄송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식당이고 어디고 꽉꽉 들어차면서도 마당에 저렇게 섰어야 하는 여러분께 뭐라고 죄송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데는 공부라고 하기 이전에 생활이 공부니까 이것 저것을 따지고 자리가 좁다고 해서 안 올 정도라면 그건 공부 다했죠. 진짜 100% 인간 될 수 있는 그 공부가 지금 시급한 시대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겁니다.

왜 우리가 정월이면 촛불재를 올리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왜 불이 그렇게 귀중하고 그런가 하는 거를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만약에, 우리라기보다는 생명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돼 있었을까. 우리가 바람과 흙과 물과 이렇게 지내다보니까 그 속에서 세 가지가 모두 한데 협조하는 바람에 그 가운데서 불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그 불이 생겨서 곳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그러니 모두가 지수화풍으로 둘러싸이게 돼 있었죠. 그래서 스스로서 생명체들이 생겨나게 돼 있고요. 우리 가만히 보세요. 지수화풍의 수분과 흙과 이 바람과, 바람이라면 즉, 공기와 모든 게 종합되지 않는다면 생명체가 생길 수가 없어요. 모든 게 한데 종합됐기 때문에 흙을 갖다가 그냥 오래도록 쌓아놔도 그 흙 속에서 생명체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 거와 같이 생명체들이 그렇게 해서 창조가 됐다고 하는 거죠.

생명체들이 생겨나기만 했으면 또 뭘 합니까? 생겨나가지고 그 모든 게 조절이 되질 않아서, 크기만 하고 조절을 못하니 차원의 질서가 잡히지 않고 이렇게 되니까 뒤죽박죽이 되고 먹히는 놈도 그렇고 잡아먹는 놈도 그렇고 무슨 차원의 질서라든가 이런 게 없이 모든 게 그렇게 아수라장이 돼버리고 말았죠. 이게 그렇게 살다가 보니까, 이 지수화풍도 하나하나가 생명이 있는 거고 하나하나가 그 마음이 있는 거라 모든 게 종합이 돼서 ‘도저히 이렇게 해가지고는 될 수가 없다. 이건 개벽을 해야만 되겠다.’ 말하자면 개벽이 아니라 개혁이죠. 개혁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은 이 생명체들로 하여금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즉 말하자면 개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체, 개혁을 한 거죠.

개혁을 하고 나니까 어떠한 것이 생겼느냐 하면은 질서도 지키게 됨으로써 감각이나 지각이나 시각·촉각·청각·미각 이 여섯 가지에 달하는 문제들이 제각기 등장을 하게 된 거죠. 차원에 따라서 여섯 가지가 다 등장이 되지 않은 것도 있고 여섯 가지가 등장이 된 것도 있고, 차원에 따라서 세 가지만 된 것도 있고 두 가지만 된 것도 있고 한 가지만 된 것도 있고, 그 차원에 따라서 종류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등장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또 개혁을 한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조절하고 제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문에 들게 한 것도 됩니다. 그래가지고 모든 생물이 살다보니까 그때에 태어났던 생명체들이 개혁에 따라서 다시 태어나게 되니까 다시 태어난 짐승들은 모두가 소식(小食)을 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풀을 먹고 사는 짐승들이 있는가 하면 또는 자기 자신들의 생사를 거론할 수 있게도 됐답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서는 생사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실천하고 이러다보니까, 제일 나중에는 사람까지 등장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돼가지고 생사를 논의하게 되다보니까 아, 이 불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중하구나! 이 불성이라는 것도 귀중하지만 최초에 우리가 어디서 생겨났나?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됐죠. 먼저 태어나서 경험한 사람들은 전부 사람이 살 수 있는 농사일들이라든가, 사람이 살아나가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하는 이 생활 도법을 그대로 익히면서 또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연쇄적으로 차원을 높이면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우리가 불성이 근중한 줄 알게 됐더랍니다.

우리 이 불로 인해서 생명체들이 찾아왔다고 그래서 과거 몇 억겁 전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으로써 뭉쳐서 지수화풍을 또 먹고 살아. 그런데 지수화풍으로부터 와서 지수화풍으로 또 가. 지수화풍으로 또 가면 사대(四大)가 흩어져버려. 지수화풍 자체가 제각기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소립니다. 즉 말하자면 불바퀴다 불기둥이다 이런다면 불 하나의 기둥에서, 쉽게 말해 그 불바퀴에서 모든 게 마음이라는 입자가 나간다면 그게 바로 또 불바퀴가 되고 또 원자가 됩니다. 그렇듯이 인간의 그 생명의 창조도 역시 마음으로써 그 원자, 근본 하나에서 또 입자로 종자를 만들면은 그 종자가 씨가 되고 씨가 돼서 싹이 되고 싹이 돼서 또 종자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퍼진 겁니다.

