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경계도 내면에 놓고 내면 경계도 바로 그 안에 놔라
목마르면 그냥 물 마시는 것, 그게 바로 불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가 붙지 않는 데서, 나라는 걸 세우지 않는 데서
바로 구경경지를 이루어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큰스님,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불법의 공부 과정을 삼단계로 가르쳐 주셨는데 첫째는 참나의 발견, 즉 자아(自我)의 발견과 완성, 둘째는 모두와 하나가 되는 것, 즉 전체 속에 자기가 있음을, 셋째는 이런 수행을 거쳐 보살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둔한 저희들은 평소 큰스님의 법문을 통하여 여러 번 가르침을 받아 왔지만 아직까지 미혹한 가운데 있습니다. 차제에 이 삼 단계의 공부 과정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드리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얼른 와 닿지 않나 봐요. 닿는 분들도 계시고 안 닿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것을 이름해서 ‘삼정지각 불이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난 그냥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이니 잘 참작해서 들으세요. 육위법(六位法)도 있고, 팔정법(八正法)도 있고, 십이지법(十二支法)도 있고 그렇지만 그것을 전부 떠나서, 그것을 떠나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다 모두 넣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작업을 시키기를 이렇게 했죠. 처음에 일차적으로도 죽어야 나를 볼 수가 있고, 이차도 죽어야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고, 셋째도 죽어야 나하고 둘이 아닌, 바로 나툼을 알 수 있어서 구경경지(究竟境地)를 이룬다.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그럴 때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그랬죠? 내가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또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일체 만법이 바로 나로 인해서 돌아간다고요. 그래서 나로 인해서 벌어진 거니까 나를 다스리면서 ‘바깥의 경계도 내면에 놓고 내면의 경계도 바로 그 안에 놔라.’ 이렇게 모든 작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말고 ‘처음에는 무조건 용광로에다 헌쇠 넣듯 놓아라. 나를 이끌고 가고 일체 만법이 들고 나는 곳은 거기니까 모든 것은 거기서 하게끔 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거기 놔라.’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를 발견해서 보는 단계가 되고, 나를 보는 단계에서는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바로 거기에 또 놓고 가되, 안에서 어떠한 뜻이 오더라도, 무엇을 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할 거는 하되 거기에서 하라는 대로 맹종하지는 말라고 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를 발견한 뒤에 나를 넓혀서 생사윤회에도 끄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주장하는 그런 안의 경계가 있습니다. 안의 경계가 있는데 거기에 맹종하지 말고 누가 되지 않는 일은 듣고 누가 되는 일은 듣지 말고 버려라. 아니, 버린다기보다 듣지 말고 하여튼 나를 테스트해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감사하구나’ 하고 생각해서 거기 또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안의 경계에 맹종하고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안으로 기울어지고, 밖에서 끄달리고 또 밖으로 떨어진다면 밖의 경계에 기울어지는 것이니까 안으로나 밖으로나 맹종하지 말고, 모든 이치를 눈으로 보고 듣고 모든 것을 내가 주장해서 결정을 짓는데, 그 양면은 다 거기에 총괄이 돼서 그대로 법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경계나 망상이나 이런 것에 끄달리지 않고, 그대로 생각하면서도 걸림이 없이 그대로 자기가 주장자를 올바로 세우고 이끌어 나가는 공부라고 보겠습니다.
