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귀경례  

부처님은 우리 인류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
모든 번뇌·망상
온갖 죄악에 싸여 있는
우리들의 근본 스승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불이란 이를 설명하는 소리다. 항상 그 자체가 커다란 지혜의 광명을 발하면서 어디까지나 평등하고 아무 삿된 것이 없이 순결하고 자유자재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무데서고 영향을 받지 않는 행동 그 자체를 각이라고 한다. 각은 자기가 알고, 남에게 알도록 하고, 안 것을 행동하고 실천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면 아무런 망녕된 생각이 없으므로 그 생각이 정당하고 광대(廣大)하여 저 허공과 같고 지혜의 광명은 우주의 어느 곳에라도 안 가는 곳 없이 두루 다 갈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이익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는 환원(還源)의 뜻에서 소귀일심(所歸一心)이라고 한 마음에 돌아가는 바이며,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돌이킨다는 것은 자기의 양심, 자기의 지성스런 생각에 돌아간다는 소리다. 자기의 지성스런 생각에 돌아간다고 할진대 그 지성스런 생각이란 것이 다름 아니라 밝고 바르고 사이좋은 것이 불법승(佛法僧)의 참된 뜻인즉 바로 거기 삼보(三寶)에 돌아간 것이 된다. 여기는 매우 중요한 대문이다. 우리의 생각의 바탕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 원바탕인 즉은 광명, 정대, 화합한 그 자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를 오직 한 마음, 유일심(唯一心)이라 부르고 그 자리를 안 것을 유일심관(唯一心觀)이라고 한다.

지심귀명례하고 나서 삼계대사(三界大師), 사생자부(四生慈父), 대은교주(大恩敎主)한 것은 우리가 돌아가는 바의 덕을 나타낸 말이다.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어디에 우리의 목숨을 바쳐 절할 것인가? 지금 그 장소를 정하는 바이다.

바로 그 자리가 삼계대사며 사생자부며 대은교주라는 것이다. 대은(大恩)이라고 하였으니 우리 인류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불의 성격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면 지덕(智德)과 단덕(斷德)과 은덕(恩德)을 들 수 있다. 지덕은 부처님이 모든 지혜(智慧), 반야(般若), 지식(知識), 위즈덤을 다 구비했다는 것.

단덕(斷德)이란 일체의 번뇌(煩惱), 망상(妄想), 세속(俗世)의 인연(因緣)을 끊는 용단(勇斷)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도(求道)하는 데 있어서는 처자(妻子), 권속(眷屬), 왕위(王位)등 일체를 내어던지고 심지어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니시었던 분이다.

그러나 지덕(智德)이라면 그런 것은 철학자(哲學者)라도 가질 수 있고, 단덕(斷德)은 대장부(大丈夫)라면 갖출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두 가지의 덕만 가지고서는 우리 인류의 대지도자(大指導者)가 될 수는 없다.

은덕(恩德)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부처님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거금(距今) 2천5백년 전의 어른이며 또 그는 인도 사람으로서 우리와는 피도 다를뿐더러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데도 우리가 왜 떠받드는 것일까? 그것은 이 분이 그의 온갖 정력(精力)과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만인류(萬人類)를 위해서 베푸셨다는 그 은혜를 고마워하고 감격하기 때문이다.

은혜란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은 그 은혜를 생각해서이다. 똥가루 서말을 먹으면서 길러낸다고 하지 않느냐. 그 사랑을 베푸시어 진 자리 마른 자리를 갈아, 진 자리에는 자신이 누우시고 마른 자리에 우리를 눕히시며 길러낸 그 은혜를 생각해 볼라치면 구비 구비 뼈에 사무치고 심정이 뭉클하게 울리어 오는 것이 있으리라. 부모의 은혜를 생각할 때 반드시 감격이 따르게 마련이다.

부처님은 우리 인류를 가르쳐 주신 그 은혜가 크다. 어리석고, 못생기고, 철없는 짓을 하고, 모든 번뇌, 망상, 온갖 죄악에 싸여 있는 우리들의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석가(釋迦)는 족성(族姓)이고 성(姓)은 고오담마(Godumma) 모니(牟尼)는 성자(聖者)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불(佛)에는 이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색(色)이 무애(無碍)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 그 하나다. 색이 즉 빛이 무애하다는 말은 스스로 깨치고 남을 깨치도록 한 그 색신이 참으로 묘하다는 것.

둘째는 각행(覺行)이 자재궁만(自在窮滿)하다는 것. 이것은 앞에 말한 바 있지만, 탄색용승(歎色用勝)이라고 하여 그 색의 용(用)이 형식적이거나 관념적(觀念的)인 데에 빠지지 않고 실사회(實社會)의 현실적인 그 공용(功用)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 이렇듯 색의 용(用)이 아주 수승하기 때문에 어디에 가, 어떠한 일에 맞붙더라도 이기지 않는 적이 없다. 언제나 늘 이긴다. 이렇듯 색덕(色德)을 읊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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