이건 한마디 또 하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 ‘삼천(三千)’ 하면은, 즉 말하자면 하천세계 중천세계 상천세계 이거를 한데 합치면 삼천이 됩니다. 고거를 한데 합쳐서 삼천이 된다면 ‘삼천대천(三千大千)’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 전체를 합치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 평등한 공법(空法)에 의해서 대천세계가 되는 거죠. 이 대천세계에서 우린 한 부분에서, 지구라는 위성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모두들 요새 지구벌레라고 말들 합디다마는 지구가 집이 되고 자기 터전이 되고 도량이 돼서, 그냥 같이 너 나 할 거 없이 한데 싸여서 돌아가면서 살려니까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살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전부 필요로 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는 살 수 없다고 하죠.

그런데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하느냐? 귀중하게 해야 되느냐? 이 마음의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써 마음과 더불어 자신과 즉, ‘자(自)’는 이 몸이 되고 ‘신(神)’은 자기 불성(佛性)이 되는 겁니다. 이게 자·신이 다 둘 아니듯이 촛불재를 하는 것도 마음에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들질 않게 되죠. 마음에 있으니깐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이다 내 부모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그게. 모르는 사람은 전체가 가설이 돼 있다는 것도 모르니 한 가정이라도 그것을 알아야 전체가 다 가설이 돼 있다는 거를 알고 넓고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도 내 마음이 밝혀지면은 그 마음도 밝혀진다는 얘깁니다. 자식을 둔 사람들은 또 자식이라는 가설이 돼 있습니다. 부모라는 가설이 돼 있고. 그것이 자연의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가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은 불이 안 들어오듯이 우리가 스스로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간에도 가설이 돼 있는데 형제간에는 부모와 자식보다는 좀 덜하다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덜 가는 겁니다. 친척도 손바닥 다르고 손등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데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만 밝아질 뿐 아니라 자기 마음도 밝아져서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촛불입니다. 더군다나 조상님들도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그 모습을 쓰고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모습 쓰고 나온 대로 대접을 받게 돼 있거든. 여러분이 생각들을 잘 해보십시오. 항상 내가 얘기하죠. 개로 태어난다면 개 대접밖에 못 받고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짐승 대접밖엔 못 받는다. 돼지로 태어난다면 돼지 대접을 받을 거고 닭으로 태어난다면 닭 대접밖에 못 받는다. 사람으로 태어나도 천하게 태어나면 천한 대접밖에 못 받는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종자는 한 종자입니다. 참외씨를 심어서 씨를 받아서 또 참외씨를 심으니까 그 참외씨 그대로 나오더라는 얘기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격으로요. 그러니까 자기 씨를 심어서 싹이 난 거니까 그 종자를 또 열리게 할 수밖엔 없죠. 그러니까 이 촛불 하나가 얼마만큼 귀중한지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근본의 내가 탄생한 자리요, 나를 형성시킨 자리요, 또 우리 부모들을 형성시키는 그 에너지가 배출되는 장소입니다.

또 아래로는 자녀들이 말입니다, 나가서 외박을 하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외박을 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천차만별로 그렇게 부모들의 마음을 썩이고, 손가락질을 받고, 교도소에 가고,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고발하고, 부모를 고발하고 이러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 촛불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다는 얘깁니다. 촛불 하나가 그것을 다 대치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빛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의 능력입니다. 한생각에 찰나에 위성에도 가고, 우주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고, 문지방 너머도 가고, 문지방 너머나 우주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빛보다 더 빠를 뿐만 아니라 빛은 가다가도 중단이 되지만 이것은 물 속이든지 흙 속이든지 어디든지 높고 낮음이 없이, 가고 옴이 없이 오고 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촛불 하나를 진짜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진짜로 믿고 아주 가긍하게 실천을 하기 위해서 진짜로 믿고 하나를 들고 그렇게 위 아래를 껴잡아서, 둥글게 껴잡아서 자기와 더불어 같이 한 방에서 밝게 된다면 벌써 차원이 달라져요. 그래서 나가서 그런 어지러운 일들을 저지르지 않게 돼요. 이런 얘기를 듣고 무시하면 무시한 대로 자기네들이 무시를 받게 되는 거니까 뭐 나는 하등 상관이 없어요.