셋째번에는 둘이 아닌 까닭을 알았기 때문에 둘이 아닌 나툼을 나툰다고 했습니다. 그 나툼이라는 것은 열반계를 말하죠. 즉 말하자면 ‘열반각지(涅槃覺地)’, ‘구경각지(究竟覺地)’를 말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구경각지는 어떠한 것이 구경각지냐. 여러분한테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항상 “여러분 이름이 많으시죠?” 이럽니다. 여러분 이름이 많으시죠? 남편이라는 이름도 있고, 사위라는 이름도 있고, 아버지라는 이름도 있고, 또는 아들이라는 이름도 있고, 형님이라는 이름도 있고, 아우라는 이름도 있고, 할아버지라는 이름도 있고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사회에 나가면 또 회사의 일원으로서의 이름이 있을 거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붙어서, 예를 들어 아들과 만나면 아버지의 생각과 행과 말이 아주 선연하게 선명하게 나갈 수 있도록 되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뜻도 ‘모든 게 내가 없고 남이 없다.’ 하는 것은 일체가 나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도량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고 중생 아님이 없이 모두가 한자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도 없는 것이 부처다.’라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릇 따라서, 예를 들어 종지에 응해 달라면 종지가 돼 버리고 사발에 응해 달라면 사발이 돼 버리십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달마 대사가 구렁이가 됐다가 금방 달마 대사가 됐던 겁니다. 그처럼 나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병원에서는 아무 병도 없다는데 나는 죽겠습니다.” 또 “병원에서 몇 달 못 산다고 합니다.” 또는 “어디가 아픈데, 몸져눕지도 않고 이렇게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고, 또 부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그냥 바깥으로 끄달리며 다니는 분들, 이런 분들이 천차만별로, 그릇대로 주어지듯이 그렇게 많죠. 그럼 사생(四生)의 그 인연된 것을 볼 때 인간 사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천체가 바로 한데 합쳐진 게 일체 생명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만약에 구렁이가 ‘나를 구원해 주시오.’ 할 때 어떻게 하느냐. 부처님의 마음이 구렁이 속으로 들어가서, 예를 들어서 모든 문을 활짝 여시고선 그거를 안아 들인다면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자기 모습이 바로 그게 돼 버려요. 구렁이가 돼 버리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 사람이 건져 달라고 할 땐 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고, 저 사람이 건져 달라고 할 땐 저 사람이 되고, 또 돼지가 살려 달라고 할 땐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가, 소 속으로 들어갔다 말 속으로 들어갔다 또 하다못해 풀 속으로도 들어갔다, 나무 속으로도 들어갔다 목신도 되고, 구더기 속으로 들어가서 구더기도 되고 이러니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다 이겁니다. 그게 바로 ‘열반구경지’, ‘구경지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삼계(三界)를 통달했다 이 얘깁니다, 삼계를. 나의 삼심(三心)을 통달해서 삼계를 통달했다. 과거심(過去心)이나 현재심(現在心) 미래심(未來心)을 다 통달해서 과거세계, 현재세계, 미래세계를 다 통달했다. 그래서 자유자재한다. 그래서 어느 사람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벌레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목신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지신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용신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다. 일체의 만물만생 어떠한 것이든 그 가지각색으로 헤아릴 수 없이 내가 됐다가 또 이게 됐다가, 화(化)해서 이렇게 돌아가는데 어떤 거 됐을 때에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부처님이라고 그렇게 이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경경지라고 할 수 있는 각(覺)을 이루어서, 그 마음이 무심(無心)의 도리인 중용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유인이 되려면 우리가 바로 ‘삼정지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삼 단계가 통달돼야죠. 그것은 내 마음에서 십이인연법이니, 육바라밀이니, 팔정도니 이렇게 많은 일들을 이론적으로 하기 이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생각은 체가 없어서 저 바깥에 나가는 것도, 문지방 넘어가는 것도 한 찰나죠. 앞뒤 뚫린 텅 빈 그 불바퀴 속을 서슴없이 들고 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주 삼라대천세계를 그대로 자유스럽게 들고 난다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여러분처럼 경을 많이 읽었거나 또는 경의 용어를 쓴다거나 이럴 줄을 몰라서 좀 답답하시겠죠. 그러나 우주 천하가 그대로 큰 불바퀴, 작은 불바퀴, 둘이 아닌 그 불바퀴가 그대로 극명하게 과학적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보니,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말씀하셨어도 지금 현재도 말씀을 하고 계시고, 미래에도 말씀하고 계시고, 과거에도 말씀했더라 이겁니다. 그 말씀이 법이 돼서 끊임없이, 끝간 데 없이 여러분과 더불어 언제나 함이 없이 하고 계신 그 사실을 여러분도 증명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당신, 즉 말하자면 자기로부터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나오셨으니까 이 세상이 있고, 이 세상에 있으니까 상대성 원리로서의 일체 만법을, 독불장군이 아니라 공심(共心)으로서 공용(共用)을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그 공용을 할 때 찰나찰나 변하면서 찰나찰나 화하면서, 찰나찰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서 끊어짐이 없이, 그렇게 우리는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을 충만히 두루 하면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학적으로 친다 하더라도 그렇고, 지금 세 단계의 문제가 사람에게는 아주 극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내가 짊어지고 나왔으니까 없고, 미래는 가지 않았으니까 없고, 이 짊어진 거는 붙을 자리가 없어서 없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도 고정됨이 없고 몸뚱이도 돌아가는 게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어떤 것을 먹을 때, 어떤 것을 만날 때, 어떤 것을 들을 때, 어떤 것을 말할 때, 어떤 것을 볼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그렇게 변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어떤 걸 부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찰나로 변해서, 즉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수많은 입자가 화해서 바로 분신이 되어서, 여러분의 모든 모습, 마음, 말, 뜻으로 응해 주시는 그 천백억화신의 뜻을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의 그 주인은 바로 몸뚱이 속의 중생들 의식을 다 끌고 다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이 삼 단계의 자유인이 되는 길이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삼 단계의 그 모든 이치를 생각할 때, 지금 놓으란 말은 재차 하는 소리지, 여러분이 지금 놓고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은 모르니까 붙들고 있는 겁니다, 자꾸자꾸. 착을 두고 욕심내고 아집이나 아상으로 모든 일을 ‘내가 했다’ 하고 돌아가니까 이거는 어렵게 부딪치는 거죠. 여러분이 지금 누구를 만났다가,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이 사람을 만났다가, 금방 저 사람을 만나고…, 둘이 아닌 까닭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뚜렷하다 이 소립니다. 전력이 둘이 아닌 까닭에 어느 불이나 불은 똑같지만 전구는 각각이듯이.
