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일요법회-성타 스님(불국사 주지)

<1월 19일 봉은사 일요 법회에서 불국사 주지 성타 스님은 “깨달음은 자비의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며 청정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했다. 또한 부처님 전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공양물을 올리는 것도 깨달음을 성취하고 자비를 실천하여 청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발원으로 바치는 것이라고도 했다. >

▲ 성타 스님은...1952년 월산스님을 은사로 불국사에서 출가한 성타스님은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1955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61년 통도사의 강원을 졸업했다. 이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포교원장을 역임했고, 1998년(제22대)과 2006년(24대) 2010년(제25대)에 불국사 주지로 선출되어 소임을 수행해 왔다.

존재의 관계ㆍ인과법 등
연기의 원리 아는 것이
깨달음 곧 ‘지혜의 완성’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청정
육체, 마음 청정할 때
부처님 세계에 접근

극락왕생은 불교 수행 종착점 아냐
 부처님의 깨달음은 불교 종착점이면서 출발점입니다. 깨달음을 외면하고는 불교에서 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들은 흔히 아미타 신앙을 통해서 내생의 왕생극락을 발원합니다. 그러나 왕생극락했다 해서 원이 다 성취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왕생극락함으로 해서 아미타 회상에서 좋은 환경아래 수행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극락에 갔다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나무나 새, 모두가 다 법을 설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가게 되면 사람들은 타락할 수 없고 수행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성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불교적 수행으로 이야기하자면 왕생했다는 것은 50% 밖에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이루어야 나머지 50%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비로소 불교의 궁극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죠. 이 세계는 인간의 고뇌, 갈등 등 생의 부조리한 상황을 뛰어넘는 세계이며 깨달음을 통해 도달 할 수 있는 세계이고 향유할 수 있는 곳입니다.
 깨침을 이루지 않으면 어떤 곳에 있든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락세계에 가서도 좋은 환경 속에서 수행을 하면 더 잘 되겠죠. 어디를 가든지 깨침이 대전제로 되지 않고는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지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락세계에 가서도 수행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않으면 목표를 50프로밖에 달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맞물림
 싯다르타는 출가하기 전 인생근본에 대한 문제,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 공포 이러한 숙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6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고행을 하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극한적 상황을 겪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행이 수행의 증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부처님은 고행을 그만두는 데서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양 극단을 탈피하고 중도를 선택함으로써 깨달음의 길이 열린 것이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이라는 것에 의해 생성되고 이것이 없어지면 멸한다는 것이죠. 인과 연의 관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 어디든 적용이 됩니다. ‘세계일화’라는 말도 세상이 한 꽃송이처럼 피어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조건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보면 죽음은 어디서 왔으며 생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죽음이란 조건에서 생이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조건이 변화됨으로써 젊음이 병들고 늙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다시 생으로 가죠. 서로 조건이 되어 순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는 결코 둘이 아닙니다. 얼핏 볼 때 생과 사는 다를지언정 인연관계 속에서 보자면 생사는 둘이면서 둘이 아닙니다. 둘이라 할 수 없으니 하나입니다. 생은 사를 포함하고 사는 생을 포함하는 보완관계입니다. 손바닥과 손등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요.
 생을 별도로 보게 되면, 우리는 생은 좋아하고 사는 싫어하게 됩니다. 하나로 보면 생이라고 좋아할 것도, 사라고 해서 싫어할 것도 없습니다. 생사일여에요. 생사를 일여로 보지 못하는데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또한 차별이 생기고 분별지가 생기기에 인간에게 고통 또한 생깁니다.