어느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아들이 나가서 외박을 하고 이 코에다 뭐 대는 거 있죠? 그거 뭐야? 허허허. 응? 본든가? 난 이름조차도 모릅니다. 그거를 하고 노오래가지고 그렇게 그냥 다니더랍니다. 그러니까는 공부도 안 하고 그렇게 되니까 이거는 학교에 가서 만날 빌고 그래도 만날 선생님들은 퇴학시킨다고 그러고, 그러자 이거는 한이 된 거죠. 그것도 3대 독자라는데 말입니다. 허, 이거 이럭하니 정말 얼마나 그 부모의 마음이 찢어졌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를 오게 돼서 오로지 그냥, 오로지 그냥, 그저 자나깨나 자나깨나 아마 진실로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넉넉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점을 치고 온통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물어보고 이럴 수도 없는 거고. 그러니까 없는 사람이 공부는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오직 그렇게 되니까 어느 날 하루는 덧정이 없어서, 장독 이렇게 있는 데에 그 큰 항아리 김치 항아리를 죄다 내놓고 이렇게 씻는데, 그 물을 쏟고 옮기고 이러는데 느닷없이 오더니 “어머니, 제가 좀 옮겨드리고 이렇게 거들어드리죠.” 그래서 이게 웬일인가? 이게 그냥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게, 허허허, 좋아도 내려앉고 언짢아도 내려앉고 ‘이게 혹시나 미쳤나?’ 허허, ‘어디서 잘못됐나?’ 이런 생각이 퍼뜩 들더랍니다.
그래서 자꾸 눈치만 보는데 이렇게 잘 해놓고선 “어머니, 속 많이 썩혀드렸죠?” 하면서 “어머니, 이젠 속 안 썩혀드릴게요. 이제는 내가 내 힘으로 살아야 하고 부모들을 모셔야 할 테니까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학교는 못 다니게 됐으니까 검정고시를 봐서 하겠습니다.” 이러더랍니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을 들어가서 대학교 지금 거반 마칠 때가 됐습니다.

요컨대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 주인공의 불성을 믿고, 티끌 하나 남기지 말고 몽땅 다 내가 살아나가는 것이 바로 그놈이 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믿음! 이래야만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믿는 것만치 되는 것이지, 누구한테다 항의를 합니까? 나도 주인공을 찾았는데 왜 안됩니까? 아, 잘되다가 안됩니다. 잘되다가, 잘되니깐 마음이 헤벌레해졌겠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자기 할 탓이지 나한테다 항의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부처님께서 잘 아시고 “너희 자체에 다 제각기 컴퓨터가 있으니까 거기에 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될 테니깐 너희 맘대로 해라. 너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곡차곡 입력이 돼서 차례차례로 나오느니라. 그러니깐 그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 되입력을 한다면 그 앞서의 입력된 게 없어질 수 있지만 그 나오는 자리에다 되놓지 않는다면은 그 입력된 업보성 유전성 인과성 윤회성 세균성 영계성, 이 모두가 없어지기커녕 점점 차곡차곡 더 쟁여지니 그거를 없애려면 그것이 나오는 구멍에다가 다시 놔서 입력이 돼야 그 앞서에 입력된 게 없어지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를 이렇게 자세히 얘기해 드리는데도 모른다면 난들 어떡합니까? 응?