그럼으로써 그 도리를 삼 단계로 나눈 것입니다. 나눴어도 나중에 결국 삼계를 통달한다면 모두 그대로 요리할 수 있어서 삼 단계가 삼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서 삼 단계가 삼 단계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삼 단계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모두가 아닐 때에, 나 아님이 없다는 도리가 거기에서 선명하게 나올 수 있고 그때에는 바로 말없이 이거냐 저거냐,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내면세계로 둬야 옳으냐 바깥세계로 둬야 옳으냐, 이론이 맞느냐 마음이냐, 이런 것도 다 통달하게 되어 그런 것도 말할 게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불이법은, 예를 들어서 “이게 옳습니까, 저게 옳습니까?” 할 때에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스위치를 누를 때에 “불을 켜야 옳겠습니까, 안 켜야 옳겠습니까?” 그러고 불을 켭니까? 안 그러시겠죠?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벌써 전등이 모두 가설이 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대로 아무 소리 없이 불만 켤 뿐입니다. 그리고 방바닥에 물이 떨어졌으면 그대로 아무 소리 없이 걸레 갖다가 훔치는 것뿐입니다.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아무 소리 없이, 목마르니까 급하니까 그저 냉장고 문 열고 그냥 먹거나 “나, 물 좀 줘.” 이래서 그냥 물을 먹을 뿐이지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목이 말라서 물 달라는데 이유가 뭐가 붙느냐 이겁니다. 내가 먹어야 옳으냐, 안 먹어야 옳으냐 하고 누구더러 물어보고 합니까? 그리고 물더러 또 물어봅니까? 내가 너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이러고 물어보고 먹습니까? 목마르면 그냥 먹는 것입니다.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불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가 붙지 않는 데서, 나라는 걸 세우지 않는 데서, 바로 구경경지를 이루어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그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관습에 의해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게 목석이지 어떻게 사람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생활에서 그대로 참선이 돼야죠. 좌선을 한다고 앉았다, 몇 시간을 좌선을 한다, 이건 좌선이 아닙니다. 또 좌선을 하고 일어나서 “아휴, 오늘은 하루 종일 좌선을 여덟 시간이나 했어.” 이렇게 아주 제일 잘한 것처럼 그래도 그것은 아니죠. 일분일초도, 하지 않았다 했다 하는 소리 없이 일상 생활에서 그대로 참선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말 그대로 그것이 좌선이요, 참선입니다.