 고통을 부르는 집착
 좋고 싫음은 곧 집착이고 집착을 떼어낼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를 하나로 보면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이 집착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지가 바탕이 돼서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이 무지를 발생해서 무지가 집착을 가져오고 집착에서 고통이 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차별과 분별 속에서 대립과 갈등이 있고 거기에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깨달음이죠.
 이를 이해하는 것도, 말로 설명하는 것도 쉽습니다. 실천이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는 수억 년 영겁을 집착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어떤 스님이 대단한 각오로 출가를 하고 은사 스님밑에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달을 수가 없자 그 스님은 많은 선지식을 찾아뵙고자 행각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은사 스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고 그 스님은 바랑을 메고 길을 나서게 되었지요. 그런데 절 문을 나서기도 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발에 난 상처를 보며 스님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나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공인데 왜 아파할까’. 바로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것을 벗어나면 아픈 것도 없어지니까요. 이러한 것을 깨닫자 행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 스님은 큰 깨침을 이루고 무차별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죠.
 이렇듯 ‘나’라는 것을 버리면 절대 평등의 세계가 나옵니다. 행각을 가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깨침은 인간 고뇌 넘어선 지혜 완성
 무집착의 경지에 이르려면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라고 못 깨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제자들이 깨달았듯 우리 또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침의 세계를 몇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느냐하고 묻는다면 세,네가지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깨침이라는 것은 인간 고뇌의 궁극을 넘어선 지혜의 완성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혜완성을 통해 연기법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렇다면 큰 깨달음 뒤에 남는 건 무엇일까요.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자비 실천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든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면 그 존재에 대해 자비가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천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깨침은 관념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참깨침은 자비가 동반될 수 밖에 없어요.
 가족은 하나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살죠. 자녀를 보살피지 않는 부모는 비판받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 자연, 생명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자비를 실천할 때 참된 깨침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신 후 하루도 편하게 있지 않으셨죠. 동분서주하시면서 깨침을 실천하셨습니다. 자비는 단적으로 말하면 보시입니다. 보시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법보시, 물질보시 등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시입니다. 부처님은 법보시를 계속 하신 것입니다. 길에서 사시면서 보시 자비행을 하셨던거죠. 그래서 물질만 보시하는 것을 보시라 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보시도 있을 수 있어요. 봉사를 한다든지 남을 위해 도와준다든지 하는 것도 다 노력봉사, 보시입니다. 물질로도, 지식으로도, 얼굴로도 보시할 수 있어요. 미소지어서 보는 사람마다 기쁘게 해 주는 것도 큰 보시죠.
 심지어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래요. 애어(愛語),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요. 사랑은 능히 하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은 나 자신도 소유하고 있어요. 나에게도 있는 참된 사랑은 우주의 사랑과도 합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보시는 고통을 덜어주고 기쁨을 더합니다. 발고여락(拔苦與樂), 괴로움을 뽑아내어 없애주고(拔苦), 즐거움을 찾아내어 얻도록 해 주는 것(與樂)입니다. 발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죠.

 고통 덜어주고 기쁨 더하는 보시
 이것은 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진정한 사랑인지 친구인지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끝까지 가서 고통을 덜어주니다. 덜어줌으로써 그 사람과 일체가 됩니다.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요. 그 사람의 정서와 합해질 때 그 사람의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가 되어서 같이 아파한다면 그 고통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고통을 반으로 줄이는 거죠.
 여락은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쁨에 같이 기뻐해주는 거죠. 기쁨은 함께 할 때 배가 됩니다.  그것이 보시의 정신입니다. 깨침을 이루면 연기법칙에 의해 만물을 하나의 식구로 보기 때문에 자비실천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청정입니다. 부처님과 우리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부처님은 귀한 곳, 청정한 곳에 있다 생각하고 우리는 사바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에 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중생과 부처님과의 차이는 청정입니다. 청정을 유지하지 못하기에 부처님을 멀리서 뵐 수 밖에 없습니다. 청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오염의 모습, 육체, 정신, 마음을 떨쳐 버려야합니다. 오염이 있는 한 부처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절에 가기 전 목욕재계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 정신도 같이 닦아야죠. 지나친 욕심을 갖는다든지 남을 무시한다든지 이것은 다 잘못된 오염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것, 오염된 모습입니다.
 육체, 마음 전체가 청정할 때 부처님의 세계와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깨침의 완성, 자비의 실천, 청정 세 가지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이 세 가지 가치를 갖고 있어요.
 일본의 한 절에는 1400년 전에 밝힌 불을 아직도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등불은 부처님의 깨침의 세계, 광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1400년 전에 밝힌 불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것이지요.
 법당에 가면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공양물을 올리죠. 원래 부처님께 바치는 것은 꽃입니다. 꽃은 기쁨을 주는 것이죠. 만인에게 기쁨을 주기에, 꽃은 자비와 보시를 상징합니다. 불은 부처님의 지혜이며, 향은 청정성을 담고 있어요. 좋지 못한 향기를 가시게 하니까요. 그렇기에 절에서 우리가 하는 행위는 부처님의 깨침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 자비의 실천, 청정성 유지를 하자는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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