그래서 우리 이 도량에서도 행자들이 들어오면 잘못됐건 잘됐건, 잘했건 못했건 모든 게 내 탓이다 이거야. 내 탓! 내 탓! 잘해서 칭찬을 받았으면 그것도 내 탓, 잘못해서 꾸중을 들었어도 그것도 내 탓. 누구를 나무랄 게 없어. 모두가 제 탓이기 때문에, 제 탓인 그 자체 내에서 꼭 누(累)를 끼치지 말아야 하고 질서를 지켜야 하고, 벌써 누를 끼친다 하면 자기가 누가 되기 이전에 벌써 이 전체가, 부처님 법이 그냥 누가 되는 거죠. 오는 것도 막지 말고 가는 것도 잡지 말고 즉, 여러분이 아무리 우리 도량에 누가 소를 한 마리 잡아왔다 하더라도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다 하더라도 공손히 마음으로 지극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이 그게 부처님 진짜 법입니다. 하치않은 거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진실한 정성이기 때문에 그걸 하치않게 받아서는 아니 된다 이 소립니다. 하다못해 사탕 한 봉지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에이, 이까짓 거를 가져왔어?’이렇게 생각을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옛날에 원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집은 가난하기 짝이 없고 애는 여덟이나 낳았는데 어머니는 그냥 불불불불 떨고 밥도 못하고 몇 해를 두고 그렇게 사는 집이 있었더랍니다. 그런데 남편이 군인이었는데 셋방에 들어있고 가져올 게 없으니깐 사탕 한 봉지를 가져와서 우리 부인하고 자식들을 살려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관(觀)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사탕 한 봉지로 천도가 됐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가만히 보니까 6·25 때 부모들이 치마를 둘러 쓰고서 그냥 총을 맞아서 죽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치마를 둘러쓰고 그렇게 됐으니까, 그 부인이 총 맞은 형세를 하고는 눈도 안 보인다고 그러고 그냥 이러고 헤매니 그거, 그거 난처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때 너무 지극한 마음으로 남자가, 부처님도 안 계신데 방석에다가 그냥 절을 너무 곱게 삼배를 하기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십니까? 하치않은 그 방석에다가, 거기다가 저렇게 지극하게 남자가 저렇게 할 수가 있나? 그 정성이 돈으로 치면 억만금이 된 거죠.

그래서 그 집안이 이제는 씻은 듯 부신 듯 나아서 그 애들이 대학, 대학원을 다 다니게 됐고 남편은 승진이 됐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가 여기를 오게 돼서 우리 남편이 승진을 또 해야 될 텐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이제는 집도 있고 다 잘사니까. 그래서 승진이 안되는 것도 법이고 되는 것도 법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그랬더니만 정성을 백일을 두고 들였어요. 그랬는데 그만 승진이 안됐거든요. 그러니까 승진 안됐다고 그냥 아주 안 나오는 겁니다. 허 참!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공부를 합니까? 그러니까 이 중에도 마음공부 하나도, 몇 해가 돼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그 사람이 안 오더니만 언젠가 한번은 와서 턱 달겨들어요. 그러고는 “스님, 죄송합니다.” 그러는 겁니다. “나한테다 왜 죄송하다고 그러느냐. 난 하등 상관이 없는데….” 그러니까, “아이고, 우리 아빠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아빠 대신 승진이 돼서 월남에 간 사람이 그냥 해골만 왔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후퇴하는 것도 법이고 전진하는 것도 법이라고 그러시더니 만약에 우리 아빠가 그때 승진을 해서 월남에 갔으면 어떡할 뻔 했느냐. 그렇게 우리 아빠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냥 그러더라고요.
그러니 이 부처님 법이 얼마나 묘법입니까? 부처님 법이 묘법이라 하니까 저기 앉아계신 (등 뒤의 부처님을 가리키시며) 부처님만 부처님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더불어 같이 모두 부처입니다. 내가 항상 그러죠. 저 부처님의 형상은 바로 여러분의 형상이고, 부처님의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법이 여러분의 법이라고. 우리가 떠나면 부처님도 없으실 거고 부처님이 떠나면 우리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깐 더불어 같이 사는 그 가운데서 묘법이 나고 또 부처님의 천차만별의 그 법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귀중하게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이라면 마음내는 거는 바로 바퀴입니다.

또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부처님 모셔놓고 문수 보현 이렇게 모셔놓죠? 그렇게 모셔놓은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고 뜻을 깨달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내지 않으면 부처고, 마음을 내면은 법신이 되는 겁니다. 문수가 법신입니다. 법신이 생각을 했다 하면은 보현이 됩니다. 남을 위해서 모두 움죽거리는 거 말입니다. 나와 더불어 같이 위해서,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 보현이 화(化)해서 즉, 화신(化身)이 돼가지고 응신(應身)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속에서 수천, 아니 헤아릴 수 없는 그 응신이 탄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천차만별의 보살들이 다 부처님 속에서 나온다 이런 거죠. 이러니 천차만별로 화해서 변하고,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어느 중생에게 아니 응하는 게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짐승한테 들어가도 짐승과 둘이 아니게 돼주셔서 건지시고, 사람한테도 그렇고 천차만별로 화해서 건져주시니 말로는 다 할 수 없어요. 그러니 부처님이란 이름은 모든 일체가 다 종합된 공심(共心)입니다. 공심·공체(共體)·공생(共生) 또는 공용(共用)·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는 이 거대하고 광대무변한 자체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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