내 마음이 편안해서 이리 왈 저리 왈 끄달림이 없어야죠. 아무리 마음이 망상투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도 관여함이 없이 ‘응, 그래?’ 하고 마음이 일어나는 걸 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는 그 마음이 참선이죠. 여러 마음들이 나오더라도 ‘아, 이 마음. 그래 그래, 그럴 테지.’ 하면서, 수많은 의식이 다 마음들이 있으니까 그저 여기서 이렇게도 나오고 저렇게도 나오는데, 지켜보면서 옳은 거는 옳은 것대로 그른 거는 그른 것대로 다 쓸 수 있는 그릇이 되게끔 다 몰아서 넣는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올바른 지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아, 지금 보십시오! 모두가 이 마음 핵심이 수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정치라든가 젊은 청년들이라든가 학생들 모두가 그저 누구 말마따나 마음 일어나는 대로 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나라는 것부터 돌아다볼 줄 알아야 되는데, 그리고 생각할 점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으니까 그렇죠. 강도질은 누가 시켰으며 선행은 누가 시켰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거기 놓는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지금 한마디 묻는 것을 길게 말해서 좀 안됐습니다만, 우리가 그러한 핵심을 뚫어서 수행하도록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또, 정치하는 사람이라든가 젊은층들이 모든 일들을 하는데 자기가 핵심적인 문제를 수행하고 가질 못했기 때문에, 지금 대학 문도 넓히지 못하죠. 나오는 문은 좁히고 들어가는 문은 넓혀야 하고, 또 기술계의 고등학생들도 기술방면에서 정당하게 대우하도록 정부에 건의해서, 월급 주는 것도 학력보다는 기술이나 능력대로 지급이 된다면 대학을 들어가려고 기를 쓰지도 않을 것이고, 이렇게 부정부패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되느냐? 이게 다 수행을 못했기 때문에, 넓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소리를 이렇게 듣고 흔들리고 저렇게 듣고 흔들리고, 바깥으로만 끄달리는 관습 때문에 이것을 과감하게 처리들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선진국이 되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그렇게 고달픈 역사를 가져온 것도 그 탓입니다, 바로. 불교를 등한시하고 유교를 중시했기 때문에 바깥으로 끄달리고 관습에 얽매여서 그렇게 된 거죠. 그러한 역사를 짊어진 채 앞으로 재정 문제라든가, 공업 문제라든가, 의학 문제라든가, 또는 과학 문제라든가, 천체물리학 문제라든가 천문학 문제라든가 이러한 문제들을 전체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이냐? 우리가 근본을 돋워 주고 근본의 수행을 시켜서 앞으로 해 나가는 일들이 분야마다 한마음 속에서 나투어지게끔 해야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의학 분야라면 유·무를 한데 합쳐서 해 나간다면 그거는 제일 가는 의사일 것입니다. 법신(法身)이자 의사죠.
그러니 모든 분야가 하나하나 정신노동, 정신의학, 정신과학…, 모두 정신으로 돌아가야죠. 마음으로부터, 정신계로부터 하단계로 하달이 돼서 우리가 출중하게 해 나갈 수 있다면 부정부패, 이런 문제들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부질없는 싸움들은 안 할 겁니다, 아마. 일체를 자기로 보게 된다면 싸워 봤자 자기를 죽이는 건데…. 남을 물에다 끌어 놓으려면 자기도 물에 들어가야만이 끌고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 자기 죽이는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과학이 발전이 되어 기계화를 이룬다 하더라도, 로보트로 한다 하더라도 자기와 남을 더불어 살릴 수 있고 이익하게만 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이는 기계만 만들고 핵무기나 이런 것만 만드는 게 아니라 살릴 수 있는, 그리고 보존할 수 있는, 수명을 길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택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한마디만 더 하고 가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이 ‘에이, 뭘 그럴까?’ 이렇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그대로, 생각에 의해서 그냥 입력이 되면서 그냥 곧바로 나오는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차가 손을 대지 않고도 그냥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으로 한다면 차 사고도 그렇게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왜냐하면 인력을 적게 쓰고도 많이 쓴 것보다도 몇 곱절 더 이익을 볼 수 있고, 경제난에 허덕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방에 앉아서 세계를 전부 탐험할 수도 있고, 방에 앉아서 우주 법계를 다 탐험하고 결정지어서 마음으로 생각해서 쓸 수 있는 그런 단계가 오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런다면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아까 삼 단계의 문제, 바로 삼 단계가 삼 단계가 아닌 도리로 삼 단계도 없고 일 단계도 없다는 그 사실을 아시고 그대로 여러분이 자기 탄생을 한다면, 삼계를 모두 통달할 수 있으며, 바로 삼계를 통달했다는 이름도 없는 그런 통달이 된다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그 구경경지를 이룰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문제입니다. 어떻게, 가슴에 닿게 말씀을 해 드렸습니까? 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당최 그것이 말로 해서 되지 않는 거니까 그걸 잘 다듬어서 여러분이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게끔 하십시오.
대중 일동: 감사합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91년 2월 03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